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side----
H는 울었다. 오랫동안 마음고생 했을 게 분명하면서 내색하지 않았던 친구를 동정하여 울었고, 그런 친구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에 울었고, 우는 친구가 가여워 울었고, 연인을 정말로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상실감과 고통에 울었다. 이게 평소 H가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감정적인 면.
그러는 한 편. R이 모략가라고 불렀던 H의 이성적인 면은 지금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또 실수했다. I에 대해서만 신경 쓰다가 R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했다. R이 어떤 심정인지, R이 얼마나 I를 좋아하는지, 사랑하는지 과소평가했다. R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만둘까? 아니다. 이제는 R 스스로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친구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I가 외도를 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을 R도 알고 있기에 이제 노골적으로 몸으로 유혹하는 짓은 자제하겠지만 정서적으로는 더욱 가까워지려고 할 것이다. 이제 정말로 I의 연인이 되려고 할 것이다.
견제할까? 그만두라고 말할까?
“미안해. 미안해. 흑!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H. 나.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미안해. 미안해.”
……안 돼. 못하겠어. 잔인하잖아. 필요에 따라 끌어들이고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니 견제하려는 짓이. 이미 친구에게 몹쓸 짓을 해놓고선 더 이기적으로 굴라고? 그리고 이제는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R도 그만두지 않을 텐데? 그리고 너무 심한 방법을 쓰면 R도 I에게 내가 부추겼다고 말할지도 모르는데? 다른 방법은?
H의 모략가는 머리를 굴렸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정당당하게 방어를 굳건하게 굳히는 것. I와의 애정을 돈독히 하는 것. 그것뿐.
방침이 정해지자 할 일이 없어진 모략가 H가 물러났다. 이제 남은 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H.
H는 R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사과했다.
“미안해. R.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을 했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연인을 유혹해달라고 부탁했던 여자와 연인이 있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했던 여자는 끌어안고 서로에게 사과를 하며 한참을 울었다.
사과하는 목소리도 미약해지다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고, 눈물조차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 H는 R을 바라보았다. R은 잠들었다. 그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가슴에 고여 곪아있던 감정을 모조리 토해낸 덕분인지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H는 소매로 R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 얼굴도 꽤나 만만치 않은 상태겠다고 생각하고 반대쪽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닦았다.
한참 궁상을 떨고 남은 건 지독한 피로감이었다. 따뜻한 잠자리 외에는 다른 건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H는 잠든 R을 등에 업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함에 약간 위기감을 느꼈다. H도 작은 편은 아니지만 R과 비교하면 납작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가슴이라면 H가 해주지 못하는 것을 I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무심코 I의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 H는 문득 이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다. 잠시 생각한 후 H는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한참을 울어 얼굴이 엉망인 지옥랑족 여자가 역시나 한참을 울어 얼굴이 엉망인 적익족 여자를 업고 있으니 꽤나 궁금증이 생기긴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을 쓸 기력도 없었다.
H는 개찰구를 통과하고 지하철을 기다렸다가 지하철을 탔다. 다행히 빈 자리가 나란히 있어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타고난 후 원하던 역에 도착했다.
H는 개찰구를 통과하고 역 밖으로 나가 잠시 헤맨 후에 목표하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R. R. 너희 집에 도착했어.”
“응? 으응.”
R이 자취하는 오피스텔에 도착하자 R을 흔들어 깨웠다. R은 잠시 H의 등에서 뭉그적거리다가 내려왔다. 그래도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비틀거리는 R을 H가 붙잡았다.
R은 크게 하품을 한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집이네?”
“응. 내가 여기까지 업고 왔어.”
“고마워.”
“뭘, 친구끼리. 난 그러면 갈게. 들어가.”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피로 때문에 R은 H가 왜 여기까지 바래다주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H는 R에게 손을 흔들고 작별인사를 한 후에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I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지친다.”
I의 자취방에 도착한 H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 운동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참을 울고 감정을 소모한 것 때문에 몸에도 피로가 쌓였다.
“참 팔자도 좋다.”
I의 자취방에 들어서니 하다만 술판과 태평스럽게 자고 있는 I가 보였다. 연인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 남자 하나 때문에 두 여자가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는데.
심술로 I의 엉덩이를 빵 차주고(그래도 안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정이 힘 조절을 시킨 게 분명하다. 아니면 I가 술에 진탕 취했던가.) H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와. 진짜 엉망이네.”
거울을 보니 얼굴에 화장이 눈물로 번져 있고 눈 주위는 붓고 붉었다. 이런 얼굴로 사람들 앞에 돌아다녔던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 상태를 알고 있는 지금 이대로 밖에 나가라고 한다면 ‘차라리 날 죽여!’ 라고 외치고 싶어질 얼굴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한 후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래도 아직 운 흔적이 남아있었다. 내일까지 원래대로 돌아와야 할 텐데.
눈 주위를 마사지 하고 피부를 진정시키는 팩을 붙이고 화장실에서 나오니 팔자 좋으신 남자친구는 잘 주무시고 계신다. H는 심술이 동해서 이부자리를 깔고 I의 옷을 전부 벗겨 알몸으로 만들어 이부자리위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도 잠시 후에 팩을 떼고 옷을 전부 벗은 후에 I의 배에 등을 붙이고 누웠다.
내일 아침에 연인을 놀래켜줄 말들을 생각하며 H는 잠이 들었다.
----another side end----
휴대폰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끄으으으으으으응!”
머릿속과 위에 휴대폰을 넣고 진동을 일으킨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오! 숙취!
그리고 곧 부드러운 감촉이 몸 앞쪽에서 느껴지는 것을 알아챘다. 힘겹게 눈을 뜨니 검은 머리와 뾰족한 귀가 보였다. 혹시 몰라서 손을 뻗어 확실하게 체크했다. 음. 이 크기, 이 감촉, 이 모양, 이 위치. H의 가슴이로군.
그런데 왜 우리 둘 다 알몸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할 일은 정해졌군. 어제 못했던 급했던 것을 오늘 해버려야지.
일단은 전화부터 받자.
엉금엉금 기어서 이불에서 나와서 휴대폰을 찾았다.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을 보니……어머니다.
나는 즉시 통화버튼을 누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들!”
으악! 내 골!
“무슨 일 있어? 엄마 전화 못 받을 정도로 안 좋은 일 있어? 몸은 괜찮아? 어디야? 나쁜 일이야? 지금 엄마가 올라갈까? 아들? 아들? 대답도 못할 정도야?”
어머니의 사랑이 뇌 주름을 쿡쿡 찌른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대답했다.
“아뇨. 숙취 때문에요. 지금 일어났어요.”
“또? 나쁜 애들이 술 마시자고 꼬셨니? 지금 엄마가 올라갈까? 그 애들 혼내줄까?”
그 애들 만나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어머니.
“끄윽! 아뇨. 그냥 친한 친구들이랑 마셨어요. 어머니는 어디세요?”
“집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울리니? 어디 감금 된 거니? 지하? 경찰에 신고할까? 기다려!”
우리 어머니는 진짜로 하실 분이다. 나는 급히 말했다.
“아뇨. 아뇨. 화장실요. 지금 숙취 때문에 토할 거 같아서요.”
“애들이 싫다는 너한테 억지로 먹였니? 그런 애들이랑 절교하렴!”
이런 식으로 20분 동안 어머니를 진정시킨 후에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 주 평일에 올라갈 건데 언제 시간이 나니?”
“수요일에 1, 2교시 수업밖에 없어서 한가해요.”
“그러니? 그러면 수업 빼고 아침점심저녁 같이 먹자.”
“……원래는 수업은 절대로 빠지지 말라고 하셔야하는 거 아닌가요?”
“아들은 수업이 중요하니, 엄마가 중요하니!”
애인한테 들어도 곤란할 이야기를 어머니께 듣네요!?
“어머니가 더 중요하죠. 하지만 전공필수라서 빠지면 나중에 그거 보충한다고 시간을 써버리면 어머니랑 같이 더 오래 못 있잖아요. 곧장 내려가는 아니시죠? 수요일에 보고 나중에 또 보면 되잖아요. 딱 2시간만 들으면 돼요.”
다행히 정답인 대답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으셨다.
“응. 알겠어. 그러면 기다릴게. 그런데 아들. 엄마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예.”
“여친 생겼니?”
폰 너머에서도 음습함이 느껴졌다.
“아직요.”
또 거짓말 하는 걸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들키면 제 여친 엄청 쪼으실 거잖아요. 심지어 이번에는 올라오시잖아요. 그리고 제 여친도 한 성격해서 절대로 가만히 안 있는다고요! 살려주세요.
“어휴. 진짜. 요즘 애들도 참. 걱정마, 아들. 아들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멋진 건 엄마가 다 아니까.”
왜 두 번째냐고? 첫 번째는 아버지.
어쨌든 어머니를 안심시켜드린 후에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밭에 계세요?”
“응. 지금 밭에. 왜 바꿔줄까?”
“아뇨. 그냥 여쭤봤어요.”
“아. 그러고보니 너 만날 때 사역술과 관련해서 물어볼 거 목록정리하시던데 아는 교수님 중에 그쪽 전공하시는 분계시니?”
“그거 심화과목이라 아직 안 들었어요. 일단 교수님 찾아볼게요.”
“응. 또 용건 있니?”
“아뇨.”
“할 말 있니?”
“아뇨.”
“정말로?”
기대와 실망이 섞인 목소리다. 음. 여기선.
“싸랑~해요.”
옛날 트로트 가수가 할 법한 느끼한 목소리와 말투로. 조금 부끄럽긴 하다. 아니 많이.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나도 싸랑~해요. 우리 아들.”
그래도 이번에도 정답. 부끄럽긴 하지만!
“수요일에 봐. 벌써부터 기대되네.”
“네, 기다릴게요.”
“몸 조심하고. 하지만 수요일은 아파도 돼. 엄마가 하루 종일 수발들어줄게.”
“기대해야할지 안심 시켜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수요일에 봬요.”
“응. 들어가.”
쪽!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수분을 보충하며 H를 보았다. 아직도 자고 있었다. 별일이네. 술 마신 다음날에는 보통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데. 설마 나 자는 동안 뭐 했나? 둘 다 알몸이…….
나는 섬뜩함을 느끼고 내 아랫도리를 만졌다. 흠. 다행히 힘을 쓰면 응당 남을 흔적은 없었다. 탄창도 만발 상태고.
설마 나 H한테 부축 받을 때 토했나? 아닌데? 토사물 냄새도 안 나고 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뚜렷하게 기억하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H밖에 없었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변기에 앉았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았다.
“이런 씨발.”
욕이 튀어나왔다. 다시 돌이켜 보았다.
“이런 씨발.”
다시 욕이 튀어나왔다.
어제 R과 단 둘이 남았을 때 R과 했던 대화 R에게 했던 짓이 모두 떠올랐다. 맨 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음담패설과 행동들을 술기운으로 해버린 것을! 전부!
병신아. 병신아. 병신아. 도대체 무슨 소리 무슨 짓을 한거냐! 응! 친구한테! 응! R한테! 응!
그리고 내 주니어. 너는 왜 지금 눈치도 없이 불끈해지냐! 응! 분명히 개쩌는 느낌이긴 했는데 지금은 이러지 말자. 응!
“아오 씨발.”
그리고……그 행위들을 전부 끝내고 눈을 감고 누워있을 때 R이 했던 행동과 말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좋아해.’
나는 이마를 쓰다듬었다.
R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이마에 부드러운 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만약 이 부드러운 게 내가 예상하는 그것이라면……이러면 ‘좋아해’가 엄청나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최근 R이 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했고. 이런 저런 것들을 고려해보면……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음.
“……나 어쩌면 좋냐.”
아니. 뭐. 그냥. R도 친구로서 좋아한다고 말한 거겠지.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하.
“…….”
내가 진짜 빡대가리라도 그런 생각은 안 하겠다.
정황증거를 보자.
알몸 사진 찍어주는 거? 상황이 급박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긴 하다.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마사지 해주는 거?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이것도 가능한 일이겠지.
맨 가슴을 마사지 해주는 거? 애무에다가 음담패설까지? 친구끼리라면 가능할 수는 있겠지. 그 친구가 섹스프렌드라면 말이다.
그리고 내가 반쯤 잠들었을 때 좋아한다고 말하고 이마에 입을 맞춘 거라면……R이 나에게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 그러면 나는 어떤가?
나는 R을 좋아하는가? YES! 100%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친구로서……아냐, 지금 상황에서는 거짓말이나 그릇된 판단은 위험하다. 좀 더 정확하게 구별하자.
친구로서……좋아한다. 그렇긴 하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죽이 잘 맞고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통보 없이 우리집에 와도 ‘어 왔냐?’라는 식으로 당연하게 생각을 할 정도로.
자 좀 더 나아가자. 정욕을 품고 있는가? R을 보면 야한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 자주 접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R이 매력적인. 정말로 매력적인. 리얼 야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긴 하다. 얼굴 예쁘지, 가슴 크지. 엄청 크지. 반면에 군살은 적어서 허리는 잘록하지, 골반은 발달했지. 허벅지는 통통하지. 가슴은 만지는 느낌이 엄청 끝내주지. 최근에 겪은 일들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오케이. 내 불끈이도 동의하는 군. 그런데 넌 잠시 쉬고 있어라. 뇌에 갈 피를 빼앗아가잖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판단할 요소가 부족하다.
자. 좀 더 생각해보자.
친구가 아닌. 그 다음 단계에 도달할 정도로 좋아하는가? 좀 더 명확하게 하자. R과 연애를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가? ……인정하자. 그렇다. R에 대한 호감이 친구를 넘어서 연애를 해도 될 최소치는 예전에 넘었다. R이 나에게 고백한다면 즉각적으로. 아니 우리 사이를 생각하면 장난스럽게 놀리면서 확고하게 긍정의 대답을 할 정도로. 그리고 R이 안 해도 내 쪽에서 어떻게 해야 R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받을 수 있는 고백을 할 수 있을지 궁리를 할 정도로.
……만약에 내가 H와 사귀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판단의 요소가 부족하다. 내가 R을 이 정도로 좋아한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를 해볼 정도로 좋아는 하고 있었다. 자 좀 더 그 위까지 도달하는 지 생각해보자.
어떤 식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OK. 이 질문이 좋겠군.
만약 R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
지금 엄청 좆같았다. 상상만으로도 좆같았다. 이걸로 내가 R에게 독점욕이 생길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안 이랬던 거 같은데. 나와 H의 연애행각에 R이 야유하면 ‘억울하면 너도 남자친구 사귀던가.’라고 놀려도 아무런 감정이 안 들었다. 가끔씩 R에게 ‘남자 소개 시켜줄까?’라고 아무런 생각 없이 묻기도 했었다.
……‘좋아하는 남자 없냐?’라고 묻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R은 ‘너’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R에게 잔인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좀 많이 설렜다.
지금 R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단순한 정욕이 아니라 정서적인 이유로 신체를 부대끼고 싶다. 이렇게 된 이유는 최근에 있었던 여러 일과 R이 나를 LIKE가 아닌 LOVE로서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면 마지막 질문.
H와 R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가? ……H다. 연인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들, 연인으로서 보낸 시간이 쌓아서 만든 애정이 있는 이상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애정이 식는다면 모를까 나와 H사이는 아직도 활활 불타고 있다. 이게 꺼질 정도로 H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이 애정의 순위는 역전되지 않을 것이다.
“…….”
그래도 나는 R이 좋다. 친구이상 연인미만? 그렇다면 난 거의 연인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 그건 R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나에겐 이미 연인인 H가 있다. 그리고 그건 R도 알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된 고백도 못하고 술에 취해서 골아빠진 것처럼 보였던 나에게 그런 식으로 호감을 표한 것이겠지.
“아, 진짜.”
설레잖아. 다시 생각하니 진짜 설레잖아. 한층 더 좋아지잖아. 완전 순애보 진짜. 평소에는 활기차게 아무렇지도 않게 굴면서 내가 인사불성인 상태가 되니까 그런 식으로 몰래 고백하는 거 완전 좋잖아. 그리고 알몸 보여주고 마사지도 하게하고 가슴도 주무르게 했으면서 정작 자기는 입술도 아니고 이마에 키스? 겁나 귀엽습니다. 연애 초기에 느낄 법한 신선하고 풋풋한 사랑이 느껴진다.
H와 연애를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이다. H와는 첫날부터 딥키스에 바로 다음날 성교를 했으니. 아니.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H와 이런 식으로 연애를 하는 게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쪽이 더 내 본성에 맞으니까.
그래도 R의 행동에 엄청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
그런데 어이 마이 주니어, 너는 왜 눈치도 없이 여기서 고개를 쳐드냐. 지금은 에로스가 아니라 플라토닉이 넘치잖아. 지금은 쉬고 있어.
“하아.”
그러나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미 H의 연인이다. R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지는 않나? H가 얼마 전에 나한테 자기 친구랑 성교해달라고 부탁했었지? 그걸 생각하면 R과도 사귀어도 괜찮지 않을
‘미안해. 이런 엄마라서. 왜 나는. 왜 음마로 나서. 싫어 이제는. 싫어. 내가 싫어. 미안해요. 으. 으으으으으으으으으.’
“제기랄.”
내 생에서 가장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그러나 절대로 잊어선 안 될 기억이 자기 멋대로 달아오른 머릿속에 차가운 물을 부었다.
머리가 차가워지고 감정이 식었다. 방금 전까지 내 안에서 멋대로 만든 선문답이 한심하게 보인다.
내가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유아적인 낙관론이다. 세상이 내 편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에 관한 문제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더 큰 이유도 있다.
“쓰읍! 후우!”
심호흡을 하고 다시 처음부터 점검한다.
R이 나를 LOVE적인 의미로 좋아하는 건 맞는가? 이건 맞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나는 R을 LOVE적인 의미로 좋아하는 건 맞는가? 지금은 맞다. 하지만 얼마나 LOVE한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것일 수도 있으니.
H를 R보다 사랑하는가? 그렇다. 이견 없음.
그러면 난 R과 사귈 수 없다. 양다리나 바람을 피울 수는 없다.
음마이시지만 음마답게 방종한 생활을 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하셨던 어머니. 하지만 그로 인해 생명이 위험해지고 결국 다른 남자……나에게서 흡정을 하시고 자기 자신을 비관하여 자살기도까지 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외도를 할 수 없다.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아서 내가 방종한 생활을 한다고 어머니께서 생각하시게 할 수는 없다. 어머니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시게 할 수는 없다. 내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러면 문제는 하나만 남는다.
앞으로 어떻게 R을 대할 것인가?
미리 R에게 너의 마음은 받아줄 수 없다고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R도 몰래 고백한 것을 보면 자신도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지적하면 R과 서먹해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H가 알게 된다면 기껏 해 둔 경고에도 불구하고 R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하며 R을 부추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R의 고백을 모른 척해야하나? 하지만 이러면 어제처럼 내가 자제력이 부족해진 상황에서 R이 유혹을 하면 내가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상황에 H가 있다면 이 때에도 H가 부추길 수도 있다.
망할. 하필 H의 이상성욕이 내가 극도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거라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나 어쩌면 좋냐.”
어느 쪽이든 제대로 된 답 같지 않다. 최선을 고르는 게 아니라 차악을 고르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에 머리가 둔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잠시 현자가 되는 게 도움이 되지. 마침 현자가 되게 도와줄 H도 집에 있겠다.
나는 화장실을 나와 H의 모습을 살폈다. 아직도 자고 있다.
나는 이불 속에 들어가 H의 등 뒤에 누워 H의 꼬리를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던 꼬리가 내 손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조금 기다리니 파닥거림으로 변한다.
“으흐흐흥.”
H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돌아 나를 보았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다. 하지만 표정만으로 색기있는 미소를 만들어 낸다.
“우리 강아징 기다리라고 했는데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용?”
잠겼지만 애교와 색기가 흐르는 목소리다. 나는 H의 쇄골을 송곳니로 갉작였다.
“우구구구구구구. 우리 강아지의 강아지도 아침부터 활기차네.”
H는 내 머리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응!”
H는 크게 기지개를 킨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침햇살이 H의 몸을 비춘다. 언제 봐도 멋진 몸이다. R과는 다른 의미의 육체미로 이루어진 몸이다. 적당한 포즈를 취하고 그대로 석상을 만들면 예술작품이 될 균형과 황금비.
“아직은 안 돼. 기다려. 샤워한 후에 잔뜩 귀여워 해줄게.”
H는 내 턱밑을 긁어주곤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물소리가 들렸다.
기다리라고? 더 이상은 안 돼.
나는 화장실로 쳐들어갔다.
“꺄하하핫! 우리 강아지가 짐승이 됐네.”
“크르르릉. 못 참겠다.”
“어쩔 수 없네. 이리와.”
나와 H의 이번 주말은 짐승처럼 식욕, 수면욕, 배설욕, 성욕을 해소하는 데에만 소모되었다.
중간 중간에 잠시 현자처럼 지혜로워지는 시간동안 R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짐승이 되었던 시간 중 일부는……R의 몸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서라도 빨리 R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려야겠다. 그런데 누구한테 도움을 받아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