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를 넘어 멋지게 부활한, 모바일 ‘랑그릿사’
언제나 무협 아니면 중세 판타지, 오색찬란 갑옷과 주렁주렁한 날개, 클릭 한 번으로 의뢰 수주부터 괴물 사냥까지 알아서 도는 자동 플레이, VIP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배금주의 수익구조…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산 모바일 게임’하면 떠오르는 인상이란 대체로 이랬다. 일부 게임만 가지고 한 나라의 산업 전체를 싸잡아 폄훼해서는 안되겠으나, 그만큼 우리 세대에게 ‘중국산 = 싸구려, 모조품’이란 인식은 상당히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기자가 몇 년 전에 중국 게임사가 ‘랑그릿사’ 모바일 게임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했다면 곧장 머리가 지끈거렸을 거란 얘기다. ‘파이어 엠블렘’과 함께 일본 SRPG 계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자, 우루시하라 사토시의 미려한 일러스트로 더욱 잘 알려진 ‘랑그릿사’ 시리즈. 개발사인 메사이어의 페가수스 로고만 봐도 가슴이 뛰게 만들었던 그 IP를, 그 소중한 추억을 엄한 곳에서 망쳐버린 것은 아닐까 적잖이 우려했으리라.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랑그릿사'를 만든다면 크게 우려했겠지만…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간 게임 산업의 지형이 참 많이도 변했다. 여전히 저작권을 무시하거나 품질이 떨어지는 중국산 게임도 없진 않지만, 그 중 탁월한 몇몇은 세계를 상대로 선전을 펼치기도 한다. 텐센트, 넷이즈, 창유 출신 베테랑이 의기투합한 즈룽게임(대표 왕이) 신작 SRPG ‘랑그릿사(원제 몽환모의전)’ 역시 지난해 8월 중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래, 최근 북미까지 진출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원작의 열혈 팬을 자처하면서도 중국어 울렁증으로 손가락만 빨아야 했던 기자가 드디어 모바일 ‘랑그릿사’를 내려 받았다.
지난 1월 22일 북미 앱스토어에 출시된 덕분에 영어로 즐길 수 있다.
SRPG로도, 모바일 게임으로도 속이 꽉 찬 체험
현재 모바일로 SRPG를 즐기고픈 유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과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 정도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내정의 비중이 지나치게 큰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이나 전장이라는 전략 요소를 현저히 축소시킨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와 달리 ‘랑그릿사’는 정통적인 SRPG의 면모를 가장 짙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우선 보병, 기병, 창병, 궁병, 비병, 승병, 마술사, 암살자, 마물까지 다양한 병종과 서로 물고 물리는 상성이 존재하며 전투 도중에 이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각 캐릭터가 지닌 개성적인 액티브/패시브 스킬과 병사 시스템 덕분에 ‘언제 어디로 움직이고 누굴 요격할지’ 같은 SRPG의 근간이 되는 전략이 제대로 작동한다. 병사 시스템이란 원작의 용병 시스템을 계승한 것인데, 캐릭터에게 복속된 일군의 무리가 전투를 보조하고 공격을 받으면 우선적으로 쓸러 나가기도 한다. 병사는 캐릭터와 별도로 강화하거나 병종을 바꿀 수도 있고, 무엇보다 피해를 입으면 전투력이 감소한다는 전략적인 변수를 더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다양한 병종과 그에 따른 상성 관계를 직관적으로 보고 응용할 수 있다.
개성적인 스킬들. 따로 소모 자원 없이 쿨다운 방식으로 밸런스를 맞췄다.
병사들 덕분에 액션이 규모감 있고 호쾌할 뿐 아니라, 전략성도 한층 깊어졌다.
전장 또한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와 달리 좌우 수십여 칸으로 충분한 크기를 갖췄다. 물론 진짜 PC, 콘솔 SRPG에 비하면 약간 작은 편으로, 너무 답답하지 않으면서도 모바일 화면으로 소화 가능한 적정선을 잘 찾았다. 처음 보면 약간 부담스러운 대두 덕분에 캐릭터 식별도 아주 잘 되고 고전 감성이 담긴 배경 묘사도 훌륭하다. 전장 구석 즈음에 숨어있는 보물상자도 소소한 재미 요소. 다만 플레이를 어느정도 하다 보면 전장 돌려쓰기가 조금 심하다고 느껴질 수는 있다. 아까 싸운 길목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온다.
특유의 대두 덕분에 캐릭터가 배경에 묻히지 않고, 서로 구분도 잘 되는 편.
성곽이나 숲 같은 배경을 고전 감성이 묻어나면서도 보기 좋게 잘 표현했다.
다만 조금 더 하다 보면 나왔던 배경을 계속 재활용한다는 걸 알게 된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들이닥친 제국군을 피해 젊은 남녀가 여행길에 오른다는 지극히 ‘랑그릿사’스러운 전개를 보여준다. 여기에 이런 크로스오버 수집형 RPG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공간의 틈새에서 옛 영웅들을 소환한다’는 설정이 버무려졌다. 스토리의 큰 틀이 다소 진부한 것과는 별개로 연출 방식은 칭찬할만한데, 큼직한 일러스트와 함께 대사량도 풍부하고 더빙까지 충실히 되어있다. 오리지널 주인공 삼인방 역시 그저 옛 영웅을 출연시키기 위한 병풍이 아니라 제대로 존재감을 갖췄으며 이야기 진척도 막힘이 없다. 이게 무슨 ‘크로노 트리거’마냥 서사성 깊은 RPG라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유력한 경쟁작(파ㅇ…)이 스토리가 최악 그 이하라 상대적으로 빛이 나는 경우라 하겠다.
오리지널 스토리는 딱 '랑그릿사'스럽다. 어느날 제국이 마각을 드러내고,
어찌저찌 알고 보니 마검 알하자드를 꺾기 위해 전설의 성검 랑그릿사가 필요하며,
그와중에 시공의 틈새에서 소환된 옛 영웅들이 주인공 일행에게 시련을 내리는…
일반적인 모바일 게임 기준에서도 ‘랑그릿사’는 콘텐츠가 충실한 편이다. 상술한 굵직한 줄거리 외에도 월드맵에 무작위 생성되는 서브 퀘스트, 이른바 ‘숙제’라 불리는 소재 던전, 특별한 스토리가 담긴 이벤트 던전, 비동기화 PvP 아레나, 자원 수급을 위한 캐릭터 파견, 원작 캐릭터와의 친밀도 관리, 그리고 길드 시스템까지. 어느 하나 참신하지는 않지만 작금의 모바일 RPG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시스템은 전부 구현되어 있다. 지난해 8월 출시작임을 고려할 때 충분히 칭찬해줄 만한 부분이다.
굳이 '랑그릿사' IP에 기대지 않더라도 모바일 RPG로서 콘텐츠가 수준급이다.
숙제거리도 이만큼 쌓여 있다. 뭔가 이상한 사람이 보이지만 신경 쓰지 말자.
끝으로 ‘랑그릿사’만의 차별화된 요소로 원작 1~3편 내용을 체험할 수 있는 타임 리프트(시공렬봉)를 보자. 기자는 이것이 안 그래도 영 딴판인 일러스트와 저질 연출로 휘청거리는 카도카와 게임스 ‘랑그릿사 I&II’ 리메이크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접해보니 두 작품의 방향성이 꽤나 달랐다. 모바일 ‘랑그릿사’의 타임 리프트는 어디까지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원작의 맛만 살짝 보여주는 용도로, 단순히 구현의 충실도 면에서는 다소 떨어지기 때문. 실제 스토리와 별개로 유저가 소유한 캐릭터만 쓸 수 있으며 일부 NPC는 삭제 혹은 통폐합되기도 했다. 당연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좋은 콘텐츠지만 ‘완벽한 원작 구현’을 기대했다면 약간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랑그릿사' 1~3편이 모바일로! 메인 스토리 진행에 따라 해금할 수 있다.
일단 전투 직전까지는 스토리상 등장인물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만,
실제 전투는 이런 식으로 본인이 소유한 캐릭터들로 치르게 된다.
랑그릿사 원작을 모른다고 주저할 필요는 없다
‘랑그릿사’ 원작이 워낙 오래된 게임이다 보니 1020 유저 입장에서는 원작의 향수는커녕 묘한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바일 ‘랑그릿사’는 오리지널 주인공 삼인방의 모험담이 중심이 되고, 순수한 SRPG로서의 재미가 매우 크기 때문에 원작 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빠져들만하다. 물론 원작을 알면 캐릭터 수집에 목적성이 생기고 이런저런 즐거움도 배가 되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오히려 원작 캐릭터가 메인 스토리에 거의 개입하지 않고 크로스오버 상호작용 같은 것도 없는지라 팬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추억의 향유를 아예 별도 콘텐츠로 빼고 메인 스토리는 오리지널 위주로 구성한 것은 신규 유저 유입에 긍정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오리지널 주인공 일행의 모험담이 주가 되므로 원작을 몰라도 상관 없다.
메인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 외에 무작위 퀘스트도 있어 RPG하는 기분이 난다.
그저 원작 팬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 아저씨 캐릭터가 많은가’에 대한 내적 갈등만 넘어서면 된다. ‘랑그릿사’는 90년대 초 일본에서 발매된 판타지 군담물이다. 당연히 남자, 그것도 중후한 아저씨가 많이 나온다. 우루시하라 사토시가 그려낸 미청년과 미소녀도 있긴 하지만 전체 비율로 보면 희소한 편이다. 기자는 최근 코레류 모바일 게임을 많이 한데다 얼마 전 ‘섬란카구라 시노마스’까지 리뷰했기에, 가챠에서 아저씨가 잔뜩 나왔을 때 완전히 망한 줄 알았다. 그런데 실은 SSR 베른하르트 폐하와 사천왕인 SR 발가스를 함께 뽑은 환상적인 순간이었다. 요즘은 보기 드문 매력적인 중년이 많다는 것이 ‘랑그릿사’의 장점이기도 하니 진득하게 즐겨보라.
아아, 이것은 '랑그릿사'라는 것이다. 아저씨가 잔뜩 나오는 판타지 군담물이지.
아저씨라고 망한 가챠가 아니다. SSR 베른하르트 황제 폐하를 영접하는 순간.
참고로 북미 기준으로 뽑기 1회권은 크리스탈 88개로 구매할 수 있으며 10연차시 무조건 SR이 하나는 나온다. 크리스탈 30개가 0.99달러(한화 약 1,106원)이므로 10연차를 위해서는 대략 3만 2,500원 정도가 드는 셈. 다만 기자가 플레이 중인 북미 서버의 경우 뽑기 권을 자주 뿌리는 편이라 무과금으로 사흘간 SSR 2명, SR 5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나올 때까지 뽑으면 확정 가챠다. 물론 통장의 잔고는 유한함을 잊지 말자.
레벨 디자인에 있어서는 과금 유도로 욕을 먹는 모 RPG처럼 고랭크 없이는 초반부터 진행이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메인 스토리든 타임 리프트든 힘겨워지기는 한다. 캐릭터뿐 아니라 병종, 장비 강화도 빼먹지 말고 충실히 해주자. 앞서 할 게 많은 게임이라고 칭찬했지만 그만큼 상위권에 오르려면 챙겨야 할 거리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며, 가끔은 돈으로 해결하고픈 부분도 적잖은 편이다. 향후 모바일 ‘랑그릿사’의 이런 면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일단 기본적으로 고랭크 캐릭터 위주로 성장시키고,
고랭크 무기도 따로 구해서 강화해줘야 하며,
그 외에 잡다한 신경쓸 거리가 있다. 향후에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할지도.
종합하자면 모바일 ‘랑그릿사’는 원작 팬은 물론 SRPG를 즐겨하는 모든 이에게 강력히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다만 매 전투가 몇 턴씩 이어지는 만큼 틈틈이 즐기기가 살짝 힘들고, 다른 앱을 실행하면 쉬이 접속이 종료되는 안정성 문제가 있다. 좋은 게임성과 별개로 서비스가 장기화되며 진입장벽이 두터워질 여지도 다소 보인다. 과연 본토에서도 실패한 ‘랑그릿사’의 부활이 중국 모바일 게임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일본 익스트림으로부터 정식 라이선스를 받아 중국 즈룽게임에서 개발한 ‘랑그릿사’는 오는 봄, X.D.글로벌을 통해 정식 한국어화 서비스될 예정이다.
김영훈 기자 grazzy@ruliweb.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