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분류학이라는 것이 처음 카를 린네에 의해 제안되었을 당시, 분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생물의 특징이었습니다.
뭐 사실 그것 말고는 없었지만요.
그래서 학자들이 새로 생명체를 발견하면 그 외관상 특징을 바탕으로 무슨 속에 속하는 생명체인지 분류해왔었죠.
그런데, 학자마다 특정한 부분에 페티쉬 비스무리한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화분덩어리의 갯수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이라던지, 열매의 형태가 가장 중요하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남미에 자생하는 난초인 카틀레야와 그 근연속 -- 라일리아(랠리아)아족(subtribe Laeliinae) -- 에 속하는 난초들이 바로 이러한 기준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는 식물들입니다.
카틀레야를 처음 명명한 사람은 19세기 영국의 가장 권위있는 식물학자였던 존 린들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식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꽃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수술의 형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카틀레야의 모식종인 카틀레야 라비아타가 발견되고 나서 탐험가들에 의해 근연종들이 하나 둘씩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멕시코에서 지금까지 카틀레야와는 조금 생긴게 다른 식물이 발견됩니다.
달걀형 내지는 원뿔형의 통통한 벌브, 그리고 긴 꽃대가 특징인 식물이었습니다.
이 식물은 새로운 속인 라일리아속의 모식종으로, 라일리아 스페키오사(Laelia speciosa)라고 명명되었습니다.
한편 존 린들리도 이 식물의 샘플을 접해 보고는 한가지 특이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꽃가루 주머니가 8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브라질에서 발견된 카틀레야 근연종들 중에, 꽃가루 주머니가 8개가 달린 것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 린들리는
이들 모두를 다 라일리아라고 개명시켜버립니다.
그가 가장 식물에게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수술의 형상을 토대로 재분류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 후로도 이러한 미세한 겉보기 상의 차이점을 바탕으로 소프로니티스라는 속이 새롭게 만들어지게 됩니다.그러다가 이제 21세기가 도래했습니다.
유전자 분석과 이를 통한 분자유전학적 진화 계통 분석이 기존의 분류학을 대체하였고,
이윽고 계통학(phylogeny)이라는 학문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어떠한 경로로, 어떠한 공통 조상을 통해서 생명체가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역추적하는게 목적인 학문으로 다시 태어난 겁니다.
그리고 계통학적 분석을 통해 기존의 종들의 분류를 다시 쓰기 시작했죠.
겉모습만 보면 수렴진화라는 놈에게 속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일리아속의 식물을 대상으로 식물 생존에 필수적인 유전자 몇가지를 분석해 봤더니,
멕시코 라일리아와 브라질 라일리아가 전혀 다른 식물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오히려 비교 대상으로 포함시켰던 대조군 중의 소프로니티스속과 공통 조상을 가지는 결과가 나와버렸지요.
그래서 브라질리안 라일리아는 먼저 소프로니티스로 일괄 개명됩니다.
멕시칸 라일리아는 그냥 그대로 라일리아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자료가 더욱 쌓여서, 이제는 라일리아 아족(Laeliinae) 전체를 대상으로 계통 분석을 시도했더니,
소프로니티스속 전체가 카틀레야속과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한 단계통군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라일리아 푸르푸라타, 로바타, 프라이스탄스, 푸밀라, 루카시아나 등은 이제는 다 카틀레야에 포함됩니다.
종소명이 겹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 경우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결되었고, 한가지 예로
라일리아 다야나(Laelia dayana)는 이젠 카틀레야 비칼호이(Cattleya bicalhoi)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다.
소프로니티스도 당연히 카틀레야로 취급되기에 지금은 소프로니티스 코키네아가 아니라 카틀레야 코키네아입니다.
물론 멕시칸 라일리아 (안켑스, 스페키오사, 아우툼날리스, 루베스켄스 등)는 카틀레야들과는 다른 조상을 가지기에 여전히 라일리아에 남아있구요.
사실 이와 같은 사태는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는데요;;
먼저 꽃가루 주머니가 8개였다가 4개로 퇴화된 흔적이 남은 카틀레야가 발견되었습니다.
카틀레야 도마니아나(Cattleya dormaniana)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카틀레야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록 랠리아와 비슷한, 꽃대가 길게 나오는 종이 존재하는데,
카틀레야 엘롱가타(Cattleya elongata)는 바위산에서 착생하며 살며, 30cm 이상으로 길게 꽃대가 올라오는 식물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카틀레야처럼 생긴 꽃이 피는건 식물학적으로 다 카틀레야라고 봐도 좋습니다. :-)
문제는 학술적인 발전을 일반인들이 따라가질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꽃집과 일반인들은 랠리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꽃집이나 판매상들이 소위말하는 판매명으로 부르는게 일반적이다보니 학명으로는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특히 다양한 원예종이 나오는 종류일수록 기억에 남는 판매명으로 이름진고 부르기 때뮤에 더한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학술적인 부분을 강조할수도 없는 노릇이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