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이 시려운 날이었다.
"현수야. 니가 돌 차례다. 일어나. 얼른."
동료가 몸을 흔들며 깨우는 소리에 현수는 눈을 떴다.
사실 녀석이 깨우기 전에 이미 뚜벅거리며 다가오는 발 소리에 잠은 반쯤 달아난 상태였다.
"아아... 내차례인가..."
"아직 잠이 덜깬거냐?"
"그럴리가 있나."
온기가 남아있는 모포에서 몸을 빼낸 현수는 허리를 휘휘 돌리며 몸을 풀었다.
동료는 잠이 덜깬거냐고 물었지만, 말도안되는 소리다. 깊은 잠을 잘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난방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이들은 한장 모포에 의지해 12월의 혹한을 견뎌내고 있었다.
동료는 현수에게 완장과 손전등을 건네주곤 현수가 빠져나왔던 모포의 온기가 식기전에 들어가려는듯 재빨리 자리에 누워버렸다.
"교무실 가서 형사 아저씨한테 무기 받고 보급품 받고 잘 돌다와라."
"응."
"그리고 조심해라 오늘따라 그새끼들 더 미쳐 날뛰더라."
"하루이틀 해보냐. 걱정끄고 잠이나 주무셔."
잔소리를 늘어놓는 동료의 이마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려주고 현수는 교실을 나섰다.
창문을 다 닫았지만 한겨울의 학교 복도는 밖에서 바람이 새어들어와 몸을 오싹오싹하게 만들었다.
'4시 30분이군....'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현수는 조명하나 없는 컴컴한 복도를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2층 정도를 연달아 내려가 도착한 1층엔 유일하게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는 동료가 말한 교무실이 있었다.
현수가 교무실에 들어가자 안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초롱처럼 초를 검은 천으로 덮어 최대한 불빛이 빠져나가지 않게 만든 교무실에는 며칠째 면도를 안한 듯 수염이 덮수룩하게 난 40대 중년의 남자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열심히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오대식. 이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자 전직 형사였다.
그 옆에 서있던 현수 또래의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 정현이 현수를 알아보고 오대식에게 말을 걸었다.
"대장. 현수왔습니다."
"어... 교대하러 왔냐?"
"네. 영진이는 자러가고 제가 왔습니다."
오대식은 한숨을 푹쉬곤 현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정현이는 가서 무기랑 보급품 가져와. 윤현수 너는 여기 와서 이거봐라."
대식이 보여준 것은 수원시 지도였다.
"오늘 할일은 알고 있겠지?"
"알죠.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니고..."
내키지 않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하는 현수였지만 대식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거 말고 오늘 해야할게 하나 더있다."
"........... 다른 일이요?"
"이제 좀있으면 본격적으로 추워지니까 슬슬 자리를 옮길거다. 다만 그전에 이마트 건물이나 백화점있는 수원역사에 가서 옷가지랑 식료품을 챙겨야 할거야."
붉은색 싸인펜으로 이리저리 죽죽 그은 지도의 부분 부분을 대식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아까 영진이가 학교에서 수원역쪽으로 가는 루트를 두시간동안 체크했다. 골목길은 위험하니까 아예 배제 시켰고, 대로를 따라가게 했는데 담배 세갑을 다쓰고도 돌파를 못하고 돌아온거 같아. 만만치가 않다고 하더라고."
이번에 대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파란색 싸인펜으로 그은 부분이었다.
"날이 밝기전까지 현수 너는 반대방향인 이마트 쪽을 체크해라. 알았지? 길이 확보되야지 물품도 보급하고 겨울도 날 수 있어."
"현수야 골라라."
대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현이 현수를 향해 손짓을 한다.
원래 각종 서류가 들어있었을 철제 케이스를 열어보이는 정현. 그 안에는 서류 대신 몇자루 총기가 안을 채우고 있었다.
"고르긴 뭘골라. 어차피 대부분 탄약도 없잖아.. 고를만한건... 이거 밖에 없네."
현수가 고른 무기는 경찰 3단봉. 대부분의 총기는 탄약도 얼마 없는데다가 지금 같은 정찰 임무에선 무게만 차지하고 날렵하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차라리 튼튼한 철제로 이루어진 3단봉이 자신의 성격에 맞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총보다 더 중요한게 있었다.
"다음은 보급품인데..."
"말보루 레드."
"그거 얼마 안남았어. 디스 가져가."
"레드 줘. 돌아오면서 편의점 털어서 채워놓으면 되잖아."
"깐깐하기는......."
정현은 투덜거리며 말보루 레드 한보루를 뜯어 5갑 정도를 빼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도구. 총보다도 중요한 외출의 필수수단. 바로 담배였다.
학교 밖을 나온 현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켜져있지 않은 완전한 어둠.
익숙한 21세기 도시의 풍경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 현수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맘에 안들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새벽거리를 나서며 현수는 품안의 담배곽을 만지작 거렸다.
물론, 새벽거리는 인적이 드문 것이 당연한 법이었지만, 그것은 그저 평범한 밤의 풍경일 뿐.
현수가 보고 있는 이것은 생명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와도 같은 거리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폐허처럼 변해버린 도시의 아파트 단지들은 반쯤 무너져있거나 낡아 비틀거리며 끼익끼익하는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에 맞춰 기괴하게 뒤틀어진 검은 인영이 깨진 창문 밖으로 불쑥 나왔다 들어갔다 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기괴하게 뒤틀어진 검은인영! 어둠에 익숙해진 현수의 눈이 그것을 포착한 순간, 현수는 재빨리 주저 앉아 신발끈을 단단히 조이기 시작했다.
"새벽 달리기 시작이군.."
현수는 오대식이 알려준 규칙을 상기하곤 이를 악물었다.
[ 규칙 0. 새벽조가 하는 일은 놈들을 몰아 최대한 학교에서 떨어지게 하는 일이다.]
[ 규칙 1. 놈들을 발견한 순간 전력을 다해 달려서 교문과 멀어져라. 전체가 발각되어선 안된다.]
[ 규칙 2. 돌아올때도 전력을 다해 달려서 교문으로 들어와라. 단, 놈들을 모두 따돌린후에 들어와야만 한다.]
생각을 마친 현수는 총알 처럼 달려나갔다. 도중에 깨진 아스팔트 조각과 보도블럭에 걸려 한두번 넘어질뻔 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바로잡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넘어지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
그리고 현수가 달리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아파트 단지의 그림자에 묻어있던 기괴한 검은 인영들이 썰물처럼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달리는 현수를 발견하고 그 뒤를 쫓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아, 우아, 우아, 우아]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지옥에서나 올라올 듯한 기상천외한 소리를 내지르며 현수를 향해 거리를 좁혀오는 그림자들.
심장이 터질듯이 달리던 현수는 자신의 앞에도 우르르 소리와 함께 놈들이 앞을 가로 막자 그제야 자리에 멈춰섰다.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의--사---- 의----사----------- 의사아아아아아아아!!]
저벅 저벅 점차 거리를 좁혀오며 사지를 흔드는 놈들을 보고 현수는 다급히 담배를 꺼내어들었다.
그리고 가스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곤 깊이 들이마쉬었다.
전력질주를 해버린 탓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그런 상황에서 들이마시는 담배연기는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아팠지만, 현수는 개의치 않고 담배를 피우고 연기를 내뱉었다.
그렇게 하기를 십여차례. 그사이 현수는 이미 검은 손길들에 붙잡혀 갈갈히 찢겨지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현수는 다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를 뺑 둘러싼 놈들은 해로운 것에서 멀어지듯 다급히 현수로부터 몸을 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현수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우습군. 인류를 병들어 죽이는 마약이 이젠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되다니 말이야..."
꽁초를 아무렇게나 팅겨버린 현수는 한가치를 새로 꺼내 다시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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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려니 진짜... 너무 안되는군요.
2편에서 계속 얘기가 나오겠지만, 인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기전염성 질병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살아남은건 면역자.
멸망한 인류는 괴물이 되어 생존한 자들을 위협한다.(면역자이기 때문에 물린다고 전염되지 않는다)
괴물이된 인류는 시각을 상실하고 오로지 후각과 청각으로 상대를 판별한다.
괴물이된 인류는 그 질병으로 죽을 당시의 마지막 단말마를 울음소리처럼 낸다.
(이때문에 희생자가 이 소리를 구조신호로 착각하여 유인당하는 경우도 있다. ex: 살려줘요. 살려줘요 살려줘요오)
현수가 먼저 한 일은 점점 학교 근처로 모여드는 괴물들에게 스스로 미끼가 되어서 학교에서 멀어지게 한것
정도가 되겠습니다.
오 담배 전사인가요? 참신하군요...ㅎㅎ
정확히 말하자면 좀비화된 인류는 후각과 청각만으로 먹이를 판단하기 때문에 담배의 연기와 냄새는 일종의 교란장치 역할을 해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