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첫 번째 소원은 악마님이 팬티 차림으로 있는 거예요. 저는 게임 할 때도 항상 제 캐릭터의 옷을 다 벗긴 채로 진행하거든요!”
나는 현자가 말했던 여자를 찾아 1주일간 관찰했다. 역시 현자가 찾은 여자가 아니랄까봐 골이 빈 여자였다. 내가 이 일을 거부하면 내가 그동안 부정을 저지르면서 번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협박이 있었기에 나는 용기를 내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서 여자 앞에 나타난 결과가 이 모양이다.
지금 이 곳은 이 여자가 사는 대저택의 접대실이다.
이 여자 진심인가.
이 여자가 깡통 차기 하는 애들의 깡통을 몰래 다른 깡통으로 바꿔치기할 때부터 알아봤다. 바꿔치기 해둔 깡통엔 아직 음료가 들어있었고 그걸 찬 애는 옷이 젖었다. 이 여자가 그 애한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가가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 새 옷을 빌려주고 보내줬을 때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 여자는 미쳤다.
상의 단추를 풀고 멜빵바지를 벗고 신발을 벗자 여자는 나를 멈추게 했다. 아직 선글라스와 하얀 양말을 안 벗은 상태였다.
“그 정도면 됐어요.”
“고객님, 제가 아직 양말은 안 벗었는데요?”
“지금 딱 그대로가 좋아요. 지금 이 모습인 악마님이 절 덮치는 상상을 오늘 밤에 할 건데 이건 소원으로 안 빌어도 되죠? 저도 그 정도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거든요.”
나는 도넛을 씹기 시작했다.
“아직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구개의 소원이 남았습니다, 고객님. 말씀드렸듯이 이 모든 소원들이 공짜이니 편하게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에잇, 재촉하면 못 써요! 저는 소원 하나 하나 소중이 빌 거라고요. 그것이 저를 위해 봉사하시는 악마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저기요, 고객님. 저를 이런 식으로 기다리게 하시면 곤란해요. 저희 집에 천사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다고요. 제가 없으면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답니다.”
“자식 없으시잖아요.”
나는 등줄기에 차가운 땀을 느꼈다. 이 여자가 그걸 어떻게 간파했을까? 악마에게 거짓말이란 숨 쉬는 것과 같다. 어느 인간도 악마의 말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그 진위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이다.
“악마님이 거짓말 하시면 저 고리가 새파랗게 질려요. 그래서 거짓말인 걸 알았어요.”
나는 도넛을 땅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쩐지 사탄이 나와 얘기할 때면 도넛만 보고 있더라니!
“그래도 악마님이 곤란해 하시니까 조금은 속도를 내볼게요. 그런데 이렇게 막 소원 빌면 세상의 운명 같은 게 막 바뀌고 뒤죽박죽되지 않아요? 나비 효과라는 것도 있잖아요.”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악마가 소원을 들어줄 때의 힘은 모든 계산에 걸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운명에 영향 끼치는 일은 없어요. 소원을 들어줬을 때의 미래와 소원을 안 들어줬을 때의 미래는 같답니다.”
“참 적당하고 편리한 설정이네요.”
“덕분에 저희가 일하기 편한 거랍니다.”
“음. 그러면 모모와 가장 비슷한 사람을 이곳에 데려와서 저한테 얘기를 들려주게끔 해주세요. 그게 제 두 번째 소원이에요.”
“모모는 철부지의 그 모모 말입니까?”
“그 모모 말고요. 아주 옛날에 나온 소설책의 그 모모 있잖아요. 그 왜 회색 인간들이랑 싸우고, 사람들 얘기 잘 들어주는 여자애요.”
그러고 보니 그 책의 광팬이 어느 남자가 그 원서를 달라는 소원을 빌었었다. 그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구나.
나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모모와 비슷한 여자를 우리 앞으로 나타나게 했다.
“…….”
장발의 여자가 나타났다. 머리가 지저분한 산발이고 누더기라 해도 믿을 만큼 낡은 캡모자를 눌러썼다. 본인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두꺼운 등산복을 위에 걸쳤고 바지는 핫팬츠를 입고 있었다. 정말로 의류수거함을 뒤져서 닥치는 대로 입었을 때의 비주얼이다.
딱히 부를 호칭이 없으니 모모라 부를 이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장소가 바뀌는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했을 텐데도 모모는 침착하다.
모모는 내 팬티를 가리키더니 한 마디 했다.
“당신, 변태야?”
“오해입니다, 아가씨.”
계약자가 아닌 모모가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안 보이는 채로 소환해버리면 모모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무서운 건 내 고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내 고객은 모모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이슬이에요. 갑작스럽겠지만 제가 악마님에게 소원을 빌어서 당신이 이곳에 오게 되었어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미친 소리다. 즉 모모에게도 미친 소리라는 얘기다.
나는 내가 악마이며 고객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줬다. 사실 내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빨간 피부에 이마에 돋아난 두 개의 뿔, 꼬리까지 완벽한 악마상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본인의 악마 코스프레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변태이고, 이 여자는 날 납치한 미친 여자라는 거지?”
전혀 설명이 안 됐다.
나는 내 악마의 힘을 더 써서 모모가 어쨌든 이 상황을 이해하게끔 세뇌했다.
“맙소사. 그러니까 생판 모르는 나와 대화하고 싶어서 이 악마에게 나를 여기까지 납치하도록 시킨 미친 사람이 이여자란 거야?”
정답이다. 저 말보다 이 상황을 잘 요약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고객님, 전 할 만큼 했습니다. 이 이상 그녀가 이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악마님은 충분히 해줬어요. 그리고 몰래몰래 옷 주섬주섬 입으시던데 그만두셨으면 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멜빵바지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정말 모모와 비슷한 사람 맞아요? 모모와 다르게 말이 많은데요. 제가 아는 모모는 책에서 한 마디도 안 한다고요.”
“그런데 그런 말 한 마디도 안 하는 모모와 대화하고 싶다고 소원을 빈 겁니까?”
“그런 셈이죠.”
나는 내 고객의 인성에 고개를 저었다.
“다 필요 없고, 짜증나니까 얼른 보내줘. 갑자기 사람을 납치하는 법이 어딨어?”
모모의 합당한 주장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태연한 척 있었지만 결국 고객이 내 바지를 벗겼다.
“물론 그 마음은 이해해요, 아가씨. 하지만 모처럼 납치되셨는데 좀 즐기다 가세요. 이 저택엔 당신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들과 평생 즐겨도 질리지 않을 게임기들이 있어요. 건강을 위한 운동시설도 마련되어 있고요”
“거짓말하지 말아줄래, 미친년아. 네 눈깔을 보면 너부터가 이 저택에 질려 있다는 게 느껴져. 그러니까 사람을 납치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거지.”
고객은 다시 내 쪽을 쳐다봤다.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확실히 우리가 아는 그 모모와는 딴판이군요. 아무래도 이 문제는 이 분을 찾아낸 제 선글라스 요정에게 따져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내가 선글라스를 두드리자 선글라스 요정이 대답했다. 물론 선글라스 요정은 내가 지어낸 얘기로, 복화술로 녀석의 목소리를 냈다.
“대충 네놈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소. 하지만 나는 네가 하라는 대로 모모와 가장 연관성이 높은 인물을 찾았을 뿐이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엔 안 닮았어도 분명 그녀는 모모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란 말이지.”
그 말에 선글라스와 나와 고객은 모모를 노려보았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되자 모모는 부담스러운 듯이 허공에 두 팔을 저어댔다.
“미친놈들아, 그렇게 쳐다보면 부담스럽다고. 그리고 아까의 내말은 씹은 거냐? 당장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지만 당신의 울그락불그락 하시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요. 그건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이 말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지 모모는 고객에게 달려들었다. 고객은 능숙하게 상대의 등산복 옷깃을 잡고 넘어뜨렸다.
“훌륭한 엎어치기네요.”
나는 영혼 없이 박수를 쳤다.
“이젠 폭력까지 저지르다니! 이제 못 참아.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건 상관없지만 핸드폰은 있으세요?”
모모는 정곡을 찔려 말을 잃었다. 혹시 이 인간 바보인가.
“어쨌든 보내줘. 부탁이야.”
모모가 나에게 부탁했다. 미친 여자에게 부탁할 바에는 악마에게 부탁하겠다는 건가?
“저에게 부탁을 하시려면 영혼을 주셔야 합니다. 원래 의식을 통해 절 소환시켜서 비셔야 하는데 그거는 생략해드릴게요.”
“당신, 쪼잔하게 이럴 거야?”
“보다시피 악마라서요.”
나는 어깨를 으쓱 하고 고객을 쳐다봤다. 어차피 이 모든 상황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 여자다. 원래 고객처럼 광기를 가진 사람들은 상황을 좌지우지하는데 소질이 있다.
“이대로 보내기는 아쉬운데요. 일단 당신이 모모랑 비슷한 점을 설명해보세요.”
고객은 접대실의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앉았다. 자기가 면접관이라도 된 듯한 태도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모모는 뭐고 내가 그걸 너한테 왜 설명해?”
아직도 엎어치기 당했을 때의 충격이 남아있는지 모모는 몸을 가누며 말했다. 당연한 항의였지만 이 정신 나간 상황에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태도다. 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이곳을 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당신이 저에게 소원을 빌어서 나갈 게 아니라면 저 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는 상황이라 당신은 어디도 못 나가요. 저 분의 소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러고 보니 당신 천사 아니야? 왠지 모르게 자꾸 악마라고 믿었지만 당신 머리 위의 고리를 봐. 어떻게 봐도 천사잖아? 그럼 날 도와줘야지.”
“이건 도넛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천사들은 갑자기 사람을 도울 만큼 착한 양반들이 아닙니다. 그냥 지 할 일만 하고 가는 존속들이라고요.”
이젠 그마저도 못 하게 되어버렸지만.
“이제 그만 상황을 받아들이십시오, 모모. 당신이 무슨 일을 하다가 여기에 불려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꽤 급한 용건인 것 같던데요? 차라리 고객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빨리 돌아가는 게 이득이 아닐까요?”
“…….”
모모도 못내 끄덕였다.
“그래서 그 놈의 모모가 뭔데? 날 뭐라 부르던 상관없지만 모모가 뭔지는 설명해줘야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주는 착한 소녀에요. 소설 속 등장인물로 이 아이가 얘기를 들어주면 그 사람의 마음이 편해진다거나 문제가 해결되기도 한답니다. 악마님의 말로는 당신이 그녀와 닮았대요.”
“그건 선글라스 요정이 한 말입니다, 고객님.”
“아무튼요.”
모모는 잠깐 자신의 왼쪽 위로, 천장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이내 고개를 휘저었다.
“아무리 봐도 그년은 나랑 닮은 게 없잖아. 그년 혹시 거지였어? 그거라면 나도 비슷한 처지인데.”
“거지 비슷한 고아이긴 해도, 그걸로는 모모를 설명할 수 없다고요. 모모는 특별한 아이에요.”
“그런데 네 소원은 뭔데? 그 모모란 년과 연관 있는 거야?”
“모모와 비슷한 사람이 제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는 게 제 소원이었어요.
“그냥 모모라고 하면 되지 비슷한 사람은 뭐야?”
“모모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니까요. 그냥 모모라 하면 왠 이상한 존재를 창조해서 제 앞에 갖다 놓을 것 같단 말이에요.”
정곡을 찔렀다. 수 천년동안 이 일을 하면서 깨우친 내 힘의 알리고즘에 의하면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모모랑 가장 비슷한 사람이 나라는 거지? 뭐, 어찌됐든 내가 아무 얘기나 해주면 당신 소원이 이뤄진다는 거잖아? 그럼 정말 아무 얘기나 한다?”
나도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지금 여기서 유일하게 서 있게 된 모모는 마치 발표하듯이 서서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남의 집 꼬맹이 돌보는 알바를 하는데 말이야, 어느 날 그 꼬맹이가 비밀이라고 얘기해주더라고. 자기 아빠가 장롱 뒤에 이상한 봉투를 숨겨두는 걸 봤대. 나는 감으로 그게 여편네 몰래 숨겨둔 아저씨의 비자금이란 걸 알아차렸지. 그래서 내가 그 집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 그 봉투를 쌔볐어. 아마 그 아저씨는 돈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도 차마 물어보지 못할 거야. 몰래 꽁친 비자금이니까.”
“그래서 그 돈으로 뭐 하셨는데요?”
“네가 알게 뭐야? 어쨌든 난 얘기 들려준 거다. 이제 보내줘야지?”
이상하군. 고객의 소원대로 모모는 자신의 얘기를 들어줬다. 그러면 자동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지지 마련이다. 그런데 아직도 여기에 있다는 건 고객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객이 모모에게 듣고 싶은 얘기의 주제가 정해져 있다는 소리다. 그 주제로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히 모모에 대한 내 인상만 더 나빠졌다.
“제가 봤을 땐 고객님이 모모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는 것 같군요. 그렇죠, 고객님?”
“글쎄요. 딱히 듣고 싶은 얘기를 정해두고 소원을 빈 건 아니라서요. 하지만 방금 얘기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알겠어요.”
여간 까다로운 여자가 아니군. 아무래도 그녀의 무의식적인 바람이 소원에 들어간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 즉 내가 알아서 그녀의 바람을 추측해서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
“일단 아까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모모. 아무래도 고객님이 원하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당신은 못 돌아갈 것 같습니다.”
“뭐라고, 변태야?”
“저한테 화내서도 소용없습니다. 돌아가고 싶다면 그녀가 원하는 만큼 대답해주고 얘기해주세요.”
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태도였다.
“그 훔친 돈으로 내 동생 문제집 사줬어. 우리 집이 돈이 없어서 학원도 못 보내주거든.”
“모모씨의 동생 분은 몇 살인데요?”
“고2야. 유일한 보호자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계속 뒷바라지 해왔는데 꾀 공부를 잘하더라고. 그런데 애가 다른 애가 이미 푼 문제집으로 공부하는 게 안쓰러워서 꽁돈으로 사줬지.”
“잘하셨네요.”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난 훔친 돈으로 애 문제집을 사줬어. 지옥가도 할 말 없지.”
“지옥은 망했는데요.”
내 말에 정적이 흘렀다. 어쩌겠는가? 2012년에 신과 천사들 죽고 나서 그 여파로 지옥도 망해버렸다. 인력이 딸리니 지옥을 운영할 여력이 없어진 것이다.
모모는 헛기침을 하며 얘기를 이었다.
“어쨌든 날 동정의 눈으로 보지 말라고 이 부르주아야. 아직도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하라고. 난 어서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급한 용건이 있다고 하셨죠?”
“그것까지 얘기해야 되냐? 뭐, 됐다. 어쨌든 악마 놈 말대로라면 너도 영혼 걸고 내 얘기나 듣고 있는 걸 테니까. 내 얘기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고객님은 영혼을 건 게 아닙니다. 그냥 로또에 당첨 되셔서 1억개의 소원을 제가 무료로 들어주고 있는 것뿐이에요.”
모모는 충격을 먹었는지 벙쪘다. 고객은 굳이 그걸 말했어야 했냐고 비난의 눈초리를 줬지만 난 정말 말했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억울해서 오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울 것이다.
“돈도 모자라서 악마까지. 대체 이 여자가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거야?”
“적어도 당신에겐 소원으로 당신을 붙잡아두고 있는 사람 정도는 되겠죠. 어서 얘기나 해주시죠.”
내 말에 고객은 또다시 비난의 눈으로 쳐다봤다. 앞으로 자신에게 구천구백구십구만구천구백구십팔개의 소원을 더 들어줘야 하는 악마에게 너무 빡빡하다. 하기야 언제는 악마 취급이 좋았던가.
“악마 말이 맞아. 나도 어서 여길 뜨고 싶으니까. 내 용건은 내 동생 밥해주는 거야. 그 녀석 밥 짓는 법도 몰라서 내가 없으면 라면으로 때울 게 분명하다고. 그건 내가 용납 못해.”
“그럼 지금 바로 가시죠.”
“뭐?”
“악마님, 우리를 그녀의 집으로 이동시켜주세요. 텔레포트 같은 걸로 가능하죠?”
드디어 1억 개의 소원 중 세 번째 소원을 들었다. 나는 감격에 차 바로 소원을 들어주었다.
장소를 이동하자 나와 고객은 엉덩방아찧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텔레포트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다만 고객이 도착한 곳은 낮은 탁자 위였고 자연스레 탁자 앞에 앉아있던 남자에게로 쓰러졌다. 요컨대 거기서 공부하던 남자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엉덩이가 덮여온 것이다.
고객은 일어서면서 엉덩이를 털었다.
“뭔가 야한 기분이 드는데요.”
“내 동생한테 무슨 짓이야!”
모모는 쓰러진 남자에게로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남자, 즉 모모의 동생은 안경을 벗으며 방금 안경에 눌린 콧잔등을 문질렀다.
“누나,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헛것을 본 건가?”
“네 말이 맞아. 그러니까 그것들 무시하고 누나가 해주는 밥 먹고 쉬어.”
“그런데 계속 헛것이 보여. 예를 들면 빨간색 변태 아저씨나 비싼 옷을 입은 저 누나나.”
날 변태라고 부르는 것 보면 남매가 맞는 모양이다. 나는 내 힘을 써서 동생도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즉 지금까지 있었던 줄거리를 쭉 동생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그러니까 저 비싼 누나가 소원을 빌어서 이 사태가 일어난 거군요.”
동생은 이해한대로 말했다.
“이상하게 줄여서 부르지 말아줄래요! 당신의 누나께서 하도 네 밥을 해줘야 한다고 무릎 꿇고 빌어서 여기로 데려다준 거라고요.”
“뭐래, 이 미친년이! 그렇게 말 지어내면 동생이 오해하잖아!”
“아무렴 어때요. 어서 우리에게 밥해주시고 얘기도 들려주란 말이에요.”
“아니, 내가 왜 너한테 밥해줘야 하는데?”
“그럼 악마님에게만 밥해주시는 거예요? 제가 악마 아니라고 인종차별 하시네.”
오히려 고객의 말에 내가 인종차별 받은 기분이다. 하기야 내가 인간과 피부색이 다르긴 하지.
“애초에 악마에게 밥 해준다고 하지 않았거든?”
“악마님에게 밥 안 해주신다고요? 악마라고 인종차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되니, 너는? 진짜 미친년이구나?”
“욕은 하지 마세요. 어차피 아는 욕은 미친년뿐이면서.”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공기 속에 사탄처럼 새빨개진 모모가 씩씩거렸다. 사탄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 나쁜 년!”
겨우 한다는 새로운 욕이 그건가. 그녀는 의외로 순수한 면이 있다.
“누나, 그냥 이분들까지 밥해줘. 부자인 것 같은데 돈을 주시겠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정말 놀랄 만큼 빠르게 혈색이 돌아온 모모가 밥을 하러 주방으로 갔다. 주방으로 가봤자 고작 두 걸음일 뿐이다. 이 집은 집이라기엔 너무 작다.
“돈 주실 거죠, 비싼 누나?”
“얼마면 되요?”
“50만원이면 되요. 저의 누나가 요리를 잘하거든요.”
으아 사탄님!! 사탄님 보다 더한 놈이 있어요!
나는 기가 막혀 동생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라보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얘도 인물이다.
“누나가 생판 모르는 남에게 밥 해주는 노동의 대가에 값을 매기다뇨? 그것은 나쁜 일이라고요. 그러니까 공짜로 해요.”
“고객님도 인성이 장난 아니네요. 돈도 많으시면서 그깟 식사비 주시면 덧납니까?”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저의 재산은 지금은 안 계신 부모님께서 모으신 소중한 돈이라고요. 문방구점 앞에 있는 뽑기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저를 보면 모르겠어요?”
“뽑기 뭐 하시는데요?”
동생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요새 여아들에게 인기 있는 만화 있잖아요. 그 만화 캐릭터 열쇠고리가 들어간 뽑기요.”
“저희 동네에도 있어서 제가 몇 번 뽑았는데…. 이거 얼마에 사실래요?”
동생이 돌고래와 병아리가 섞인 것 같은 괴물 열쇠고리를 꺼내보였다. 저게 여아들에게 정말 인기가 있는 거라면 정말 세상이 망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제가 1년 넘도록 뽑지 못했던 레어잖아요? 50만원 드릴게요!”
“고객님, 부모님이 번 소중한 돈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우리 부모님도 딸이 한심하게 일주일에 한 번 애들이나 하는 뽑기 앞에 쭈구려 앉아서 레어템이 나와달라고 하나님에게 비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요!”
“아, 하나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2012년에 천사들이랑 같이 가버리셨거든요.”
“어쩐지, 하나님께 아무리 빌어도 안 나오더라니! 사탄님께 빌어야겠어요.”
“안 그래도 인력난 때문에 고생인 그 분께 뽑기 같은 걸로 소원 빌지 마십쇼.”
우리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이 저녁밥이 다 되었다. 두부만 둥둥 떠다니는 된장찌개가 주 메뉴인 밥상이다. 반찬도 오이를 썰어놓은 게 전부다.
“차라리 라면이 더 영양가 높겠는데요?”
“싸우자는 거냐, 이 정신 나간 년아?”
의외로 아까의 말이 내내 신경 쓰였는지 모모는 새로운 욕을 시도했다.
“누나, 그냥 무시하고 먹자. 누가 뭐라 하던 나는 누나 밥이 맛있어.”
“현철아!”
여기 온지 30분 만에 동생 이름을 알았다.
헌쳘은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마셨다. 혀는 역시 거짓말을 못하는지 그의 표정이 괴로워 보인다.
나도 한 숟가락 떠보니 내 시금치 맛 나는 도넛이 생각났다. 나는 방금 맛 본 된장국의 맛을 잊기 위해 내 도넛을 열심히 핥았다.
“그러고 보니 그 고리는 정말 도넛이에요? 아무리 봐도 천사들이 머리 위에 하고 다니는 그거 같은데.”
고객이 물었다.
나는 굳이 숨길 필요가 있나 싶어서 대답했다.
“천사들이 다 죽고 우리 악마들에게 떠넘긴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어봤자 별 능력 없어요. 그래서 다들 자기 도넛은 무슨 맛이 나나하고 씹어보는데 그칩니다.”
“어이, 변태. 정말로 천사들은 멸종한 거야?”
모모의 의외의 질문에 갸웃 했다. 분명 그녀는 우리를 내쫓는데 외엔 관심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고 봐야죠. 아는 천사라도 있었습니까?”
“어. 어느 망나니 같은 개자식 천사가 내가 밤낮으로 알바해서 번 돈을 들고튀었거든. 경찰들이 천사를 믿을 리 없으니 못 잡았지. 오히려 우리가 다 써놓고 허위신고 했다고 한 소리 들었지.”
남매의 표정이 어둡다. 확실히 우리 악마나 천사의 성격은 인간과 다를 게 없어서 그중 못된 놈은 정말 못됐다. 아까 모모가 접대실로 소환되었을 때 놀라지 않았던 것도 이미 천 사의 존재를 만났었기 때문이었군.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을 비롯해 모든 천사들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건 이 도넛뿐이고요.”
“어차피 별로 신경 안 써. 벌써 7년 전 일인걸.”
7년 전이면 2012년이다.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도둑질을 한 건가? 다른 천사들은 몰라도 그 천사는 벌 받은 셈이다.
“그보다 미친년, 의외로 맛있나봐? 우리들 중에 가장 열심히 떠먹네.”
“돈이 아까워서 열심히 먹는 건데요. 식사비 50만원이라면서요?”
“누가 그래?”
“당신 동생이요.”
“잘했어.”
모모가 현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지간히도 동생이 좋은가보다.
“뭐, 농담이고 돈은 필요 없어. 어차피 같잖은 동정심에 줄게 뻔해. 그런 돈은 필요 없어.”
“당신이 훔친 돈은 괜찮고요?”
정적이 흘렀다. 역시 우리 고객님. 어쩌면 현자, 이 영감탱이가 이 여자를 골랐던 기준은 인성일지 모르겠다.
역시나 누나의 도둑질을 몰랐던 현철은 놀란 눈으로 누나를 쳐다봤다.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누나가 도둑질을? 거짓말이죠?”
모모는 대답 대신에 팔을 길게 뻗어 고객의 머리채를 잡았다. 얼굴색이 변하지 않은 전혀 다른 종류의 분노였다. 이성을 유지한 그녀의 침착함은 오히려 그만큼 화났음을 드러낸다.
일났구만.
“놓으시죠, 모모.”
“내 이름은 모모가 아니야.”
“그럼 이름이 뭔데요?”
“너한테 알려줄 이름은 없어.”
모모는 고객을 내동댕이쳤다. 나는 고객이 이 모든 그녀의 행동을 받아주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 고객은 충분히 반격할 수 있었다.
“누나, 그만해. 누나 사람 때리는 사람 아니잖아?”
“아뇨, 현철씨. 당신의 누나는 화날 때 사람 때리는 사람 맞아요. 아까 당신이 없을 때도 절 때리려고 했어요.”
“보자보자 하니까!”
모모가 다시 고객에게 달려들었다. 고객은 멱살을 잡히고도 여전히 무표정이다.
“잘 봐두세요, 현철씨. 당신의 누나는 이렇게 사람을 때리는 사람입니다. 도둑질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의 누나는 자신이 일하던 곳의 돈을 훔쳐 당신의 문제집을 샀어요. 또 제가 못 돌아가게 하자 당신이 굶을까봐 저에게 달려들었죠. 이번의 경우에도 문제집이 사실 훔친 돈에서 나온 거라는 걸 당신이 알면 상처받을 까봐 저를 때리려고 한 겁니다.”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고객의 멱살을 잡은 손아귀의 힘은 더 들어갔다.
“돈 많으면 다야? 사람의 비밀을 이렇게 까발려도 되는 거야? 그렇게 네가 잘났어?”
모모는 고객의 몸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아까와의 분노와는 달리 침착함을 잃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돈이 많다고 저처럼 이렇게 쓰레기나 하는 짓을 해도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제가 이런 짓을 벌인 건 당신이 답답해서예요.”
“뭐라고?”
“당신은 왜 당신의 동생 분에게 당신 얘기를 하지 않죠? 당신이 동생을 위해 제대로 된 직장 없이 알바 하며 뒷바라지 하면서 힘든 점들을 알려주지 않죠? 문제집도 그래요. 왜 당신이 도둑질까지 하면서 동생 분에게 문제집을 사주시죠? 동생 분이 훔친 돈으로 문제집을 갖고 싶다고 했나요?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가족이 겨우 문제집 하나 때문에 도둑질한 걸 정말로 동생이 원할까요? 왜 자신의 일방적인 희생을 동생 분에게 강요하시죠?”
고객의 말에 우리 셋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야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지만 나머지 둘은 정말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남매는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모모와 비슷한 사람에게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한 것도 똑같은 이유였어요. 모모가 답답하니까. 자신도 서럽고 서운하고 남이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을 텐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그런데 소설 속에나 나오는 그런 아이를 닮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니까 이렇게 남의 가정사를 뒤흔든 게 답답해서라는 거지? 너같이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우리 같은 모습들이 답답하다는 거지?”
“네, 답답해요, 모모. 하지만 답답한 이유는 네가 부자라서, 당신이 가난해서가 아니에요. 당신이 당신 얘기를 숨기기 때문이에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그러지만 당신은 어리잖아요. 당신은 동생 분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지만 부모는 될 수 없어요.”
“나가주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현철이 얘기했다. 모두가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당신들이 부자이건 악마이건 상관없어요. 누나를 이렇게 몰아세울 거면 당장 나가요! 당신들 딴에는 좋은 의도라고 그럴지 모르겠지만 우리 누나는 상처받는다고요!”
고객은 내 맨 살을 꼬집었다. 하기야 내 양말을 꼬집을 수는 없으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고객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리고 원래 있었던 곳으로 데려다줬다. 물론 이거는 별도의 내용이기 때문에 네 번째 소원인 걸로 쳤다.
“결국 저만 나쁜 년이 됐어요, 악마님.”
고객은 침대에 벌렁 눕고서 말했다. 아까 봤던 돌고래와 병아리가 섞인 괴물의 쿠션을 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남의 가정사에 불을 지핍니까? 저희 악마들도 그런 짓은 안 한다고요.”
“그러면 악마들은 너무 착한 거 아닌가요? 아니, 악마들이 이런 짓을 안 하니까 제가 이런 짓을 대신 해줘야 하잖아요.”
“그게 무슨 미친 논리입니까.”
“그런 게 있어요, 흥.”
그 때 선글라스가 진동으로 울렸다. 나는 선글라스를 툭 쳐서 진동을 멈췄다.
“제 상관이 부르시네요.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저 야한 짓 잔뜩 할 거니까 천천히 오세요.”
“네, 많이많이 하세요.”
“그래도 언제 올지 몰라서 불안할 정도로는 빨리 와주세요.”
“그냥 20분 내로 올게요.”
나는 텔레포트로 사탄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지옥은 망하긴 했지만 장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사탄의 집무실도 악마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소리다.
어쨌든 나를 호출한 사탄은 나를 보고 흠칫 놀랬다.
“순간 천사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줄 알고 놀랐습니다.”
“천사들 중에 누디스트가 많긴 했죠. 김이슬 고객의 첫 번째 소원이 이겁니다.”
“역시 현자가 선택한 여자군요. 만만치 않아요.”
“빨리 본론이나 얘기해주시죠.”
사탄은 헛기침을 했다. 역십자가 구멍에 주먹을 갖다대고 하는 헛기침을 하는 모습은 언제나 내게 인상적이다. 나는 아직도 저 구멍이 코인지 입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김이슬씨에 대한 얘기입니다. 알려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미친 데다 만만치 않게 민폐를 끼치는 여자라는 것 말고 제가 알아야 할 게 더 있나요?”
“중요한 게 하나 빠졌어요. 뜸들이지 않고 바로 말씀들이죠, 김철수 씨.”
지금 뜸들이고 있잖아.
“현자가 그녀에게 잘 대해주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현자가 실수로 자신의 능력을 그녀에게 나눠줬기 때문이에요. 즉 모든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어요. 현자의 능력을 나눠받았다는 점에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김철수씨도 잘 아시겠죠? 그녀는 정말 불쌍하게도 미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를 미안하게 여긴 현자는 제게 말도 안 되는 요구로 그녀의 소원들을 들어주게 만든 거구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그녀가 내게 빌 소원들이 어떤 걸지 상상하니 현기증이 났다.
재밌게 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