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녀가 떠나간 뒤. 나는 한참동안 책을 살펴보았다. 커버에 그려진 정밀한 꽃문양들은 분명 아름
답고 화려했지만 무늬 자체로 시대를 특정지을 수는 없었다. 소위 공백의 역사라고 불리우는 시대
이후부터 약 2000년. 대륙은 다양한 국가와 다양한 문화를 거쳐왔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인류사와 같이 걸어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발전과 폭이 넓다. 시대를 대표하는
양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그런쪽에 들어가는지는 애매하다.
다음으로 첫페이지의 고대어. 이것은 현존하는 절정의 연구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
종업계에서 최고를 자부하곤 있지만 최고가 아닌게 확실한 나로써는 이 언어가 그림처럼 보일뿐이다.
읽는 방법도 모르고, 뜻도 알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우리들의 조상들도 마찬가지여서, 결과적으
로 예나 지금이나 뜻을 제대로 알고 썼을리는 만무하다. 오래된 가문들이 가지고 있는 사치품이나 대
대로 물려내려온 가보등에 붙여진 이름들이 그대로 사용되곤 있지만 물려준 선조도 상속받은 후손도
그 단어의 의미나 읽는 법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고 하니 말 다한 것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알다시피 에스테리아라고 불리우는 커다란 대륙이다. 에스터 교단의
신화에서 이 세계에는 총 아홉대륙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무도 에스테리아 대륙을 떠나 돌아온
역사가 없으므로 검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생각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는 단 하나이며 그것이 바로 이
대륙인 것이다. 그리고 이 대륙의 역대표는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신화로 가득한 잊혀진 시대. <공백의 역사>,
전설과 영웅의 시대인 <고대력>,
마지막으로 기원이 보다 명확하고 사료들이 넘쳐나는 편에 속하는 현대. 즉 <신력>.
첫페이지에 쓰여있는 해석불가능의 고대어는 신들이 사용했던 언어라고 불리우며 세일리시이 어, 또는
<공백의 역사>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마르몬드 문명권이 사용했다고 해서 마르몬드 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절정의 언어학자들을 데리고 와도 이것의 해석은 불가능하다. 즉. 쓰여있어도 그것이 정말로 신들의
시대에 적은건지 아니면 그냥 고대부터 있던 단어를 따라 그린건지 해석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페이지 페스.
아마도 책의 이름이거나 출판자의 서명이거나 할 것같은 첫페이지를 넘기자 드디어 책의 내용물들이 고스
란히 모습을 비추었다. 창백한 흰색의 몸에는 지필가의 정성이 확실히스며들어가 있었다. 숙취도 잊어버릴
만큼 나는 집중해 그것들을 한참동안 살펴보았다.
...
두꺼운 책에는 많은 음식의 그림과 조리과정, 레시피를 나타내는 글로 가득차 있었다. 상당히 간단명료하게
번호를 붙여 써져 있는 재료 숙성법, 손질법, 요리법, 비율, 보관 등에 대해선 딱히 덧붙일 말이 없는게 애당
초 전통요리로 지금까지 지방에 이어져온 음식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데 문제는 이쪽 분야에 대해서 내 지식
은 전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 떄문이다. 내가 의심을 했던것은 고서에 특히 많은 어떤 상징, 암호체계같
은 것이었는데 아직 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그런 낌새도 발견하지는 못했다.
즉. 책은 순수하게 요리 레시피를 적은 서적이 맞는 것 같으며, 다만 커버로 쓴 가죽은 요즘도 볼수 있는 가아
라는 몬스터의 가죽을 써서 가공한 것 같다. 오래된 책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장식이 많이 들어가 있으며 글자
하나하나에도 정성이 들어가 있다. 책 그 자체가 지금보다 귀했을 것이고 인쇄술 역시 지금과 차이가 있을테니
책은 하나의 사치스러운 예술품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희귀소장품으로써의
가치가 하나, 그리고 다양한 옛시대의 요리법이 담겨있으므로써 실용적 가치가 존재할 수 있다.
발견 당시 나름 정성드려 보호마술까지 걸고 숨겼던데다 책 상태는 최고. 현대어로 적혀 있지만 옛방언같은 것
들도 적혀 있다는 점, 에테미아 출판협회나 에스터 교단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저자,출판일등이 현대의 양
식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 책커버에 들인 세밀하고 정교한 장식과 질, 손수 적었지만 아름다운 글자, 그리
고 그것을 적은 잉크도 시중에 마구 만들어지는 가짜나 그정도 래밸의 민간에서 사용하는 것보다도 훨씬 비싼
것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최소 100년, 조심스럽게 더 추측하면 400년도 넘을 수 있는 서적이다.
책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나의 식견은 딱 여기까지.
남은 선택지는 3가지다.
1.샤넷 페코에게 지금까지의 사실을 전해주고 알아서 처분하도록 한다.
2.샤넷 페코에게 지금까지의 사실을 전해주고 내가 적정값으로 구매하여 적절한 선에서 되판다.
3.샤넷 페코에게 지금까지의 사실을 전해주고 적정값에 사서 시간과 돈을 좀 더 들여 전문가에게 보여주고 직접
소견을 들은 후 좀 더 합당한 가격에 되판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므로 소중한 단골 의뢰주에게는 순수하게 내가 알아낸 것들을 털어놓을 의무가 있다. 그리고
1번의 경우 나는 지금의 잠깐 살펴본 것만으로 소정의 사레금을 얻을 수 있다. 짧은 노동에 비해 큰 이윤인 셈.
2번도 좋지만 사실 언제 팔릴지 알 수 없고 내가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되팔기전까지는 꽤 부담이 간다. 3번은...
뭐. 시간,노동,돈 전부를 들여 더 큰 보상을 획득할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변방이 아니라 대도시만 가
도 서적을 취급하는 곳은 많을테니 못해도 손해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귀찮아서 문제지...
테이블에 다시 널부러져 고민한다. 어쩐다? 이 골동품은 어디까지 가치가 있지?
애당초 최근 일이 너무 없었고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뭔가 할 돈은 있는가?
더러운 집, 빗소리,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수많은 청구서들.
나는 결심했고, 그리고 곧 그대로 골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