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 대왕릉비의 수수께끼
비문 속의 일본 관계 기사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 왜와 조선의 관계를 말해 주는 자료 가운데 고구려의 호태왕(광개토 대왕·영락대왕) 비문이 있다.
이것은 414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 대왕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압록강 중류에 위치한 집안(중국 동북 지구 길림성 집안)에 세운 높이 약 6m의 비석이다.
비문은 1800여 자 가량이 새겨져 있는데, 시조의 출현과 건국의 유래를 적고 호태왕을 기리는 뜻에서 능을 만들며 비를 세웠다는 것을 적고 잇다. 그런 다음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연대 순서로 서술하고, 능의 관리에 관한 것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문에는 몇 차례 왜병의 존재가 등장하여 주목을 끈다.
즉, 광개토 대왕이 죽위한 391년 이래 왜병이 바다를 건너왔다든가, 399년에 백제가 왜병을 끌어들여 신라의 국경 지대를 침략하므로 광개토 대왕이 5만 명을 낙동강 전선에 보내 이를 격파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뒤 404년과 407년에 다시 왜병이 대방계(황해도 연해안)에 쳐들어왔다가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궤멸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고구려군이 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왜병과 몇 차례 남한 지역에서 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본 학자들에게 있어 야마토 정권의 남한 경영을 주장케 하는 결정적 자료가 되어 왔다.
특히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來渡海破百殘□□□爲臣民)' 라는 부분은, 신묘년인 391년에 야마토 정권에 의한 조선 출병의 증거가 되어《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 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어 온 것이다.
떠오르는 의문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지금 우리들이 알고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의 비문이 실제의 비문 그대로인지 아닌지 하는 점부터가 의심스럽다.
이 능비는 188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주 집안현 통구 현지의 개척 농민에 의해 발견된 뒤, 마침 첩보 수집차 만주 지방을 몰래 여행하던 일본 중위 사코 가게노부가 탁본을 떠 가지고 돌아왔따.
그러나 그 탁본은 <쌍구가묵본(문자의 윤곽을 붓으로 나타낸 다음, 그 자간을 먹으로 바른 것)>으로서, 정식 탁본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게다가 이 탁본은 일본 참모 본부에서 6년 동안 비밀리에 학자들을 동원하여 판독 잡업에 들어간 끝에 1889년 그 내용을 세상에 공표하였다.
따라서 비문 판독 작업을 벌이는 중에 일본 군부가 고대 일본의 한국 진출을 역사적으로 합리화시키기 위해 비문의 일부를 변조했으리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여러 시기에 걸친 능비문의 탁본·판독문·사진들을 정밀하게 대조해보면 여러 자료들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된다.
재일 동포 학자인 이진희 씨는 참모 본부에 의해 발표된 사코 중위의 탁본과 그 판독문 중 왜병 관계의 내용들은 실제로 날조도니 것이며, 나아가 참모 본부는 이 사실을 영구히 숨기기 위해 1900년경에 군인을 비석이 있는 현지로 보내어 비면에 석회를 발라 비문 자체를 일부 변조했으리라는 추측을 한 바 있다.
실제로 1900년대까지는 비의 전면에 석회가 발라져 있었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비문에서 말하는 왜를 야마토 정권으로 속단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 경영 기관으로서의 임나 일본부 또한 허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광개토 대왕릉비의 변조설이 비록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다고 하나, 비에 등장하는 왜병을 야마토 정권의 침략 부대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한·일 고대사에 전반적인 재검토가 절실히 요구된다.
이 비의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비문의 현지 조사와 함께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꾸준히 행해져아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