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업계의 두 거물이 손을 잡았다. 두 회사의 걸작 시리즈를 빼 놓고는 결코 논할 수 없는 일본 시장이기에 이번 합병이 몰고 올 파장은 그만큼 거대하다. 스퀘어와 에닉스의 합병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고 이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 이 글에서 몇 가지 단서와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자.
합병은 왜 발생하는가?
일반적으로 인수·합병이 발생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① 경제가 일반적으로 침체되어 있거나 특정 업계가 구조적인 과잉 공급상태에 있을 때, 인수·합병은 (자의 혹은 타의에 따른) 구조조정의 한 수단이 된다. 80년대 초 신군부를 통한 강제된 산업구조조정, IMF 초기에 김대중 정권이 기획했던 빅딜, 수년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합병 열풍, 그리고 최근 금융·은행업계의 재편이 이에 속한다.
② 또한, 합병은 모종의 수익을 취할 여지가 있을 때 발생한다. 이는 동종 업계 기업들 사이에서(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종 업계 기업들이 (\'범위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뭉치기도 있다. 타임워너와 AOL의 합병은 경기침체나 구조적인 공급과잉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장점을 취합하여 더 넓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추진되었다(하지만, 현재 둘의 합병은 실패로 판가름났으며, 현재는 사실상 기업 분리가 진행중이다. 이 부분은 조금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③ 시세차액 등 주식시장에서의 이득을 노리고 이루어지는 인수·합병도 존재한다. 주로 기업사냥꾼들에 의해 성사되는 이러한 거래는 대부분 기저의 실질적인 합병요인을 갖지 않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거나 후에 큰 후유증을 낳기도 한다.
스퀘어-에닉스, 합병의 동인(動因)
크게 보면, 스퀘어와 에닉스의 합병 결정은 첫 번째 경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일본 게임업계는 두 가지 상황이 맞물린 구조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다.
①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일본의 장기불황이 하나의 원인이다. 게임과 같은 레저분야의 소비성향은 경기의 변동 및 앞으로의 경기 전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비관적인 상황이 계속되는 한 경기상황의 호전(및 호전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게임관련 소비의 증가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② 일본 게임업계는 일종의 포화상태에 도달해 있다. 이는 북미시장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북미가 연평균 10%에 가까운 급성장을 이루면서 게임 인구가 청년층으로 맹렬하게 팽창하고 있는 젊은 시장이라면, 이미 패미컴과 플레이스테이션 시대라는 전성기를 거치면서 일본 게임시장은 더 이상 소비층을 확대시켜나가기 힘든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이는 곧 기존 형태의 게임시장에서 생존경쟁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뜻이다. 이때, 합병은 위험 부담을 나누면서 더욱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물론, 구조적인 불황에 대한 대응책이라는 큰 틀이지만 합병에 따른 이득의 요소도 일부 존재한다.
① 결국, 일본시장이 포화상태라면 다른 시장들을 찾아 나서는 수밖에는 없다. 일본 게임업계 전반이 불황이지만, 북미와 유럽에서 탄탄한 수익구조를 갖춘 닌텐도와 코나미는 여전히 좋은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제작사들의 생존 및 성장성 역시 내수보다는 일본 외 지역으로의 수출에 달려있다. 양 사의 합병은 이러한 확대에 필요한 충분한 개발자원을 얻는데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북미에서도 크게 성공을 거둔 시리즈들([파이널 판타지], [킹덤 하츠] 등)을 보유한 스퀘어의 개발력은 더욱 단단해질 것으로 보인다.
② 두 회사 모두 공을 들이고 있는 온라인 분야로 진출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덜 수 있다. [파이날 판타지 11]을 출범시킨 스퀘어나 PC쪽에서 [크로스 게이트]를 비롯해 여러 온라인게임은 선보인 바 있는 에닉스 모두 새로운 게임업계의 돌파구로 온라인을 점찍고 있다. 온라인게임은 전기나 통신사업과 유사하게 \'규모의 경제\'라는 특성을 갖는다. 즉, 서비스 개시를 위한 초기 설비를 마련하는 데 따르는 비용은 막대하지만, 덩치가 커질수록 그만큼 비용은 빠른 속도로 줄게 된다. 초기비용이 막대한 대신, 추가적인 서비스 제공에 따른 한계비용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이다. 두 회사가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게 되면, 이러한 온라인 분야의 사업추진에 따른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즉, 두 회사가 각각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합병과정의 난관
합병은 법적으로 당사자들이 도장만 찍는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합병 후유증과 이로 인해 기업이 크게 약화된 사례들을 돌아본다면, 합병은 보다 세밀한 검토와 신중함을 요하는 미묘한 과정이다. 다임러-크라이슬러 합병의 경우 독일의 다임러와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지닌 기업문화의 차이 때문에 수년에 걸쳐 상당한 불협화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기업 내부의 의사소통 과정 또한 기업에 따라 특화된 경우가 많다. 이렇듯, 통합에 필요한 요소들이 빠르게 조율되지 못한다면, 그만큼 합병의 목적이 실현되기는 어렵다.
스퀘어와 에닉스의 합병은 이러한 기업문화 혹은 의사소통 체계라는 문제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밖에서 볼 때 두 회사 모두는 전형적인 일본의 개발풍토를 따르고 있다. 또한 회사의 주축을 이루는 게임 장르 또한 RPG이기 때문에 개발과정과 정보공유의 체계 역시 다른 장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유사할 것이다. 물론, 두 회사의 게임 개발과정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쉽게 단정해 버릴 수는 없다. 다만, 스퀘어와 에닉스의 합병은 여타의 사례(동종 업계지만 국적이 다른 경우, 혹은 이종 업계 간의 결합)에 비해서는 훨씬 매끄러울 것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 합병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보통 거대주주들이다. 컴팩과 휴렛패커드의 합병과정에서도 HP의 대주주들(특히 창업주인 월터 휴렛)이 피오리나 HP 회장과 양보없는 대결을 펼치는 통에 아슬아슬하게 주주총회의 승인을 얻었던 바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주주가 이사회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들이 비교적 취약하기 때문에 주주들의 조직적인 반발로 인해 합병 과정이 무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주총을 통해 여러 가지 불만이 제기되고 실적이 부진할 경우 경영진이 큰 곤란을 겪기도 하지만, 일본 기업에서 경영진이 교체되는 것과 같은 제도적인 위력이 발휘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탈(脫)-소니?
세계시장으로의 확대는 위험의 분산이기도 하다. 즉, 일본시장에 특화된 두 기업이 합병을 통해 더욱 다양한 수익원의 창출하고자 시도한다는 뜻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세 기종이 겨루고 있는 지금의 게임기 시장의 구도에서 위험 분산의 또 다른 키워드는 멀티 플랫폼이다. 물론, 일본에서 가장 확실하고 거대한 수익원을 가진 두 회사이기에 기존의 히트작 RPG 게임들([파이날 판타지]? [드래곤 퀘스트]?)이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더욱 풍부해진 개발자원을 통해 시차를 둔 다기종으로의 투입(코나미), 플랫폼에 특화된 게임의 다각화(캡콤)와 같은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가능성은 통합회사의 지분구조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상호 주식소유분 및 증자라는 이후의 잠재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두 회사가 주식을 1:0.81(에닉스:스퀘어)의 비율로 합친다고 보면, 스퀘어에 대한 SCE의 지분 18.8%는 통합 에닉스-스퀘어에서 8%로 추락한다. 이는 통합회사에 대한 SCE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뜻이다. 물론, PS2는 현재 시장의 압도적인 주류이기 때문에 소니를 배제한 전략의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통합회사의 개발자원이 멀티 플랫폼을 추구하기에 충분한 규모인 이상, SCE로서는 "PS2 exclusive" 딱지가 붙은 게임을 강제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다른 말로 풀자면, 이번 합병의 수혜자가 의외로 닌텐도나 MS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밋빛 미래?
보통 합병이 발표된 직후, 시장의 반응을 보면 투자자들이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주가의 추이는 합병에 따른 두 회사의 득실을 판단하는 하나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현재 두 회사의 주가는 모두 급등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번 합병은 영화 실패 이후 확고한 재도약의 계기를 노리던 스퀘어의 의지와 [드래곤 퀘스트]에 과중하게 치우쳐 있는 에닉스의 상대적인 불안감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킨 결과이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합병 과정에 심각한 장애물이 없어 보이는 가운데 세계시장 개척과 온라인 진출이라는 향후의 숙제들을 푸는 데에도 합병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드리운 먹구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① 두 회사의 합병절차가 외부에서 짐작하는 것만큼 간단할까? 기업의 결합이라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에서 이에 필요한 절차나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와 경험은 크게 부족하다. 비슷한 문화에 속해 있고 비슷한 장르의 게임을 제작하고 있는 두 회사이지만, 그 통합이 실제로 순탄할 것인지는 일 벌어지고 난 이후에나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듯 하다.
② 두 회사가 향후의 전략 목표로 삼고 있는 온라인 게임의 경우 아직까지 그 수익모델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다. 브로드밴드 보급률의 성장이 지지부진한 일본과 북미 모두에서 그 전망은 더욱 확실치 않다. 온라인 게임 시장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시장이 놀랍도록 비대한 한국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온라인의 수익모델을 구축하고 있는 회사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물론, 각자 확실한 돈줄을 쥔 제작사들의 결합이기에 당분간의 시행착오를 겪을만한 여유 기간은 충분히 확보될 것이다. 다만, 이 모색기가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다면, 합병 회사의 미래 역시 순탄하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