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상자
그들은 공연을 위해 왔다고 했다. 종이상자 몇 개
를 엎어놓은 듯한 그들의 비행선은 너무도 낡아서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금방, 수거해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도 사실은 알고 있는지 누군가 한 명은
꼭 남아서 비행선을 지킨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
이라는 글자가 박힌 몇몇 부품은 이미 재활용된 듯
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
미 돌아갈 곳도 없었으니까. 초전자행성전문파괴강
력무시더듬광선에 의해 파괴된 자칭 ‘아름다웠던’
그들의 행성. 그들의 음악은, 우주를무한대의육감
으로마구더듬는스페이스락, 이라는 그들의 전우주적
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내 귀에는 그저, 춤추기에 적
당한, 그러나 박자가 좀 어리숙한 댄스음악 같았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더 노력하는 쇼프로 프로듀
서의 말을 들었다며, 그들 중 하나가 눈물을 흘렸다.
몰락한 왕조의 구슬픈 삶처럼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없다는 걸 꺠달았다나, 그들이 뜨겁게 사랑받을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뜨거
운 사랑을 원료로 하는 종이상자가 바람에 흔들거렸
다. 그들은 연습을 위해 밤늦게까지 웅얼거리며 시
체처럼 힘없이 걸어 다닌다. 빨리 비행선이 날 만큼
사랑을 모아 집 마당이나 비워줬으면 좋겠다.
서정학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