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울프 노트’의 잃어버린 페이지
―자신이 흡혈귀라 주장한 어느 수도사의 자술서, 혹은
그는 자꾸만 뒤늦은 현장 감식을 요구했다
[지난해 경칩에 쏟아진 때 아닌 폭설에 노상에서 동사한
것으로 알려진 론 울프 씨(Lonne Wolff, 나이 미상)가 생전
에 수기와 편지 형식으로 기록해놓은 비망록 초고가 지난
12월 23일 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화장실에서 비품
창고를 뒤지던 한 노숙인에게 발견되어 화제다.
동료들 사이에서 ‘순하지만 좀 돈 놈’으로 불리던 노숙인
정 씨(무직, 나이 미상)는 노트를 발견하고 “내가 바로 그 사
람이다!“라고 외치며 갑작스레 발작 증세를 보여, 태평로파
출소 소속 이거지 순경(李巨志, 27)의 도움으로 쉼터로 옮겨
졌으나 직후 실종되었으며, 노트는 생전에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의 필적과 대조한 결과 론 울프 씨 본인의 것으로 확인
되었다.
한때 울프 씨와 사실혼 관계였다던 유 아무개 씨(무직,
36)가 울프 씨로부터 노트의 소유권을 구두로 약속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섰으나 노트 말미에는 절친했던 두 친구의 공동
소유를 명시하고 있어 분쟁이 예상된다.
한편, 경찰은 작년 3월부터 한 달간 마지막 목격 장소인
명동에서 탐문 수사를 펼쳤지만 “눈사람 말고는 아무도 보
지 못했다“는 제설 차량 운전자 구루마 씨(具樓馬, 47)의 진
술 이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확보하지 못한 채 시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수사를 일단락했다. 울프 씨의 지인들은 “태
만한 공권력이 실종 사건을 사망 사건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며 수사 조기 종결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면서도 수사
재개를 요구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발견된 이른바 ‘울프 노트’에 관해 각 종교계에서
는 “울프 씨는 삭막한 현대 생활에 지친 대중이 만들어낸
도시 괴담의 일부일 뿐, 그가 수도사였다는 것은 허위이며“
“노트는 망상에 가득 찬 허구로 전혀 신빙성이 없고” “그는
미치광이인 데다 여러 번 미수에 그친 반사회적인 삼류 테
러리스트로서 언급할 가치도 없다“며 관련성을 적극 부인
했다.
아래는 노트를 임시 소장하고 있는 울프 씨의 친구 스
테판 씨(시인, 36)의 단골 카페 ‘라임 스트리트’(강서구 화곡
6동)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뜯긴 페이지로, 스테판 씨는 노트
의 공동 소유권자인 엘리아스 씨(대학 강사, 36)와 함께 “론
이 감기약과 진통제를 혼합하여 과다 복용하던 당시 극도의
심신 쇠약 상태를 반영하고 있어“ 이 부분의 공개를 여러 차
례 거부한 바 있다.
? Weekly Fang's Korea 정한아 기자 기사 최종 입력 20120131 01:13]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저 숲으로 들어가야 해
거기에서 굴참나무 잎과 너도밤나무 잎이 뭣을 보았
는가
노루오줌과 조는 척하던 멧비둘기가 무엇을 엿들었는가
거기서 분명 뭔가 버둥거리고 있었네
그건 혹시
해 저문 뒤 집 나간 고양이의 행방
180도 고개 돌린 올빼미의 집요한 발톱 자국
그곳에서 들린 단 한 번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했는가 오, 눈부신 혼절
아, 그래, 그건 마녀였네
내 어깨를 깨물길래 나는 동공이 커졌더랬지,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오늘 아침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온몸을 던져 종을 쳤네
새벽 기도와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와 밤 기도
할 수 있는 모든 기도를 다 했어
그런데 어쨰서 내 손톱 밑에는,
거기, 송곳니가 뾰족한 자네, 내게 펜 좀 빌려주겠나?
아, 그래, 나는 죄를 지었어
뭔지 모르지만 분명 죄를 지었네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울컥거리는 숲으로
증거가 사라지기 전에 들어가야 해
그러니까, 그게
아무래도, 그건
우연히 혓바닥을 포획한 여우의 무고한 도주
어쩌다 가슴을 밟고 간 들개의 무연한 산책
풀들이, 풀들이 한 방향으로 누워 있는데
풀들이 왜?
왜? 한 방향으로 누워 있는데
거기 떨어져 있는 두 팔의 주인은 누구인가
여울은 왜 허름한 그림자처럼 울고 있는가
어제의 것인가 만 년 전의 것인가 내일의 환영인가
왜 나를 포박하지 않나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자, 보게!
여기 이 창백한 얼굴과 더러운 손톱
여기 이 헝클어진 머리카락 새에 스며든 붉은 입김과
이슬에 젖은 복숭아뼈에
빗살 무늬로 새겨진 알 수 없는 찰과상
뿐인가!
가끔 내 이빨은 내 입술을 뚫고 나오네, 게다가
저 처음 듣는 낯익은 목소리가 내 고막에 대고 계속 종
을 쳐대길
하나와 둘 사이의 끝없는 진자 운동!
하나와 둘 사이의 끝없는 진자 운동!
더군다나
나는 이렇게
배가 부르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배가 불러
이게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걸세
오, 붉은 만월(滿月)
동그랗게 입술을 벌린
그날의 그늘진 얼굴을
아무도 증언하지 않는다 해도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말해주게 제발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할 건가?
―
이 기자의 다른 관련 기사 보기:
론 울프 씨의 혹한 2011-03-20
나는 왜 당신을 선택했는가: 론 울프 씨의 편지 2011-04-15
토요일 밤 통화 기록의 진실 2012-02-15
금요일에 실종 사건 많은 이유 2012-02-30
“내 친구는 여자였다” 엘리아스 폭로 일파만바 2012-03-11
론 울프, 성자인가 잉여인간인가 2012-04-31
론 울프, 처자직 있었다? 2012-06-31
스테판, 증인 보호 프로그램 요청 “친구가 무서워” 2012-08-13
론 울프와 크루소, 동일 인물 논란 2012-09-31
론 울프가 비판한 지식―사물 애호가란? 2012-11-31
―
정한아
울프 노트, 문학과지성 시인선 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