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딱 하나, 그것도 전필이라 마음대로 쉬지도 못하게 만들었던 악독한 강의가 끝났다. 나는 책가방을 싸며 H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이종족의 이해’ 레포트 끝냈어? 내 기억이 맞다면 그거 지금 쯤 레포트 내야할 텐데?”
“아. 맞다.”
“너……그러다가 삼수강한다. 그거 교필이라서 빵구도 못 내잖아.”
얘는 자기 일인데 왜 이렇게 무관심할까.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대학교 6학년까지 다니겠네.
H는 나에게 달라붙었다.
“보여주면 안 될까?”
말투는 요청이지만 나는 H의 언어 외적인 신호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인이기에 알 수 있는 것.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갈망과 아슬아슬한 곳 직전까지 닿는 손길, 감정을 동조시키는 체취.
대외적으로는 과제를 받으러 가는 것이지만……실질적으로는 아침에 자체휴강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려고 했던 것을 해버리자는 의미였다.
그리고 알다시피……오늘 수업은 전부 끝났다.
“……집에 가서 찾아보자. 아마 따로 레포트 모아 둔 곳에 있을 거야.”
연인 외의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은 거부감이 들지만 연인과의 잠자리는 언제나 환영하는 나다. 어흠. 고백하자면 평균을 월등히 상회하는 정도로.
어쩔 수 없잖아. 내 피의 절반은 음마인 걸.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내가 H와 사귀는 이유 중 하나가 H가 내 성욕을 충분히 받아줄 수 있기 때문인 걸.
집에 도착하니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는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 잠깐.”
내가 변명, 아니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단어를 짜낼 때 H가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누가 있어?”
현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의 문이 살짝 열리고 문틈으로 팔로 가슴을 가리고 머리가 촉촉하게 젖은 R이 고개를 내밀었다.
“I. 수건 좀……”
R과 H가 눈이 마주쳤다. R의 얼굴이 굳었다. H는 멍하니 R을 바라보았다.
쾅하니 화장실 문이 닫혔다. H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즉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로. 알잖아. 가끔씩 R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던 거. 가끔씩 너랑 같이 나 없을 때에도 와서 자고 갔잖아.”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어?”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어! 술만 마셨어. 술 마시고 R이 꼴아서 우리 집에서 재운 것뿐이야. 진짜.”
H는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 거렸다. 이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지옥랑의 후각감지 능력은 반인반수 중에서 순위권에 들어갔다. 냄새를 맡아서 내 부정의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나랑 R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한참 냄새를 맡던 H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어?”
“냄새 맡았으면 알잖아! 없었어!”
……아.
다급하게 부정하던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R과 부정한 짓을 한 것을? 아니다.
지금 이 상황이 나의 당황하는 모습을 찍는 몰래카메라라는 것을? 그것도 아니다.
나는 알아차렸다.
H가 책망이 아닌, 기대에 찬 눈으로 나에게 R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는 것을 말이다.
나는 어제 나와 H가 싸운 이유를 떠올렸다.
H는 나에게 자신의 친구와 함께 잠자리를 해주기를 요구했었다. 그런 것에 자신이 흥분한다고 밝혔었다.
괜히 다급하게 부인할 이유가 없었다. H는 책망이 아니라 기대에 차서 물어보는 것이었으니까.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H의 손을 잡아 바닥에 앉히고 서랍에서 수건을 꺼내 화장실문틈으로 R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나는 H와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화낸 거 기억하지?”
“응.”
H는 고개를 끄덕였다. H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껏 화해했는데 다시 싸우기 싫었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잠시만 레포트부터 찾자.”
나는 레포트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H의 메일로 보냈다.
“메일 보냈으니까 잘 갔는지 확인해봐.”
“응.”
H가 메일을 확인하고 있을 때 화장실에서 옆에 단추가 길게 난 원피스를 입은 R이 나왔다. R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기가 죽어있었다. 얘는 또 왜 이래? 아니 애인이랑 싸운 남자의 집에서 하룻밤 잔 후에 알몸으로 수건을 건네 달라고 애인 앞에서 한다면 이럴 수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R을 위해서 다시 한 번 H에게 사실을 알렸다.
“야. 정말로 R이랑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어.”
H는 R을 바라보았다. R은 H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정황을 보자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법이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도 폭력은 여전히 남아있으니. 그리고 지옥랑은 폭력사태를 일으키면 꽤나 심각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종족이었다.
H는 눈을 가늘게 뜨고 R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단숨에 R에게 달려들어.
“에잇! 에잇! 에잇!”
R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마구 주무르고 간질이기 시작했다.
“에잇! 이 야한 몸 같으니! 이 야한 몸으로 내 남자친구 유혹했지!”
나는 변호해주었다.
“안 했다니까.”
자연스럽게 조금 혹하긴 했지만 안 넘어갔고.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학!”
R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R은 H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종족의 차이는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거대한 살덩어리가 출렁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잠시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H는 R의 허벅지 사이에 자신의 발을 비집어 넣고 양쪽으로 벌렸다. 검은색 끈 팬티가 보이고 R은 얼굴을 붉히며 그것을 가리려고……
이젠 제기랄! 무심코 집중했다!
나는 H의 손을 붙잡고 H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 만. 해. 아무런 잘못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장난으로 그러지 마. 싫어하잖아.”
H는 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R을 놓아주었다. R은 바닥에 주저앉아 원피스를 끌어내려 허벅지를 가리곤 씨익씨익 숨을 골랐다.
H는 R의 등뒤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았다.
“여자친구랑 싸우자마자 다른 여자를 집에 끌어들인 색마.”
“그거 때문에 R이 네가 화내는 걸로 오해한다니까! 그만해!”
난장판이었다.
난장판을 수습하다보니 어느새 R이 강의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난 수업 갈게. 어제 오늘 신세 졌어.”
R의 인사를 H가 받아주었다.
“또 와! 꼭 와!”
“여기 너희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다.”
나는 H에게 핀잔을 주었다. R은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고 내 자취방을 나갔다.
“하아. 지친다.”
나는 이불에 드러누웠다.
“그것도 못할 정도로?”
H는 내 위에 걸터앉았다.
“그건 아니지.”
우리는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저기 있지?”
“응?”
“응……아냐. 아무것도.”
H는 나에게 뭔가를 물으려다가 말았다. 아마 우리가 싸웠던 그 원인과 관련된 이야기겠지. 하지만 어제 오늘 내가 보여준 완강한 모습을 떠올리고 포기한 것이리라.
나는 정말로 H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그 이상 성욕만큼은 정말로 포기해줬으면 좋겠다.
-----another side----
그 날의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4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던 R에게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문자의 발신인을 확인한 R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시했다간 보복이 올 것이 두려워 R은 식은땀을 흘리며 문자를 확인했다.
'내일 1시에 OO역에 있는 UU카페로 나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잠시 후 같은 발신인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또 날아왔다.
'내 코는 절대로 못 속여.'
-----another sid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