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잖아.”
낮게 깔린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로벨리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찰싹 붙었고, 그렇게 우리 둘은 한 편의 치정극을 보듯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내가 왜 아저씨를 구했는데?”
주인마님의 말에 주인님은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인간 형태로 변해 바닥에 앉은 채 고개를 푹 숙인 주인님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하네. 나 같이 담배나 뻑뻑 피우고, 아내로 삼는다고 다른 데서 잘 살던 어린애 데려와서 고생만 시키는 녀석을 네가 왜 구했는지 모르겠어.”
……인간들한테 죽기 직전까지 당하더니, 주인님의 멘탈이 붕괴된 모양이다. 주인님의 끝없는 자기비하를 듣던 주인마님은 답답한 듯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주인님을 달랬다.
“그러니까, 담배는 이제 끊으면 되잖아. 그리고 전에 살던 곳보다 여기가 낫다니까? 이제 내가 드래곤이 되고 결혼만 하면 되잖아?”
주인님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떨어뜨렸다.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로벨리아가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나중에 대답해준다고 하며 속으로 두 분을 말릴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네가 드래곤이 되기도 전에 죽을 거야. 지금 나는 폐가 다 썩어 들어가서 브레스도 쓸 수 없고, 드래곤 하트도 썩기 일보 직전이야. 네가 헤집어놓은 덕분에 폐랑 떨어져서 더 이상 썩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 정도로도 이미 끝난 거야. 더 이상 드래곤이라고 할 수도 없어…….”
멘탈이 붕괴된 자의 자괴감은 처참할 정도였다. 더 이상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침울해져있는 주인님을 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던 주인마님은 선전포고를 하듯 충격선언을 했다.
“나 조금 있으면 드래곤 된단 말이야! 어제 꿈에서 상제님이 1주일 안으로 드래곤이 된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주인마님의 말에 주인님은 고개를 번쩍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주신께 질문을 하고 계시리라. 잠시 후 천천히 고개를 내린 주인님은 ‘大’자로 누워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아저씨?”
“쿠흐흐하하흐후히하”
“뭐, 뭐야?”
“으하하하하 므겡므겡 길길…….”
미친 게 분명한 주인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난 주인마님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우리들을 발견했다. 내 옆의 로벨리아에게 살짝 의문을 표한 뒤, 주인마님은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주인님을 가리켰다.
“코이야.”
“어, 응?”
갑자기 상체를 벌떡 일으킨 주인님은 주인마님의 양손을 덥석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면, 아빠는 참 나쁜 놈이었다고 해줘.”
주인마님의 얼굴은 10년 전쯤에 화산 분화구에서 본 색깔이 되었다. 용암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주인마님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알이 깰 때까지는 100년이 걸려. 그때까지 살아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 앞으로 고생은 코이가 다 하게 되겠네. 미안하다.”
주인님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괜히 숨어있었잖아?
“발터. 그리고 옆의 이름 모를 뱀파이어 아가씨. 코이랑 내 아이들, 미리 부탁할게.”
비관이랑 거리가 먼 주인님이 저런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몸 상태가 정말 안 좋거나 주신께서 무슨 말을 하신 것이 분명하다. 정말 주인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뱀파이어는 웬만해서 눈물이 안 나는 종족인데 눈물이 나오네. 로벨리아는 주인님이 나와 함께 자신을 지목하자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종종걸음으로 주인님께 달려갔다. 저 이상한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나도 급하게 따라갔다.
퍼억.
일 났군. 저 미x 여자가 기어코 드래곤의 피를 맛보고 싶었는지, 다짜고짜 주인님께 주먹을 휘둘렀다. 주인님은 힘없이 풀밭에 나뒹굴었고, 놀란 주인마님은 비명을 지르며 주인님을 보호하듯 그의 상체 위에 엎드렸다. 그때까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던 로벨리아는 주인님을 향해 일갈했다.
“부인과 아이만 남겨두고, 부하에게 뒤를 부탁한다고 하면 끝인가요? 우리의 수명은 당신들보다 길지 않아요. 수명 같은 거 계산할 필요도 없이 당장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 이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부인이 저쪽의 음탕하고 능글맞은 뱀파이어에게 못된 짓이라도 당한 뒤 재산을 몽땅 갈취당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이, 이 여자가 나를 모욕했겠다! 명예 훼손으로 고발해주겠어. 주인님, 주인마님, 그런 눈으로 보시면 안돼요! 지금 속고 계신 거예요!
당황해서 속에 응어리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손만 휘휘 젓는 나를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린 로벨리아는 쓰러져있는 주인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로벨리아. 로벨리아 셀 테이시아르. 어둠의 신 테이시아님을 모시는 종이자, 그 분의 대변인입니다.”
순간 로벨리아를 제외한 모두가 얼이 빠졌다. 내가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30분 전에 뱀파이어 식 사랑을 나눈 상대가 어둠의 교단 교주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뇌리에서 삭제를……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자가 기억소멸은 불가능했다.
무릇 한 교단의 교주라면, 신의 대변인이자 화신으로서 세상에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의무이거늘, 이 여인은 어찌하여 순진한 뱀파이어를 꼬이고, 드래곤에게 주먹질을 한단 말인가.
로벨리아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주인님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밝아보였다. 로벨리아가 귓속말로 몇 마디 속삭이자, 주인님은 환해진 표정으로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 당분간 로벨리아 양의 교단에 갔다 올 테니, 너는 코이 곁을 지켜라. 아, 그리고…….”
주인님이 갑자기 내 멱살을 움켜쥐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손아귀 힘에 나는 볼품없이 캑캑 거렸지만, 싱글벙글한 표정의 주인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귓속말을 했다.
“코이 건드리면 죽는다. 음탕하고 능글맞은 뱀파이어.”
아프고 억울해 돌아가실 지경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주인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는 로벨리아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500년 전, 주신의 편에서 신마 전쟁에 참가한 테이시아와 어둠의 교단은 당시 같은 편으로 참전했던 블랙 드래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중에 그가 죽자, 그의 시체를 수거해 최대한 온전히 보관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그 폐는 멀쩡했고, 주인님의 드래곤 하트는 테이시아의 힘을 조금만 빌리면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즉, 죽은 동족의 장기를 이식 받아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사로세.
기쁜 마음에 우리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초조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주인마님께 달려가 보고를 드리고자 했으나, 두 흡연자에게 덜미를 잡혔다. 주인마님을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겠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렇게 주인님은 주인마님께 간단한 이별 인사를 하고 로벨리아와 함께 공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영문도 모른 채 안타까운 손짓으로 주인님을 배웅한 주인마님이 이것저것을 캐물어 왔지만,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다만 걱정하지 말라고만 말해주었다.
주인님이 로벨리아를 따라 간지 일주일째다. 주인님이 떠나간 뒤부터 침울해져있는 주인마님은 말을 걸기 힘들 정도로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주인마님. 그렇게 축 쳐져 계시지 말고, 기운 내세요. 오늘은 드래곤으로서의 첫 날이잖아요? 언제 되실지 모르지만…….”
주인님은 분명히 주인마님이 드래곤이 되기 전에 돌아온다고 하셨다. 하지만 벌써 당일인데 소식조차 없으니 점점 초조해졌고, 주인마님은 더욱 침울해졌다. 혼자 있고 싶다는 주인마님의 말에 레어 밖으로 나와 마당을 쓸던 나는, 7년 전에 봤던 광경을 다시금 목격했다.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며 한줄기 빛이 마당으로 내리쬐기 시작하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직감한 나는 주인마님께로 달려갔다.
“으으…….”
주인마님은 책상에 엎드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몸에서 신비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손을 대면 내가 재로 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엘프 아이들을 불러서 같이 놀다가 낮잠을 재워둔 것이 생각났다.
“얘들아! 나 좀 도와줘!”
내가 뱀파이어라서 신성한 빛에 손을 못 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주인마님을 걱정하며 군말 없이 내 지시에 따랐다. 주인마님을 넓은 방으로 옮긴 뒤, 물수건으로 주인마님의 얼굴을 닦아주던 아이들은 주인마님이 괴로워하자 다 같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코이 언니, 아프지 마.”
“어헝. 코이 누나 죽으면 안 돼.”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된 아이들을 달래가며 전전긍긍하던 그때,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터! 코이! 다들 어디 갔어?”
“주인님!”
자리를 박차고 주인님을 맞으러 나가자 꼬마들이 졸졸 따라왔다. 큰 가방을 멘 주인님은, 아이들이 다리에 매달리는 것을 무시하며 내 안내를 받아 주인마님께로 갔다.
“언제부터 이랬어?”
“10분쯤 됐습니다.”
주인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아이들을 내보냈다.
밖으로 나가보니, 로벨리아가 벽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머, 참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응. 그러니까 입맛 다시지 말고 담배부터 꺼. 애들도 있으니까.”
내 말은 무시한 채 끝까지 담배를 피우며, 로벨리아는 엘프 아이들의 머리를 토닥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 위험하다니까.
“잠깐 할 말이 있어요. 얘들아, 부엌에 간식 있으니까 가서 먹으렴.”
아이들은 방금까지의 울음바다는 싹 잊었는지 우당탕 거리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할 말이 뭐냐는 무언의 질문이 담긴 시선에, 로벨리아는 화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보고 싶었다는 말이나 포옹, 안 해줘요?”
“내가 댁한테 왜?”
“칫, 재미없어.”
로벨리아는 복도에 길게 나 있는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창틀에 왼팔을 얹고 턱을 괸 그녀는 허리춤을 뒤지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설마 내가 우연히 당신과 만나서 우연히 스티그마님을 살릴 방법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조금 이상하긴 했어.”
“사실, 나 여기를 찾아오던 중이었어요. 같이 다녔던 인간들은 방향이 비슷하다고 멋대로 따라온 녀석들이고.”
그렇다면, 주인님이 인간들한테 된통 당할 때 이 여자는 손 놓고 구경만 했다는 소리다. 분명히 재미있어서 그랬을 거야, 이 성격 파탄자는.
“주신께서 주인님을 살리려고 보내신 건가?”
“아마도요.”
“그러면 그런 거지, 아마도는 또 뭐야?”
“테이시아님께서 계시를 내려주셨으니, 뒤에서 주신께서 지시하셨는지 어쨌는지는 모를 일이죠.”
논리적으로 보면 주신께서 이 세계 마지막 드래곤을 살리기 위해 온전히 보존된 드래곤의 시체를 보관하고 있는 테이시아의 교단에 지시를 내린 것이 타당하겠지만, 로벨리아는 교주답게 함부로 지레짐작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테이시아의 계시는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하는 것이며, 함부로 의문을 품으면 안 되는 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코이님의 일 때문이기도 하고요.”
“주인마님은 왜?”
“코이님은 저희가 보관하고 있던 드래곤 하트를 가져야만 드래곤이 될 수 있거든요. 뭐더라? 아. 여의주를 물면 용이 되고, 드래곤 하트를 물면 드래곤이 된다, 라던가? 아무튼, 그것 때문에 드래곤 하트를 운반하느라고 시간이 좀 걸렸어요. 함부로 공간이동 마법 쓰다가는 드래곤 하트의 무한한 마나 때문에 좌표가 어긋날 수 있거든요. 물론 드래곤 몸속에 있는 것은 괜찮지만.”
“그렇다면, 아까 주인님이 들고 온 가방에 드래곤 하트가 있겠네.”
로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끝에서 검은 화염을 일으켜 담뱃불을 붙였다. 그녀는 매끄러운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얀 송곳니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이런 성격 파탄녀가 어둠의 교주까지 하고 있으면 도저히 살갑게 대하기 힘들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우리는, 금새 간식을 다 먹고 뛰쳐나온 아이들과 놀며 시간을 보냈다.
1시간 뒤.
주인님과 주인마님이 있던 방에서 심상치 않은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로벨리아는 내 팔을 잡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창밖에 신기한 것이 있다며 창문 쪽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속는 셈 치고 창문 밖을 본 나는, 평생 동안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15m짜리 다리 달린 뱀의 모습을 한 그녀는 온 몸을 금빛으로 물들인 채 하늘을 이리저리 오가며 새로운 경지로의 환골탈태를 위한 태동을 하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보니, 드래곤으로 변신한 주인님이 낮게 날며 주인마님의 비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이 공처가가 되겠구나 싶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주인마님 쪽을 보자, 어느새 하늘에서 내려온 빛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주인마님은 입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드래곤 하트를 문 채, 열심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더니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빛이 온 세상을 눈부시게 물들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망막에 그 잔상이 남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아마 유리창을 안 닫았더라면 몸에 화상을 입었겠지. 빛이 번쩍이고 1분가량이 지나자, 구름 사이로 황금빛의 꼬리가 튀어나왔다. 주인님의 그것과 꼭 닮은, 매끈하고 긴 꼬리였다. 뒤이어 주인님과 같은 종족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날씬한 다리와 몸이 보였는데, 그 순간
갑자기 주인마님이 사라졌다. 당황한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승천하는 드래곤이었다.
주인님은 빠른 속도로 고도를 높이더니, 인간으로 변해서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주인마님을 받아들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두 드래곤은 서로에게 기댄 채로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꺄악. 로맨틱해라. 자, 우리도 어서!”
어울리지 않게 소녀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린 로벨리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민 뒤에, 두 분을 맞을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내려갔다. 주인마님이 무사히 드래곤이 되었고, 주인님도 건강을 회복하고 오셨으니, 이런 겹경사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대로 엘프 마을에 신호를 보낸 나는 대대적인 마을 잔치를 벌일 준비를 했다.
“우리 갔다 온다. 문단속 잘해. 재산 갖고 튀지 말고.”
“네, 네.”
“정 심심하면 문 걸어 잠그고 엘프 마을에서 살다가 와도 돼. 다들 환영해줄 거야.”
“아뇨, 저희가 불편해요.”
내 대신 대답하는 로벨리아를 흘겨본 뒤, 주인님과 주인마님께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드렸다. 두 분이 신혼여행을 가시게 되자 이제 근 1년간은 나 혼자 생활하겠거니 싶었는데, 이틀 사이에 어둠의 교주를 후임에게 물려주고 온 로벨리아가 이 레어에 눌러 살기로 했다. 때문에 당분간은 많이 고생할 것 같다.
머리가 빛나는 금색으로 변한 주인마님은 키도 커지고 해서 제법 성숙한 여인 분위기가 났다. 그 모습에 입이 귀에 걸린 주인님은 주인마님에 명에 따라 당장 담배를 끊기로 했다. 앞으로 주인마님께 잡혀서 살아가실 주인님을 위해 일동 묵념.
“그럼 발터 도령, 로벨리아 낭자. 잘 지내고 있어.”
“두 분도 잘 갔다 오세요.”
드래곤으로 변해 창공을 날아오르는 두 분을 보며,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들어왔다. 이제 이 세상의 드래곤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수 세대에 걸쳐 번창하게 될 것이다.
‘다만, 담배는 피우면 안 되겠지. 담배는 드래곤도 병들게 만드니까.’
“무슨 생각해요?”
내 팔에 찰싹 달라붙은 채 담배를 물고 있는 로벨리아에게서 담배를 빼앗아 물었다. 로벨리아는 킥킥대며 예의 검은 불꽃으로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텁텁하고 매캐한 연기가 목으로 넘어오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고 기침을 참을 수 없어서, 바로 담배를 뱉어내었다. 내게서 다시 담배를 받아든 로벨리아는 연기를 한껏 머금더니 내 얼굴을 향해 뿜었다. 눈이 따가웠다. 그녀에게 꿀밤을 먹인 뒤, 놀러오기로 한 엘프 꼬맹이들을 마중하러 마을로 갈 준비를 하면서 문득 생각난 질문 한 가지.
“너는 담배를 왜 피우는 거야?”
로벨리아는 눈을 들어 잠시 천장의 무늬를 감상하는가 싶더니, 알게 뭐냐는 듯 밝게 웃었다.
“스티그마님이랑 비슷한 이유에요.”
“뭐? 너도 신마 전쟁에 참가했어?”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나를 이상한 물건 마냥 보던 로벨리아는 다 피운 담배 꽁초를 검은 불꽃으로 완전히 연소시키면서 대답했다.
“스티그마님은 가족이랑 친구를 모두 잃고나서, 자신은 담배 군락지에서 그 연기를 마시며 죽을 뻔 했죠.”
로벨리아는 묘하게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코이님과 가족의 연을 맺은 지금, 담배를 끊으셨어요. 이제 좀 알아들으시려나?”
아, 나는 멍청이였다. 지금까지 50년 넘게 주인님을 보면서, 그 분이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단순한 중독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렸다. 사랑하는 이들은 전부 죽었고, 자신은 담배 연기 때문에 죽을 뻔했다. 살아갈 이유를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주인님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담배 연기를 들이켜 오신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인연을 맺어 가족이 되기 전까지는. 주인마님과 가정을 이룬 지금, 주인님께는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 이유는 곧 주인님의 금연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면 너는…….”
어느새 장난기 어린 눈으로 돌아온 로벨리아는 새로 꺼낸 담배 한 개비를 내 눈앞에서 까닥였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뒤, 담배를 빼앗았다.
“너도 담배 끊어.”
“내가 왜요? 나도 가족 없고, 친구도 없는데요. 아, 죽고 싶어라.”
으으, 이 여자는 정말 남의 성질 건드리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임이 분명하다. 토라진 표정으로 도도하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나보고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하아. 어딘가의 누구누구 씨는 몇 십 년 만에 만난 동족인데 내가 싫다고 하네. 어쩔 수 없지. 몸에 안 좋은 담배나 피우다가 콱 죽어버릴까?”
나의 패배다. 나는 이제 이 여자가 바라는 대답을 하고 죽을 것이다. 쪽팔려 죽거나,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죽거나.
“……해줄게.”
“네? 뭐라고 했어요?”
“가족이든 친구든 해줄 테니까, 그냥 담배 끊어. 이제부터 이 레어는 금연구역이니까.”
로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있던 주머니를 풀어내어 창밖으로 던지고는 나에게 몸을 날렸다. 엉겁결에 그녀를 안아든 나는 창밖에 흩날리는 담배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꼬마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없을 것 같다. 그녀의 투정과 장난을 받아주고 나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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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짧게 구상했는데, 갈수록 길어지는 데다가, 주제랑 점점 동떨어졌습니다.(오글거림은 덤)
하지만 제대로 결말까지 쓴 첫 글인데다, 1인칭 시점으로 써보는 것이 의외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벤트 기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참여하시는 분들이 늘었을 것 같네요.
이벤트 참여하시는 다른 분들도 모두 건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