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날 아침, '해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냥 눈을 뜰 뿐 스스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일어나려고 한다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소중한 몇 킬로칼로리를 소모하는 일이기에 가만히 눈만 뜰 뿐이다. 아, 정확히 말한다면 해인이가 주체적인 신체활동으로 눈을 뜬 것은 아니고, '웨이크 호르몬'이 작용하여 '슬리핑 호르몬'을 제거했기 때문에 눈이 떠진 것이다.
해인이가 눈을 뜨면 이미 설정해 둔 대로, 그날의 뉴스나 날씨, 여러 정보들이 뇌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특수한 광 전파는 해인이의 뇌 안으로 온갖 정보들을 쏟아낸다. 일반적인 인간의 뇌는 그 정보들을 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광 전파 속에 '루시드 호르몬'을 섞는다면? 꿈을 꾸는 듯이 변한 뇌는 순식간에 모든 정보를 압축, 재생, 저장할 수 있다. 몇 초밖에 안 되는 순간에 온갖 정보는 뇌 속에 꽉 채워진다.
'지구촌 의회는 어제 624건의 안건을 심의, 그 중 560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지구촌 평화유지군은 반(反)지성 무장세력의 16개 거점을 불능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외출하기에 적당한 날씨입니다.~~'
이렇게 들려오는 여러 소식은 가끔 수다거리로 쓰이기에 기억을 해둬야 한다. 뭐, 굳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AI가 알려줄 것이니 상관없다.
"아. 뉴스 알림 꺼둘까." 해인은 약간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귀찮은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어차피 알고자 하면 전부 알 수 있는데. 그렇지만 그녀가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AI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것이 더 귀찮고 꺼려지는 일이다. 그녀는 외마디 불평을 내뱉고는, AI에 명령했다. "에이아이, 목욕."
그러자 그녀를 감싸고 있던 옷가지들은 사라지고, 침대가 욕탕으로 바뀌어 그녀의 반신을 물에 담궜다. 비록 그녀는 AI가 제공하는 욕탕에 들어가 있지만 이때만큼은 그녀가 어떤 고도 문명의 제약과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다. 해인은 욕탕 끝에 기대어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2036년, 자신이 열 살 때일 무렵 일어난 IT혁명은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128번째 거주지는 어디로 할 것인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는가.ㅡ등의 쓸데없는 생각은 그녀의 진보하는 뇌에 약간의 제동을 걸기에 충분하다.
너무나 급속한 발전은 멸망을 부르는 법이다. 해인은 욕탕에 들어앉으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반지성인들의 논리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인공지능을 뛰어넘는 지성인의 자만이 느껴지고 떫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에이아이, 출근." 이 말을 하면 욕탕과 지성인의 자만은 사라지고 옷장과 반지성인의 의존만 나타날 뿐이다. 필요치 않은 젖은 물기는 빠르게 제거되어 간다. IT혁명 전의 디스토피아 SF 소설이나 한 세기 전 독재 시대의 작품에는 획일주의와 전체주의를 경계하며, 그 상징의 하나로 근무복의 획일을 꼽았었다. 그 시대의 걱정과 고민은 그대로 이어져, 오늘날은 완전한 복장 자율화가 이루어졌다. 자율화뿐인가. 디지털화된 의복을 무수히 고를 수 있고 커스터마이징 역시 가능하다.
"분홍색 돌고래가 그려져 있는 흰색 티셔츠와, 무릎까지 와닿는 검은 반바지." 해인의 알몸은 그녀가 주문한 복장으로 감싸인다. 이렇게만 입는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디지털 자유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가 테크노브레인센터에 입사한 이후로 고집하는 것은 위에 입는 아날로그 실험복이다. 이 실험복은 그녀가 갖고 있는 아날로그 물품 중 하나로, 부모님에게 받은 것이다. 자신의 복장 위에 실험복을 덧입고 단추는 매지 않는 약간의 거만함을 보인다. 이것이 그녀가 추구할 수 있는 소소한 저항의 하나인 셈이다.
그녀는 오늘도 테크노브레인센터로 향한다. 전세계 최대의 과학연구단지로.
[계속]
p.s 그냥 소설 여기다 올리면 되는 건가요?? 흠
웬지 고전 SF 소설인 '듄'이나 애니 '사이코-패스'에서 나오는, 인공지능에 대한 무분별한 의존으로 인한 인류의 부정적인 변화가 생각나네요. 저도 이곳에서 연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구분만 잘 해서 올리시면 될거라고 봐요.
와 댓글 감사합니다!! 사실은, 인류의 부정적 변화보다는 미래세계의 모습을 다루면서 중심 이야기를 진행하려고 합니다. BlackBox님 것도 꼭 보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