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I. 오랜만에 한 판 하자.”
1,2교시 밖에 없는 전공수업이 끝나자마자 남자 동기가 당구를 치는 시늉을 하며 나를 불렀다. H와 R과 노는 모습만 보여주긴 했지만 나도 남자인 친구들이 그럭저럭 있다.
나는 귀에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으응? 뭐라고 했나, 통합수학1에서 D를 받은 자여?”
주위에서 낄낄 거린다. 나에게 놀림을 받은 동기도 함께 낄낄 거리면서 말했다.
“게임에서 진 주제에 돈 없어서 동전으로 간신히 지불하던 네 모습이 아직도 선한데 그런 소리를 하냐?”
오호라. 명백한 도발. 시작은 내가 먼저 했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남자도 아니다.
“게임비에 점심값 얹고 콜?”
“김씨내에서 스페셜 토핑 얹어서 콜?”
“콜.”
남자의 자존심과 게임비, 점심값이 걸린 대결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주물렀다.
“안 돼.”
손길과 목소리로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H였다.
“오늘은 내가 I랑 한 판 할 거야. 너희는 너희끼리 놀아.”
라고 말하며 나에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으며 내 가슴 위를 쓰다듬는다. 뭘 원하는지 너무나도 명백하다.
하지만 남자라면 물러설 수 없는 남자의 자존심과 여러 가지가 걸린 게임이 있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게임은 나중에 하자.”
그래도 게임이 대수냐. 께임!을 해야 하는데.
나는 H를 끌어안으며 남자 동기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남자 동기들은 우우하고 야유를 보냈다. 개중에는 좀 지나치게 야유를 보내는 녀석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강의실을 나섰다.
“머리 쓰다듬어줘.”
아직 학교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지나치게 애교를 부리며 꼬리를 흔드는 H를 보니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남자의 자존심을 시험받을 것 같다.
좋다! 당당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이래 보여도 음마의 아들! 그 어떠한 쾌락의 강행군이 오더라도 얼마든지 받아주마!
거의 전희에 가까운 애정행각을 하며 내 자취방으로 가던 중 H가 물었다.
“집에 그거 많이 남았어?”
“새 거 뜯은 지 얼마 안 됐을 걸?”
“오늘은 왠지 그걸로 부. 족. 할 거 같은데?”
내 귀에 숨을 불어넣으며 이런 소리를 한다. 곧장 편의점에 들렀다. 그것을 사고 혹시 점심 차릴 시간도 없을 수도 있으니 점심 도시락도. 그리고 갑자기 새로운 발상이 떠올라 생크림이랑 젤리도. 수분보충은 당연히 잊으면 안 되고.
으르르릉! 오늘의 나는 완전히 한 마리의 짐승이여! 그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아, 잠시만 엄마한테서 전화 왔어.”
보급물자들을 계산을 하고 있을 때 H가 전화를 받고 편의점에서 나갔다. 어째 좀 불길한데.
“봉투값 20원인데 괜찮으세요?”
“잠시만요.”
나는 편의점 밖에서 전화를 하는 H를 바라보았다. H는 이리 저리 왔다갔다하며 통화를 했다. 그리고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거나 다리를 강하게 굴렀다.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귀와 꼬리를 축 늘어트리는 것이다.
어. 안 돼! 오늘 나 확실하게 발동 걸렸는데!
터덜터덜 H가 편의점에 들어왔다. H는 무기력하게 내 팔에 이마를 문지르며 고백했다.
“미안. 오늘 엄마가 가족모임 할 게 있으니 당장 들어오래.”
만약에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로마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했던 카르타고의 외눈박이 명장은 그 절망을 어떻게 견뎠을까?
지하철역까지 H를 바래다주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한계까지 달아올랐던 몸은 아직도 그 여열에 고통 받고 있었다. 집에서 혼자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썩 만족스럽지는 못할 것 같았다.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오늘.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돌아갈 때 톡이 왔다. H다.
‘미안.’
내가 어떻게 답을 할지 고민할 때 H의 다음 톡이 날아왔다.
‘직접 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대신 이걸로라도 해줘.’
뭘? 이라고 의문을 떠올리고 있을 때 사진 몇 장이 날아왔다.
겁나게 야한 H의 사진이.
윽. 왠지 무릎을 꿇거나 어딘가에 앉아있지 않으면 안 되는 병에 걸린 것 같다. 나는 폰을 품에 넣고 구석에서 신발끈을 풀고 묶는 것을 반복했다. 충분히 가라않, 아니. 아니. 신발끈을 모두 묶은 후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현명해지는 시간을 가지자. 빨리. 빨리. 빨리.
집에 도착하니 숨이 가빴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집의 비번을 입력했다.
도어락이 풀리고 나는 재빨리 집 문을 열었다.
R이 있었다.
셀카를 찍는 R이 있었다.
알몸으로 셀카를 찍는 R이 있었다.
나는 즉시 집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만약에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다.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이……아니구나. 물을 수 있구나.
나는 문 너머에 있는 R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가쁜 숨을 심호흡으로 안정시킨 후에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야. 야.”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흠흠하고 목소리를 정돈하고 다시 말했다.
“야. 들어가도 되냐?”
“으. 응. 들어와.”
다시 심호흡. 그리고 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천천히 집문을 열어 안을 살폈다.
R이 있었다.
옷을 입고 있는 R이 있었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날개만큼이나 붉은 얼굴을 한 옷을 입고 있는 R이.
나는 낯선 사람의 집에 처음 들어가는 것처럼 어색하게 우리 집에 들어갔다. 먼저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로 목과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R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R을 바라보았다.
R은 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물어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궁금하긴 한데 물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R이 고개를 획 돌려 나의 멱살을 잡았다. 거의 울상이 된 R은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물어봐! 빨리! 무슨 일이냐고! 이상한 짓 한 거 아니니까! 어서! 궁금하잖아! 빨리 물어봐! 쪽팔리니까!”
“어. 어. 어! 어! R! R! 무슨 짓 했어! 뭐 때문에 우리 집에서 알몸 셀카 찍고 있었어? 너 변태야? 인터넷에 올려? 인터넷 유명인이야?”
“아냐!”
“그런데 왜?”
“비행과 일이야!”
“어? 협박받는 거야? 아니면 비행과에서 그런 짓을 시켜? 신고할까?”
“아냐!”
“좋아서 자진해서 하는 거야?”
“이익!”
R은 나를 밀쳤다. 내가 뒤로 넘어가자 R은 내 배 위에 올라타고 베개로 나를 때리며 말했다.
“아냐! 아냐! 아냐! 닥치고 내 말 들어!”
“알았어! 알았어! 야 알겠다니까!”
간신히 진정한 R은 내 위에 올라탄 채 허덕거리며 전후사정을 말했다. 나는 R밑에 깔린 채로 허덕거리며 내가 들은 것을 확인했다. 음. 왠지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큰 의미는 없다.
“그러니까. 비행과에서 고난도 실습일정이 나와서 그거 신청하기 전에 네 몸 밸런스를 확인하고 있었다고?”
“그래.”
“그거 전문가가 따로 안 해줘?”
“그건 실습 신청 후에 본격적인 실습 전에 하는 거고. 이건 자가진단”
“그런데 그걸 왜 우리 집에서 해?”
“경쟁률 높은 실습은 금방 정원이 차니까! 우리집은 멀고! 너희집은 가깝고!”
“왜 알몸?”
“근육이랑 뼈, 날개에 이상 생겼는지 눈으로 확인하려면 옷 벗어야지! 당연히! 넌 그것도 몰라!?”
“여기 우리집인 거 까먹었어? 내가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리고 지금 상황 봐.”
“금방 찍으면 될 줄 알았는데 혼자서 찍으니까 제대로 안 찍혀서 계속 새로 찍어서 그렇다, 왜! 그리고 네가 집에 와도 그렇게 금방 들어올지 몰랐지!”
음. 평소보다 훨씬 서두른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
모든 오해를 푼 후에 R은 내 위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붉은 얼굴로.
나는 똑바로 앉은 후에 물었다.
“음. 그러면 잠시 나가줄까?”
우리집이지만. 이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다. 그리고 빨리 찍고 나가줬으면 하고.
“……어줘.”
작은 목소리로 R이 뭐라고 말했지만 너무 작아서 못 알아들었다.
“뭐?”
“찍……어줘.”
작은 목소리로 R이 뭐라고 말했지만 너무 상식에 어긋나서 못 알아들었다.
“뭐?”
“이씨!”
R은 다시 나를 밀쳤다. 내가 다시 뒤로 넘어가자 R은 다시 내 배 위에 올라타고 다시 베개로 다시 나를 때리며 말했다.
“찍어! 날! 찍어줘! 찍어줘! 내 사진 찍어줘! 혼자 찍으니까 계속 잘못 나오니까 시간 걸린다고!”
“야! 야! 야! 아파! 베개도 아파! 알겠어! 알겠다고!”
R이 내 등 뒤에서 말했다.
“돌아보지 마.”
난 벽을 본 채로 말했다.
“어차피 보게 될……”
베개가 날아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이건 내 잘못이니까 항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 천이 날개에 스치는 소리, 천이 몸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 몸을 흔드는 소리. 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그리고 한숨소리가 들렸다.
내 안에서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도 들렸다.
“하아.”
다시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안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저건 R이다. 저건 R이다. 저건 R이다. 동성친구보다 더 허물 없는 R이다. 허물 벗은 R이……아니 지금 그건 말하지 말고. 저건 R이다. 저건 R이다. 저건 남자를 유혹하기 최적의 몸……닥쳐.
“이제 돌……아.”
“하아.”
한숨소리. 이건 내 거다.
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R이 있었다. 몸에 인공적인 것은 하나도 걸치지 않은. 붉은 날개 달린 팔로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린. 부끄러움으로 인해서 한껏 붉어진 얼굴과 눈물이 맺혀있는 붉은 눈. 그리고 긴장으로 인해 미약하게 떨리는 몸.
아름다웠다. 그리고……야했다.
“직접 보지 마! 카메라로 봐!”
R은 성을 냈다. 나는 R의 요구에 따랐다. 카메라를 통해 R의 몸을 보았다. 여전히 아름다웠고……여전히 야했다.
“절대로 실수하지 마. 제대로 찍어.”
그렇게 신신당부한 R은.
양팔을, 양날개를 천천히 펼쳤다.
촬영이 끝났다.
“으으으으.”
옷을 입은 R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슬그머니 R 옆에 두고 벽을 바라보았다.
무념무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거기에 점이 있었구나.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생각보다 근육이 있구나.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야했다.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예쁜 색이었지.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척추 라인이 예쁠 수가 있구나. 착한생각. 착한생각. 땀이 에로 했지.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직접 보니 훨씬 컸지.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그런 포즈로도 찍는구나.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비행을 하다보면 그런식으로 다리를 벌리기도 하는구나.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착한생각.
어머니 생각.
머릿속이 순식간에 평온을 되찾았다.
부끄러움과 R의 몸은 여전히 뇌리에 박혀있었지만 정욕은 참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졌다.
나는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꺼내 R에게 내밀었다.
“자. 마셔.”
R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붉었다. 내 얼굴을 보던 R은 울상이었다.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R의 얼굴도 평온을 되찾기 시작했다.
“고마워.”
R은 맥주를 받았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끄윽! 확인 안 해?”
“해야지.”
R은 카메라 뷰파인더로 자신이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하지만 부족한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다.
“컴퓨터로 확인해도 될까?”
“응. 나가줄까?”
“……이미 전부 다 봐놓고선. 그냥 내 쪽만 보지 마.”
R은 디지털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하여 자신의 사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등을 돌린 채로 기다렸다. 그러다가 물었다.
“다시 찍을 필요는 없지?”
“왜? 다시 찍고 싶어?”
장난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어색하게 말고. 평소처럼 대화를 하고 싶다는 신호였다.
“진짜? 말만해!”
그리고 나도 거기에 응답했다.
“변태!”
“남의 집에서 알몸으로 셀카 찍는 누구 씨가 할 말은 아닌데?”
잠깐의 음담패설 후에 우리는 평범한 일상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학교 정문 굴다리에 있던 떡볶이집 망했더라.”
“망할 만 했지. 난 지금까지 버틴 게 더 신기하더라. 100m근방에 이미 5곳이나 있던 레드오션에 무슨 배짱으로 열었는지 몰라.”
“대신 카페 들어선다던데?”
“그건 또 무슨 배짱이야? 카페는 옛저녁에 두 자리 수 찍었는데.”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 후에 R이 모든 확인을 끝냈다.
“응. 다 끝났다.”
“선생님. 저희 R은 어떻습니까? 괜찮을까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하아. 어떻게 말씀 드려야할지.”
나의 상황극에 R은 즉시 맞춰주었다. 역시 좋은 친구. 재미있는 친구다.
“‘너무 예쁨 병’에 걸려버렸습니다. 이게 불치병인지라.”
“아서라.”
나는 정색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내 반응에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R도 내가 웃자 따라서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은 후 먼저 웃음을 그친 R은 컴퓨터와 카메라에서 자신의 사진을 지웠다.
‘야. 몇 장은 남겨둬.’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참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진짜 잘 참았다. 어색해지는 농담 아닌 농담이 되었을 테니까.
R은 꼼꼼히 확인한 후에 말했다.
“응. 이상 없음. 제일 고난도 실습에 지원해도 될 정도.”
그렇게 말한 R은 빈 맥주병을 들고 현관으로 갔다.
“나는 이만 가볼게. 계속 있으려니까 좀 쑥스럽다.”
“뭐. 조심해서 들어가라. 원하는 실습에 꼭 지원하고.”
“응. 고마워. 그리고…….”
현관문을 연 R은 머뭇거렸다.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R의 입이 열렸다. R의 턱이 잠시 떨리더니.
“내. 내 모습 떠올리고 자위해도 오늘은 용서해줄게!”
라고 외치고 문을 쾅 닫은 후에 도망쳐버렸다.
혼자 남겨진 나는 잠시 R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의미로 생각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난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아마 진담 반 농담 반이겠지. R과 나의 사이를 생각해보면.
나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일은 별로 없지만 심적으로 긴장을 많이 해서 진이 다 빠졌다.
무의식적으로 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H가 보낸 사진을 발견했다. 이거 때문에 내가 일찍 집에 들어온 거였지, 참.
나는 H가 보낸 셀프누드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R의 알몸을 찍었던 것을 생각했다.
사건의 유사성이 왠지 두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H가 R에게 사주하여 나를 유혹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진심으로 부끄러워했던 R의 태도를 생각하면 진짜로 우연히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으면 좋겠다.
만약 H가 R에게 나를 유혹하라고 사주했다면.
나는 더 이상 H를 사랑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R은……. H가 R에게 사주를 했다면 R도 내가 연인 외의 다른 여자와 자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겠지. 안 그랬다면 이런 식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유혹을 했겠지. 그렇다면 나는 연인뿐만 아니라 소중한 친구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H에게 미리 확실하게 내가 다른 여자와 자는 일을 싫어한다고 다시 말해야겠다. 확실한 경고와 함께.
어떻게 해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확실하게 경고를 할 수 있을까?
……일단 잠시 정신집중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처리하고 생각해볼까?
----another side----
“R. 여기야.”
H는 식당에 들어선 R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R은 H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땠어?”
H는 물었다. R은 얼굴을 붉히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했구나.”
“……응.”
H는 연인인 I에게 알몸을 보여주었다는 R의 말에 기뻐했다. 그녀가 바라는 상황이 점점 더 갖추어지고 있었다. 연인이 다른 사람과 자는 상황. 그녀의 이상성욕.
“하, 하지만 이게 소용 있을까?”
“있지.”
“확신해? I보니까 처음에 당황하긴 했어도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던데?”
“그래? 뭐. 그래도 결국엔 먹히게 되어있어.”
“어떻게 확신해?”
“이거 때문에.”
H는 자신의 폰을 꺼내 R에게 보여주었다. R은 폰을 보았다. 그곳엔. H가 I에게 보냈던 누드 사진이 있었다.
R은 그 사진을 보고 한층 더 얼굴을 붉히며 H를 바라보았다. H는 폰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오늘 수업 끝나고 I를 잔뜩 달아오르게 만든 후에 못하게 되었다고 실망시키고 와버렸거든. 그 이후에 보낸 게 이 사진. 아마 내 생각이지만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어?”
“그게 너 때문이었어?”
“맞구나. 그리고 그 이후에 본 게 네 모습.”
H는 탁자 위에 양 팔을 얹으며 말했다.
“지금 쯤 I는 열심히 자기 위로 중일 걸? 그런 I가 내 사진을 보면서 네 생각을 하나도 안 할까? 내 사진만으로만 자기 성욕을 풀고 있을까?”
“하, 하지만 네가 내 사진은 전부 지우라고 했잖아.”
“응. I가 우리가 공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싫어 할 테니까. 일부러 흔적을 남기면 의심할 확률이 올라갈 거야.”
H는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I머릿속의 네 알몸은 완전히 지워졌을까? 아마. 눈으로는 내 사진을 보면서 한 편으론 네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걸?”
그 말을 들은 R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리고 뱃속에서 뜨겁고 눅진눅진한 것이 녹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호흡에서 단 내가 섞이기 시작했다. 홀로 자신을 위로할 때와는 다른 성적인 충족감이 느껴졌다. I앞에서 알몸으로 사진을 찍었을 때의 그 흥분감이 다시 그녀를 엄습했다.
H는 그 모습을 보고 가늘게 눈을 떴다.
“조건반사라고 알아?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조건을 주면 나중에는 특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특정한 조건만으로도 특정한 상황의 반응을 보이는 것. 이런 식으로 천천히 마음속 거부감의 장벽을 낮추고 정욕을 늘리는 거지. 그리고 그 거부감의 장벽이 정욕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H는 R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는 서로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될 거야.”
----another sid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