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있어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아니 들어본 적조차 없는 계절이었다. 그녀의 첫 여름이 오고 나서야 그녀는 여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따뜻했던 햇살은 뜨겁다 못해 따갑게 쪼였고 끈적거리는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이 무더운 계절이 사계절 중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계절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더위는 그동안 그녀의 마음속에 쌓였던 ‘차가운 것들’을 덥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남편과 처음 만났던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그 남자를 만나서 처음으로 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 남자를 사랑했다. 그들은 처음 만난 그 날 당장 온몸으로 사랑을 나눴다. 성급한 정도를 넘어서 마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와 성급히 결혼을 한 그녀는 후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한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녀에겐 사실 더 많은 경험과 생각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이의 내면에 숨겨진 어두운 모습까지 꿰뚫어볼 지혜가 적어도 그 때의 그녀에겐 없었다.
남편이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과 꿈만을 찾아다니는 한량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첫 번째 ‘차가움’을 느꼈다. 그 즐거움이 그저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돌아다니면서 기력을 허비하는 것이고, 꿈이란 것은 아무런 수고도 들이지 않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나 마음껏 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두 번째 차가움을 느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사랑이 너무나 뜨거웠던 나머지, 지금 사랑이 식은 그의 모습은 다 타버리고 남은 새까만 재 같았다. 자신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그녀는 세 번째 차가움을 느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도 그녀의 마음 속 응어리진 차가운 것들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고 그녀의 몸과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빠르게 식어만 갔다. 때문에 그녀에게 찾아온 이 뜨거운 여름이 그녀에겐 시련에 대한 인내 끝에 찾아온 세상의 보상 같았다.
그러나 이 여름이 그녀가 가진 차가운 것들을 전부 녹여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느끼는 햇살과 바람이 더 따뜻해졌을 뿐 그녀와 남편의 관계는 여전히 겨울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 초여름의 후끈한 햇빛을 쬐며 남편의 마음을 돌려보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마음이 자신과 현실을 향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언제 갈 지도 모르는 이 세상, 손해 보는 건 싸우고 일하면서 죽도록 노력하는 녀석들이야. 누가 득을 보는지 알아? 그런 녀석들이 닦아놓은 바닥에서 오늘을 즐기는 자가 득을 봐. 내가 나쁜 놈 같아? 상관없어. 나는 이 세상에서 최대한 즐기며 살고 있으니까.”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보기에 진작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을 탓할 정도로 그 근본부터가 썩은 남자였고, 예전부터 그녀의 갖은 설득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듯이 이번에도 그녀의 간절한 마음을 털끝하나 알아주지 않았다.
“엄청난 변화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여보. 그저 당신과 제가 배고프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우리 자식들이 부모를 탓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해주는 것, 오로지 그것만 원해요. 제가 이런 걸 바라는 게 잘못된 건가요? 당신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저 즐거움과 꿈을 마냥 노는 것이 아닌 다른 것에서도 찾아봐달라는 말인데, 제가 당신에게 하지 못할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하고 싶은 말들을 그가 기분 나빠 하지 않도록 최대한 다듬어가며 말했다. 하지만 이 남자의 태도에서는 자신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것은커녕 그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아무런 빛이 없는 그의 눈동자 속에 ‘지금’은 없었다. 그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하늘 끝에 그녀의 모습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 아닌 내일이었고 그 내일이라는 녀석은 오로지 자신의 허황된 욕망으로 가득할 뿐인 세상이었다.
“난 모른다고. 그런 심각하고 복잡한 건.”
오늘 밤 어딘가에 또 놀러갈 생각인지 머리를 자꾸만 다듬는 그를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어 그녀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녀는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한다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탁이에요.”
그녀는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무정함을 받아들이기 싫어 눈을 꾹 감았다. 그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그 소리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 한숨 역시 후회나 미안함보다는 귀찮음에서 나온 한숨일 테니까.
“그럼 당신이 나가서 뭐라도 하면서 먹고 살든지.”
그녀는 그의 진실한 내면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글러먹은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집을 나섰다. 그의 말대로 정말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이 여름의 햇빛이 그나마 그녀에게 작게나마 위안을 줬기 때문이다.
그녀는 왜 이 따뜻함이 자신에게 힘을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차가운 이 가슴이 그저 햇빛을 쬐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일종의 한심함을 느꼈다. 그녀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온 몸에서 솟아오르는 이 에너지, 그것은 본능이었다. 그녀의 내면엔 따뜻한 이 햇빛을 간절히 원하는 본능이 있었다.
이것이 본능이라면, 자신의 생각과 무관한 것이라고 해도 이것이 본능이라면 그녀는 이에 따라야 했다.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이 느낌이 옳든 그르든, 살아가는 조건이 좋든 나쁘든 자신의 온 몸이 이 햇빛에 에너지를 받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욕구’를 느끼고 있다면 그녀는 그 욕구에 따라야만 했다. 그녀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의 남편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남편이 좇는 것은 분명 허상, 그저 어떤 의미도 없는 순간적인 쾌락과 안락함이겠지만 자신이 마주한 이 ‘본능’이라는 것은 그것과는 달랐다. 뱃속에서 지금도 자라나고 있는 아이를 지켜주고 싶은 모성과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비관으로부터 비롯된 삶의 욕구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녀에겐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자신의 욕구에 따르기 위해서 그녀는 남편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무서운 발상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남편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 주었던 것은, 첫 만남에서 느꼈던 사랑의 추억 이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랑의 대가란 진정한 즐거움도 꿈도 평생 느끼지 못할 남자를 위해 바치는 자신의 한 평생이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같은 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각오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그를 죽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죽일 가치조차 없는 존재였고 어차피 그는 자신의 계획에 의해 타인에게 심판 받을 예정이었다. 그저 자신의 인생에서 그를 지우고 그를 다시는 볼 일이 없게만 된다면, 그걸로 새로운 삶을 위한 그녀의 준비는 완료되는 것이었다.
“뭐야.”
그의 앞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표정만큼은 마치 그녀가 아닌 듯했다. 광기가 어려서 ‘당신이 심판받는 것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생각이 그대로 투과된 표정을 보고 그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신은 제 남편이 아니었어요. 만약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당신 같은 쓰레기는 다신 만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인생에서 존재하는 그 즐거움이라는 것과 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인지, 당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알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그저 꿈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당신의 허무한 인생을 포장하고 살아갈 뿐이에요. 하지만 저는 당신과는 달라요. 저는 제 삶을, 그리고 제 아이들의 삶을 위해 제 길을 갈 거예요. 제가 살아가면서 비록 당신처럼 자극적이고 향락적으로 생을 즐길 수는 없겠지만 결코 당신보다 덜 행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에게 있어서 저는 아내가 아니었듯이 당신도 제게 있어 남편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애당초 우리는 결혼한 적이 없으니까요.”
“나도 너처럼 미친 여자가 내 아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알았으면 이 집에서 나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지금 바로 나갈 거예요. 당신의 집에서. 아니,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말이에요.”
“한 마디라도 더 지껄였다간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
그녀는 말 그대로 아무 대답 없이 집을 나섰다.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 의해서 심판 받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마주치지도 않던 그녀가 사람들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화가 났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인지 그가 그녀인지 알 수 없고 알 생각도 없다. 어차피 모두 죽일 것이다.
열기가 피어오르는 여름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주었고 그녀는 넘치는 에너지를 받으며 집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방충망을 힘겹게 비집고 들어가 누워서 자고 있는 사람에게 향한다. 그리고 사람의 팔에 안착해 피를 빨기 시작한다. 온 몸에 넘치듯이 힘이 돌기 시작했고 차오르는 배의 풍만한 기분이 만족감을 준다.
“얘들아. 맛있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속삭이며, 자신을 노리고 휘두르는 팔을 피해 빠르게 날아오른다. 짜증내는 사람을 천장에 붙어서 지켜보며 그가 다시 잠에 빠지기를 기다린다. 사람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을 무렵 그녀는 다시 그의 발가락 사이로 앉아 피를 쭉 빨아 마신다. 이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나름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깨달았다. 이 여름이 그녀의 본능을 깨워주었다.
어라 저 혼자만 응모했나요
네... 관리자인 저도 참여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여름... 여름이 옵니다... 모기의 여름이...
잘 읽었습니다
위이이.....잉??
모기라니. 속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