그것은 1436년 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때 나, 미카일 아그네스는 미스트라에서 아버지와 함께 도시내 궁정에 출두했다. 아버지께서는 모레아의 통치공중 한 분이신 친왕 콘스탄티노스 전하를 뵈옵기 위해 나를 복도에 남겨두고 자리를 비우셨고, 나는 그 곳에서 그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동안 기다리다가, 나는 복도를 지나가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는 평범한 서기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또한 진짜 서기처럼 양피지 서류 뭉치를 가득 들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서기와는 무언가가 달라보였다. 흔히 보던 이들보다 훨씬 기품이 있었으며, 체격도 호리호리할 지언정 뭇 서기들처럼 나약해 보이지가 않았다. 영양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는 사자라고나 할까. 나는 그에게 관심이 동하여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또한 나를 보았는데, 그도 내 행색에 관심이 동했는지 내게 질문을 했다.
"자네는 누군가?"
"미카일이라고 합니다."
"자네는 왜 여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멀뚱히 서 있는 건가? 시간은 귀한 것이라네."
"저는 그저 멀뚱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대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서기님."
나는 그의 행색을 통해 그의 직책을 유추하여 발언했다. 그는 서기라는 말에 잠시 흠칫하는가 싶더니, 곧 소리내어 웃었다.
"오. 서기라니. 내가 그렇게 보이는가?"
"처음 뵙는 분의 직위를 감히 추측하여 죄송합니다만, 지금 귀하의 행색은 영락없이 서기직의 관료이십니다. 그렇기에 감히 보잘 것 없는 사견으로 유추를 해보았습니다. 만약 다른 직책을 가지고 계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왼쪽 가슴을 탁 소리가 나게 치며 고개를 조금 숙이자 그가 자유로운 한쪽 손을 저어보였다.
"아니, 사과할 필요는 없네. 하긴, 내 복장이 서기처럼 보이긴 하지. 중요한 귀빈을 맞이할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이런 복장을 하고 다니거든. 자네가 그리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그런데, 무엇 때문에 대기를 하고 있었는가?"
"저의 아버님께서 미스트라의 통치공이시자 모레아의 통치공중 한 분이신,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라이올로고스 전하의 부름을 받으시었습니다. 저도 아버님과 함께 궁에 왔는데, 보시다시피 저는 아버님의 명에 따라 이곳에서 아버님이 만남을 끝마칠 때 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입을 살짝 벌리더니, 이내 내게 물었다.
"오, 이제 알겠군. 자네 아버님 성함이 혹시 마누엘이던가?"
"예. 그러합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제 아버님을 어찌 아십니까? 제 아버님은 그리 특출난 직책의 장교가 아닙니다만."
"특출난 직책의 장교가 아니지만, 가지고 있는 직책에 비해 더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장교이기도 하지. 그 때문에 부름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자네 아버님께서는 아직 부른 사람을 만나 뵙지 못하고 있을 걸세."
나는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깊은 의문을 느꼈다. 그러던 차에 그가 내게 다시 말했다.
"이 곳에서 대기하고 있기 보다 나와 함께 가지. 자네 아버님이 있는 곳에 가세."
"저는 이 곳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아버님께 받았습니다."
"나는 통치공 전하의 명을 받고 있네만."
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났다가 나중에 무슨 불호령을 받을 지 몰라 착잡한 고민을 하며 그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통치공 전하를 만나 뵐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있으신 곳이라면, 통치공 전하를 알현할 장소일텐데 저 같은 아무런 직책 없는 이가 그 곳에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와 함께 가면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그래. 갈텐가, 말텐가?"
나는 결국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내가 제안을 승낙하자 그는 내게 한 차례 미소를 지어 보인뒤 나를 이끌고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로 들어간 순간 난 그 곳에 있던 서기 몇 명과 아버님을 뵐 수 있었다. 아버님은 방으로 들어온 나와 남자를 번갈아가며 보며 잠깐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시더니, 이내 내 앞에 선 남자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통치공 전하의 충직한 군인, 마누엘 아그네스가 전하를 뵈옵나이다."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이 경색되어 얼어붙었다. 내 호흡, 내 동공, 나의 사고, 모든 것이.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내 앞에 선 남자, 아니. 통치공 전하께옵서 나를 돌아보시며 말을 건넨 직후였다.
"이런. 많이 놀랐나보군, 미카일? 자, 이게 바로 자네가 만난 '서기'의 정체라네."
나는 그 분을 향해 황급히 무릎을 꿇었고, 방금 전까지 마주하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가 내게 말했다.
"일어나게. 미카일."
"아닙니다. 제가 어찌..."
"나의 명령이라도 계속 무릎을 꿇고 있을텐가?"
그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다급히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셨고 직후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 전하께옵서 나를 보며 계속 해서 말씀하셨다.
"몸가짐과 예의가 훌륭하군. 집안에서 교육을 잘 받은 것 같아. 자네 아버님께서 자네에게 어떤 교육을 시키셨나?"
"교육이라 하심은 지금의 상황과 관련 있는 교육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배운 모든 걸 말해보게."
나는 그 분께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것을 빠짐 없이 말했다. 겸손한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 보잘 것 없는 재주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약간의 검술과 창술, 기마술, 궁술, 전략과 전술, 역사, 라틴어, 튀르크어등을 배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수준인지라 감히 통치공 전하의 앞에서 늘어놓기에는 그렇습니다만, 배운 것은 사실입니다."
"다양하게 배웠군. 그런데 군인 가문에서 태어났으면서 라틴어와 튀르크어를 배운 것은 좀 의외로군. 마누엘,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겠나?"
그러자 아버지가 그 분께 대답했다.
"역사와 라틴어를 배우게 한 것은 우리 제국의 근본에 따른 것이고, 튀르크어를 배우게 한 것은 언젠가 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될 아이로서, 적의 언어를 배워두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튀르크를 적이라고 칭한 아버지에게 콘스탄티노스께서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적이라."
콘스탄티누스께서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분이 내게 말했다.
"다른 것은 일단 미루어 두고, 네 검술을 한 번 보자. 마누엘, 이 곳에서 잠시 기다려주겠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고는 나를 궁정내의 뜰로 데려가시려 했다. 내가 당황하여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통치공의 관심을 끈 것에 기뻐하실 뿐 이었다. 결국 나는 콘스탄티노스 전하를 따라 뜰로 향하였다.
도착한 뜰의 외곽에는 튤립들이 여러 송이 피어 있었고, 그 외에 다른 화사한 꽃들도 피어 있었다. 정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여러모로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콘스탄티노스께서는 그 곳에 이르러 내게 검 한자루를 주셨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가, 나를 향한 그 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 분의 말은 이러했다.
"나와 겨루어 보면 되네. 가볍게 말이야."
"하지만 이것은 진검이 아닙니까...? 전하의 옥체에 조그마한 생채기라도 난다면..."
"오호라.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전하가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는 그만. 지금은 네 실력을 알아보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전하께서는 자신의 검을 뽑으시고는 그것을 내게 겨누셨다. 나는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고, 그 순간 전하의 검이 내게 날아왔다.
고작 1분여의 대련이었으나 나는 그 시간 동안 콘스탄티노스 전하의 검을 막는데에 진땀을 빼아만 했다. 그 분께서 내게 검을 휘두르고 찔러 넣으신 횟수는 어림 잡아 20여회에 이르렀는데, 단순 수치로 계산을 하자면 3초에 한 번 꼴로 검이 날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 분의 검을 막는데에 집중하느라 공격도 제대로 못하다가, 마지막에서야 겨우 한 번 어설프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케도, 전하께서는 내 공격을 아주 가볍게 막아내셨다.
나는 전하께서 "그만."이라고 말하고 검을 내리시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내 검을 그 분께 돌려드렸다. 전하는 그 검을 받으며 내게 물으셨다.
"몇 년동안 검술을 배웠느냐?"
"7살때 부터 입니다. 전하. 저의 아버님께서 그 때부터 제게 목검을 잡게 하셨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채 5년이 안됩니다."
그렇게 대답한 뒤 나는 당돌케도 감히 그 분께 질문을 했다.
"전하께서는 언제 처음 검을 잡으셨습니까?"
"오, 나 또한 너와 비슷하다. 7살 때부터 검을 잡았지. 나의 아버님도 내게 그 때부터 검을 잡으라 하셨거든."
그러면서 덧붙이듯 말하셨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서 말이지. 나 뿐 아니라 현재의 황제이신 요안네스 형님 폐하와 모레아 전체의 군주이신 테오도로스 형님 전하도 마찬가지셨다. 물론 동생들도."
그 분은 두 자루의 검을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놓으신 뒤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나. 오랜만에 궁정 사람이나 귀족들이 아닌 다른 이를 만나니 나도 모르게 말이 많아진 모양이다. 이제 다시 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자."
나는 군 말 없이 그 분의 뜻을 따랐다.
다시 알현실에 들어온 나는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본인의 자리에 앉으신 그 분께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드렸다. 그 분은 우리 부자(父子)의 인사를 받으신 후 내 아버지 마누엘에게 임명장을 건네셨다. 승진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계옵신 황제 폐하와 모레아에 계신 통치공 전하분들께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더불어 시민들에게도."
그렇게 추임새를 넣으신 콘스탄티노스께서는 이제 나를 바라보셨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미카일 아그네스, 가까이 오라."
아까전 복도나 뜰에서와는 전혀 다른 엄숙한 목소리에 나는 의식을 하기도 전에 몸을 움직여 그 분의 앞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그 분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달은 내 의식이 땀을 배출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분 께서는 자신의 손을 내 어깨에 얹으시며 말씀하셨다.
"미카일 아그네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예가 제법 출중하다. 내 눈에는 앞으로 그대가 더 성장할 요지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뛰어난 보석 또한 결국 연마가 되어야만 그 빛깔을 뽐낼 수 있는 법이다. 그대의 아비 또한 훌륭한 스승이나, 이제 더욱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으므로 그대의 성장을 책임질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인저, 이제 그대를 내 근위병으로 임명할테니 내 근처를 수행하면서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성장토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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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고증 오류 몇 개를 더 잡았따. 고증 지적과 정정은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