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바람만이 갈대숲을 물결처럼 흔들어대는 넓은 벌판의 여기저기엔 커다란 화강암들이 오랜세월 대지에 뿌리를 박아 자리잡고 있었다.
달빛은 흐느끼듯 조금씩 어둠을 일그러뜨리고 이따금씩 들리던 기분나쁜 풀벌레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한층 더해진 적막속으로 서서히 긴장감이 쌓여지는 가운데...
유난히 그림자가 까맣게 드리워진 바위밑의 어두운 곳엔 두 그림자가 이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 형... 정말 여기로 올까...? "
그림자 하나가 한숨을 쉬며 옆에 있는 다른 그림자에게 말하는 듯 움직이고 있다.
" 쉿...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자리를 옮기자. "
" 벌써 한시간이 넘어가는것 같은데... 배도 고프고... "
" 저번에도 참을성 없는 너 때문에 자리 옮기며 돌아다니다 낭패본거 기억 안나? "
" 그렇지만... "
"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함정까지 설치해 놨는데, 이젠 회수도 못해. "
둘의 속삭임이 오가는 가운데, 달빛이 서서히 구름속에서 나오며 들판을 내리비추고 있었다.
" 형, 아무래도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야 하나. 달빛 때문에 우리가 먼저 들통이 날거 같은데... "
" 아직은 안돼. 만약 저 쪽으로 이동하다가 놈이 발견하면 지금까지 기다린거 헛수고야. "
" 달빛 때문에 여긴 제대로 숨을곳도 없잖아. "
" 하늘에서 보면 아무리 숨어서 지나가도 우리가 놈에게 먼저 들킨단 말야. "
달빛에 비춰진 그들의 모습은 어설픈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어른 혼자 몫을 할 수가 없어서 둘이 함께 다니며 의뢰를 받고 보상금을 받는 형제 사냥꾼 이었다. 어려보이는 두 얼굴엔 어둠 때문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모를 그림자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제법 사냥꾼다워 보이는 그들은 카츠와 테오 형제였다.
그 중에 형으로 보이는 카츠가 다시 동생과 작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 알겠지? 일단 놈이 함정 근처에 오면 이야기는 쉽겠지만, 만약 멀리 떨어져서 내려올 경우 네가 함정쪽으로 유인 하는거야. "
" 응. 일단 형의 칼로는 놈의 공격을 막기 어려울테니 내가 해볼께. 함정쪽으로 끌어오다 공격 당할땐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 뭐. "
" 그리고 네 무거운 대검보다는 내가 선공격으로 제압하는게 더 빠를거야. 이 기회에 우릴 무시하는 어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자구! "
" 그래. 할아버지에게 칭찬도 받고 말야. "
" 좋아. 알겠지? 아무튼, 이건 만약의 일이다... 놈이 쉽게 함정 근처로 와주면 고맙겠지만 말야. "
" 맡겨만 둬. 형..."
다짐을 하듯 등 뒤의 무거워 보이는 대검 칼자루를 꼬옥 쥐고 동생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카츠가 긴장하며 테오의 어깨를 내렸다.
" 쉬잇~ 오는거 같다. "
바람소리에 섞여 희미하지만 어디선가 훨훨 거리는 날개짓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고, 형제는 몸을 잔뜩 수그린채 소리가 나는 밤하늘 쪽을 지켜보며 있었다.
달빛이 환해진 산등성의 멀리에서 까만 물체 하나가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고 있었고, 머리에는 마치 목도리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듯한 넓은 귀를 쫑긋거리며 날아오는 그 물체는... 비룡 '얀쿡' 이었다.
선회를 하며 땅에 내려오려는 듯, 여기저기를 살펴보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비룡은 달빛이 가장 잘 드는 벌판의 한 곳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안타까운듯 카츠는 주먹을 불끈 쥐며...
" 제길... 쉬운 일은 없군. 하필 저기에... "
" 형. 지금 뛰쳐 나가서 끌고 올까? "
" 안돼. 완전히 내려와 날개를 접을 때까지 기다려. 놀래면 그 자리에서 날아가 버리는 일이 생긴다구. "
비룡이 땅에 가까이 내려오자 엄청난 날개짓에 의해 사방의 갈대숲이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 다른 사냥꾼들이 얼마나 잡아댔는지, 이제 작은놈은 오지도 않는 것 같군. "
" 굉장하다. 날개짓 때문에 갈대 무너지는 것 좀 봐. 근처로 가기엔 어림도 없겠는데? "
" 저거 내려오기도 전에 우리 위치가 먼저 들키겠는걸! "
" 형! 지금 가야되지 않아? "
" 안되겠다! 뛰어! "
동생이 납작하게 숨어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른키보다 훨씬 커보이는 대검을 등에 짊어진 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는 동생 테오를 보며 카츠는 자신의 쌍검을 빼내어 들고 준비를 하려던 차에...
' 이것만으론 어림도 없을래나... 아무래도... '
잠시 생각을 하던 카츠는 꺼내어 들던 쌍검을 다시 칼자루에 집어넣고 가져온 장비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 우워어~~~ "
땅에서 쉬려던 비룡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테오를 처음에는 의아하게 보는듯 했으나 이내 적인걸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란 듯 날개짓을 퍼덕이며 잠시 뒤로 물러나 있었다. 계속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테오.
뒤로 밀려나는 얀쿡을 향해 돌진하는 테오는 도발을 위한 일격을 위해 대검자루에 손을 가져가고...
얀쿡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슈우우웅......... 콰악!
이내 무거운 바람소리를 가르던 테오의 대검 발도일격이 정확하게 얀쿡의 머리에 작렬 했다.
' 크으아아...... '
대검의 무게에 의해 머리가 꺽여진 얀쿡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잠시 비틀 거렸지만, 그 정도에 쓰러질 비룡이 아니었다.
얀쿡은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들고 사방에 소리를 치기 시작했고 무거운 대검을 다시 추스려 등에 걸친 테오는 그 상황에 바로 뒷걸음을 치며 함정으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미 입에 불꽃을 머금으며 화가 잔뜩 난듯 발을 동동 구르며 펄쩍이던 얀쿡은 고개를 돌려 죽일 듯한 기세로 도망치는 테오를 쫓기 시작했다.
크우어어..... 쿵, 쿵, 쿵, 쿵...
무서운 비명을 질러대며 쫓아오는 얀쿡이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도망치는 테오의 걸음걸이는 점점 늦춰져 가고 있었다.
" 헉... 헉... 제길. 이 칼 생각보다 무거운데? 뭐가 가벼운 뼈로 만든 소재야! 대장장이 녀석, 두고 보자...! "
함정으로 얀쿡을 유인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던 테오는 대검의 무게가 장난이 아님을 실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칼이 너무 크고 길기 때문에 조금만 흐트러져도 뒷발이 대검에 걸릴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 테오! 더 빨리 뛰어. "
함정 앞에서 기다리던 카츠가 테오에게 소리치며 구부리고 앉아서 뭔가를 부지런히 설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커다란 (주.1)대형 폭탄이었다.
" 헉... 헉... 형! 나까지 잡을 셈이야? "
" 잔말말고 함정 앞에서 바로 옆으로 빠져! "
" 그런 건... 헉... 헉... 진작 설치해 뒀어야지! "
" 진짜로 여기에 올줄은 몰랐다! 테오! 따라 잡힌다! 더 빨리 뛰라구!!! "
아무리 빨리 뛰어도 화가 잔뜩 난체 쫓아오는 5미터가 넘는 괴물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커다란 대검을 등에 매단체 달린다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신참에겐 무리였던 것이다.
점점 비룡과의 거리가 좁혀지며, 이제 비룡의 커다란 턱이 테오의 등뒤를 후려칠 듯 다가올 찰나!
"제길!!! "
순간적인 판단으로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대검을 뽑아든 테오는 그 상태로 자세도 추스리지 못한체 비룡의 돌진공격을 받아냈다!
콰광~~~
얀쿡의 거대한 몸집과 대검의 방어가 충돌하는 소리에 귀가 멍멍해지고 팔의 힘이 풀어졌다.
공격은 제대로 막은것 같지만, 워낙 커다란 몸집을 한방에 받아내기엔 무리였던지 테오는 대검과 함께 벌판위에 곤두박질을 치며 구르고, 테오의 방어를 튕기며 무시한체 계속 돌진하던 비룡 얀쿡은 결국 폭탄과 함께 설치된 함정에 그대로 빠져 버렸다.
' 크워어어~~~ '
하반신 전체가 함정의 그물에 묶여 빠져나오지 못하자 허우적대며 괴성을 지르는 비룡 얀쿡.
일단 함정에 빠져 묶인 걸 확인한 카츠는 소리쳤다.
" 테오! 괜찮냐? "
" 제길... 머리가 울리네. 난 괜찮아, 형! 빨리 그놈 좀 어떻게 해! 곧 빠져 나온다구! "
" 일단 크게 한방 날려보자. 거기에 그대로 엎드려 있어! "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얀쿡은 괴성을 지르며 빠져나오기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었다.
얀쿡의 머리 옆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폭탄쪽으로 뛰어들어가는 카츠. 심지에 불을 붙인 작은 폭탄을 능숙한 솜씨로 설치한 후 그 자리에서 잽싸게 빠져나오며 테오쪽으로 뛰어갔다.
치이이익...
" 테오! 고개 숙여! "
구석에 엎드린 체 카츠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테오는 더 낮은 자세로 수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테오가 있는 곳까지 뛰어온 카츠도 앞으로 점프하듯 납작 엎드렸다.
콰광........................ 크워어어............................
적막했던 밤하늘에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불길에 휩쌓인 얀쿡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엔 거대 폭발로 인해 흙더미가 떨어지고 있었으며 주위의 갈대밭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쉽사리 함정 근처로 접근을 할 수가 없었으나, 화염속에서는 아직도 비룡이 살아서 빠져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울부짖어대고 있었다.
" 제길... 역시 끈질긴 놈이다. 준비해 둬! "
" 응! 알았어, 형! "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 댄체 카츠와 테오는 불길이 조금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며 얀쿡을 향해 돌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갈대밭의 불길도 바람을 타고 점점 저쪽으로 멀어지자 틈이 보였다.
" 지금이다! 가자! "
카츠와 테오는 비룡이 허우적대고 있는 불길속으로 뛰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이야압!!! 간다! "
" 받아라!!! "
테오의 대검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얀쿡의 날개를 끊기 위해 그대로 내려치며 있었고, 입에서 불을 뿜으며 허둥대는 비룡의 머리위엔 카츠의 쌍검이 달빛을 가르며 난무를 하고 있었다.
위잉.... 콰악~! 우웅....... 파칵~! ... 슈웅~ 쉭~!
대검과 쌍검의 공격에 그대로 당할 수 밖에 없던 얀쿡의 주위에는 떨어져 나간 살점과 핏덩이들이 튀어나가고 쉴새도 없이 쏟아지는 카츠와 테오의 공격을 받으며 얀쿡은 빠져나가기 위해 끝까지 날개짓을 하며 발악을 하고 있었다.
" 더 빨리 쳐! 그물은 상하지 않게 머리와 몸통부분만 정확히 가격해라! "
" 알았어 형! 대검이 생각만큼 쉬운게 아니라구!"
얼굴과 갑옷 전체가 온통 피범벅이로 얼룩이 졌지만, 함정에서 날개짓을 하고 있는 비룡을 처리하기 위해 카츠와 테오는 쉬지도 않고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바람 때문에 불길에 너무 오래둔 탓인지 비룡을 묶어 두었던 그물고리가 하나둘씩 끊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함정도 오래가지 못한 체 얀쿡은 함정에서 빠져나와 힘차게 하늘로 치솟았다.
" 도망간다! 테오, 빨리 (주.2)페인트볼이라도 던져! "
" 으응...? 헉... 헉..."
무거운 대검을 쉬지도 않고 계속 휘두른 탓인지 테오는 힘겨워 하며 대검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 안돼! "
동생의 대검을 알아차린 카츠는 얼른 칼을 집어넣고 도망가는 얀쿡의 위치를 쫓기위해 페인트볼을 찾아 하늘 높이 던졌지만, 사경에 쫓겨 혼신의 힘을 다해 날아가는 비룡을 맞출 수 없었다.
얀쿡은 이미 산등성이를 넘어 멀리 날아가 버리고... 스산한 바람이 물보라를 일으키듯 흔들어대는 갈대밭에 카츠와 테오는 그저 멍하니 숨을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던 두 형제... 바람이 몇번이나 바뀌어 달이 산등성이를 넘어갈 무렵, 카츠가 먼저 입을 떼기 시작했다.
" 돌아가자..."
" ................. "
" 테오... 마을로 돌아가자구. 배고프다... "
" ... 으응... 훌쩍..."
뭔가 분을 삭이지 못한 듯 테오는 한참을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저놈은 지는 걸 싫어했지... 카츠는 테오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지... "
" ... 훌쩍... 으응... "
" 그만 울어. 나중에 또 잡으러 오면 되잖아. 이젠 시간도 없어서 쫓아가도 힘들어. "
" 알았어. 형... 훌쩍... "
동생을 다독거리며 말없이 무기와 장비를 챙겨든 카츠, 테오의 떨어진 장비도 함께 주워든다.
몇 마디 더 위로를 하려다 그냥 돌아서서 먼저 걷기 시작한다...
갈대밭을 벗어날 무렵 뒤에서 동생도 따라오는지 갑옷의 철컥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 카츠형... 가면서 (주.3)약초나 몇뿌리 뽑아 갈까...? "
" 필요없어. 할아버지도 이제 그런거 캐오지 마시래잖아. 우리는 제대로 만들지도 못해 소용 없다고... "
" 그래도 저번에 날로 먹었는데, 조금 쓰기는 해도 효과가 있는거 같던데... "
" 할아버지한테 야단 맞을걸...? 쓸데없이 거추장스러운 건 만들지 말고 확실한거나 챙기라고... "
" 그래도... "
" 차라리 매일 배고픈 니가 먹을 고기나 더 챙겨두는건 어때? "
" 혀엉.......! "
" 하하하... 미안 미안. "
가벼운 농담을 하며 즐겁게 걷는 듯 했지만,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한참을 걸었나 싶었는데, 어느새 마을 앞까지 와버린 카츠와 테오...
" 후우웁.......... "
카츠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이제부터는 사냥감을 놓친것에 대한 잔소리를 동생몫까지 대신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미안해.... 형..."
" 다 아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
먼저 당당히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형 카츠를 보며 테오는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항상 사냥감이 혹시나 도망갈 때 추적표식을 하는 것은 자기 몫이었는데... 자신의 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맡은 일을 다하지 못해 실패한 책임을 형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은 그렇게 미안해 할때면 오히려 화를 내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 형... 미안해... 나중엔 더 잘할게...'
좀 더 능숙한 사냥꾼이 되고자 대검을 만지작 거리며 다짐하는 테오의 머리위엔 어느덧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