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그분을 영웅이라고 찬양했다. 기사 왕의 뒤를 이어가는 영광스러운 기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본 그분은 달랐다.
사람들의 말과는 다르게 찬란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업적이 늘어도 그분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전장에 나가 승리를 거머쥐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전장에 나갈수록 영혼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그분은 늘 무언가에 묶여 살고 있었다.
- 노리스의 일기 -
“이 성문을 지나가고 싶은 자는 당장 내 앞으로 나와라!”
성문 앞 커다란 기사가 소리쳤다. 덩치가 산만 한 기사가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었다. 크기가 성인 남성 정도 되는 커다란 망치를 가뿐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기만 해도 어깨가 무거워지는 갑옷을 입고도 의기양양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이냐? 네놈들은 정말 겁쟁이가 따로 없군!”
기사가 앞에 얼어붙은 병사에게 다가갔다. 망치를 쥐어 잡고 아까보다 크게 소리쳤다.
“잘 봐라. 이것이 네놈들의 최후일 것이다.”
기사가 망치를 힘차게 들어 올렸다. 붕 하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기사가 혀로 날름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 망치를 내리찍었다.
쨍그랑
커다란 소리와 함께 병사가 산산조각이 났다. 병사의 팔과 다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머리와 몸뚱어리는 작은 파편이 되어 주변에 흩날렸다. 기사가 흩어진 잔해들을 짓밟자 꽈득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백여 명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일제히 한 걸음 물러섰다. 비참한 동료의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정작 몸은 뒤로 움직였다. 병사들이 서로를 살펴보았다. 누구 하나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당한 사람이 열 명이 넘어갔다.
“저자가 얼음 기사인가?”
“네. 맞습니다. 거대한 망치, 두꺼운 갑옷, 그리고 결정적으로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봐서 확실합니다.”
그 모습을 리벤과 노리스가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이를 갈고 있지만, 몸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노리스가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노리스가 주둔 구역을 살펴보았다. 어느새 쌓여 있던 식량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성벽을 포위하고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식량도 식량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노리스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보았다. 방패를 쥐고 있는 팔이 희미하게 떨리는 병사가 보였다. 그 병사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 병사의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였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저희에게 불리할 뿐입니다.”
“맞아.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불리하겠어.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지.”
“네. 리벤님. 부탁드립니다.”
“얼음 기사의 목을 베면 즉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도록. 공성 무기를 우선시하고 반드시 성문을 무너뜨리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노리스가 리벤을 보았다. 검은 투구를 쓰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었다. 수많은 전장을 함께 했는데도 이 모습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노리스는 그런 리벤을 보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수나 악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노리스가 고개를 숙이자 리벤이 검을 허리춤에 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리벤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병사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던 병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리벤이 자신의 옆을 지나가면 환희에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흔쾌히 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입을 모아 그의 이름을 외쳤다.
얼음 기사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적 병사들 사이로 이질감이 느껴졌다. 방금 전만해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자세히 병사들을 보았다. 그러자 적 병사들이 양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다가 갈라지듯이 서서히 그 물결이 얼음 기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 리벤이 있었다.
얼음 기사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리벤을 보았다. 온몸을 검게 물들인 모습이 괴상했다. 투구, 갑옷, 심지어 검집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길했는데 갑옷 군데군데 이상한 가시가 나와 있었고 그 옆으로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악마 같았다. 악마? 그 순간 얼음 기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소문이 있었다.
오래전, 옆 나라에 이상한 기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온몸이 검은 기사는 마치 괴물과도 같다고 한다. 그의 전투는 늘 괴상했기 때문이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거나, 혹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거나 그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마침내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었다. 얼음 기사가 망치를 들어 어깨 위에 올려놓고 눈앞의 리벤을 보았다. 소문과 다르게 괴이한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멀리서 봤을 때 악마를 보는 것 같았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별거 없었다.
몸집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일반 병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아까 느꼈던 이질감은 여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대가 검은 기사, 리벤이 맞는가?”
얼음 기사의 말에 리벤이 고개를 들었다. 대답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끼익하고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만 울렸다.
“다시 한번 묻겠다. 그대가 검은 기사 리벤이 맞는가?”
“지금이라도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리벤이 얼음 기사를 보며 여유롭게 얘기했다. 팔짱을 끼고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얼음 기사가 혀를 차고 소리쳤다.
“살려준다고? 하! 건방지기 짝이 없군.”
얼음 기사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쩌저적, 귓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리벤의 발아래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음이 리벤의 다리를 타고 올라와 하반신을 장악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지. 지금이라도 살려달라고 빌면 특별히 살려주지.”
얼음 기사가 망치를 들어 리벤의 머리를 조준하였다. 소문은 어차피 부풀려진 이야기에 불과하지. 얼음 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별 볼일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가치는 있었다. 소문의 검은 기사를 쓰러뜨린다면 분명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리벤이 얼음 기사의 말에도 꿈쩍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얼음 기사를 볼 뿐이었다. 태연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얼음 기사의 핏줄이 올라왔다.
“재수 없는 녀석. 그렇게 죽고 싶다면 직접 보내주도록 하지.”
얼음 기사가 망치를 내려치려는 순간 리벤이 오른손으로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그의 하반신을 장악하던 얼음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보고 얼음 기사가 다급하게 망치를 내리쳤다. 내려오는 망치를 보고 리벤이 왼손으로 방패를 쥐었다. 오른발에 힘을 주고 방패로 앞세워 망치를 들이박았다. 쿵. 커다란 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뭐, 뭐야?”
얼음 기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리벤을 보았다. 손끝이 얼얼한 것이 충격이 그대로 손을 타고 들어왔다. 대체 무슨 힘이 이렇게 세단 말인가?
리벤이 그대로 힘을 주어 망치를 밀어냈다. 방패에 밀린 망치가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얼음 기사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리벤이 오른손으로 빠르게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얼음 기사의 옆구리를 세 개 후려쳤다.
“젠장!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챙 하는 소리가 얼음 기사의 귀를 때렸다. 망치의 무게와 아까 맞은 반동 탓에 뒤로 넘어지려고 하자 왼발을 뒤로 내빼어 몸을 지탱하였다.
이대로 넘어지면 끝이다. 얼음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뭐지? 이놈은 어떻게 얼음을 부순 거지? 힘으로 부순 건가? 이게 정녕 사람인가?
얼음 기사가 숨을 들이마시고 온몸을 앞으로 내세웠다. 간신히 몸을 지탱한 후 앞을 보자 뛰어오르는 리벤이 보였다. 얼음 기사가 몸을 움직일 틈도 없이 리벤의 검이 얼음 기사의 투구를 향해 날아갔다.
콰직. 투구에 금이 가면서 얼음 기사가 뒤로 쓰러졌다. 살얼음이 깨지듯 투구의 금이 쫙 그어졌다. 커다란 얼음 기사의 몸이 한순간에 풀썩하고 쓰러졌다. 그 모습이 마치 인형의 실이 끊어진 것 같았다. 리벤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얼음 기사를 보았다. 투구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리벤이 반대쪽 허리에 찬 단도를 꺼내 얼음 기사에게 다가갔다. 쒸익쒸익, 힘겨운 숨결 사이로 얼음 기사가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투구를 붙잡고 들어 올리자 이음새가 보였다. 투구와 갑옷의 이음새를 끊자 두꺼운 갑옷 속에 숨겨져 있던 목이 보였다.
“잘 가라.”
리벤이 망설임 없이 단도로 목을 베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전군 전진하라!”
노리스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나아갔다. 병사들이 전진하는 가운데 리벤이 얼음 기사를 보았다. 뜨거운 피가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렸다. 뚝뚝. 리벤의 단도에서 칼이 흘러내렸다.
이게 몇 번째 인 걸까? 리벤이 고개를 숙였다. 셀 수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을 빼앗은 건가? 이미 그런 것을 세기에 너무 늦었다.
“아아, 또 죽였네.”
그때였다. 얼음 기사의 뒤쪽에서 갑자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벤이 고개를 들어 얼음 기사를 보았다. 푹 쓰러져 있는 얼음 기사의 몸에서 검은 덩어리 나오기 시작했다. 덩어리들은 점차 모여 사람의 모습을 변했다. 그것도 몸집이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리벤에게 다가왔다.
“정말 잘도 죽이는구나. 과연 복수자야!”
소년을 보자 리벤의 가슴이 뛰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리벤이 숨을 토해냈다. 호흡이 흐려지고 손끝이 간질거렸다.
“닥쳐.”
리벤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최대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소년은 그런 리벤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더 죽이고 싶은 거지? 알아. 난 알고 있어.”
리벤이 허리의 검집에 손을 움직였다. 슬며시 검을 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이 보였다. 성으로 들어가는 병사들이 눈에 밟혔다.
“그래그래. 아군도 상관없지. 그저 죽이면 되는 거야.”
리벤이 검을 빼려는 순간 노리스가 리벤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노리스가 조심스럽게 리벤을 보았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했다. 얼음 기사의 시체를 멍하니 보다가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검을 손에 쥐려고 하는데 그 움직임이 이상했다.
“노리스?”
“네. 어디 불편하십니까?”
리벤이 투구에 손을 올렸다. 또 이건가? 눈을 돌려 얼음 기사를 보았다. 검은 덩어리도, 소년도 없었다. 한숨을 내뱉고 검을 잡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성을 보았다.
“별일 없어. 그보다 얼른 성으로 가자.”
“부디 무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노리스가 리벤을 보았다. 검은 투구를 쓰고 있는 탓에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노리스가 앞장서서 성을 향해 나아갔다. 리벤이 그 뒤를 쫓아갔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뒤를 한번 보았다. 검은 소년이 리벤을 바라보고 씩 웃었다. 눈을 깜빡이고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검은 소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