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공간, 게이트가 있는 방은 일반적인 사람의 키로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높고 넓다.
무엇 때문이냐 물어본다면, 원래 이 시설은 자니아를 관리하는 시설의 보수 및 정비를 위한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던 창고 같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내가 탐색을 위해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한 곳이다. 그 많던 장비들은 내가 탐색과 시설의 유지보수를 위해 분해한 지 오래였다.
“카일님, 뭐 잊으신 건 없으십니까?”
내가 장착된 장비의 문제 여부를 확인하고 있는 사이 아트가 말을 걸어왔다.
“물론, 아트. 잊은 건 없지. 장비는 모두 잘 작동하고 있네.”
물론 아트가 묻는 바는 이게 아닐 것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지만, 일부러 말을 돌렸다.
“제가 묻고자 하는 바가 그게 아니란 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대답은 날카롭게 날아왔다. 아마 아트에게 눈이 있었다면 날 노려보고 있겠지? 아니 어쩌면 이미 시설의 모든 카메라가 날 노려보고 있을지도 몰라… 상상해버렸다. 이 몸이 아니었다면 분명 식은땀이 잔뜩 흘렀을 거다.
“한 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카일님, 정말로 뭐 잊으신 건 없으신가요?’
두 번 말했다. 아트가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이건 아트가 화가 단단히 났다는 거다. 마지막은 분명 기계 신체의 점검 때문에 원래 몸으로 연구실에 박혀서 식사도 잠도 안 자고 4일을 있었을 때였는데.. 작업이 끝나니 잔소리를 온종일 들었어야 했었지..
그때를 생각하니 빨리 다음 세계로 떠나고 싶어졌다. 아니 당장이라도 좋았다. 이 무거운 공기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적어도 시간이 지나면 화가 누그러들지 않을까 싶었다.
“.... 게이트 오픈을 위한 에너지 완충까지 약 15분 정도 남으셨습니다.”
아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무언의 압박인가.. 시설의 공기가 더욱더 무거워졌다. 금속 신체의 센서로는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저, 저기. 아트? 부탁할게 있는데..?”
아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카일님, 죄송스럽게도. 제가 지금 무척 바쁜 상황이므로 나비 양에게 부탁드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참고로, 나비 양이라면 지금 시설로 안내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자, 잠깐. 아트? 네가 바쁠 만한 일은 시킨 적도 없고, 이때까지 너 그런 적도 없잖아? 그리고 나비를 왜 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작은 키에 연갈색 머리칼, 갈색 피부, 초록색 눈동자.. 그리고 짐승의 귀까지. 그저 귀엽기만 한 하얀 원피스 차림의 소녀가 드론을 따라 내부로 들어왔다. 잠시 시설을 둘러보더니, 날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수호신님! 여기. 엄청 커!!”
나도 그에 맞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 인사는 해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뭐 어쩌겠냐. 나는 그 소녀를 불렀다.
“하아.. 나비, 잠시 여기로 와봐!”
나비는 후다닥 뛰어왔다. 그 작은아이는 그저 처음 보는 시설 내부가 신기하기만 한 거만 같았다.
“나비. 아트가 불렀다! 수호신님이. 나비한테 할 말. 있다. 했다!!”
역시 아트. 이런 쪽으론 정말 무섭다. 대체 그녀는 어떻게 이런 존재를 만들어낸 걸까. 뭐. 일단, 이 안건은 나중으로 밀어두자. 지금은 내 눈앞에 이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 나비와 눈높이를 맞췄다.
“자, 나비. 여기가 내가 전에 말했던 게이트가 있는 방이야. 우린 이곳을 출발과 도착을 같이한다 해서 ‘서클룸’이라고 부른단다. 물론 정식명칭은 아냐.”
“서… 클..? 나비. 잘 모르겠다.”
아직 나비한테는 어려운 이야기인가. 뭐 이름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였다.
“그거에 대해선 나중에 천천히 얘기해 줄게. 나비, 갑작스럽겠지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앞으로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야 잘 들어둬.”
나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역시 처음부터인가. 나는 그때를 떠올렸다. 모든 것이 사라졌던 그때. 울고 또 울었던 바로 그때의 일을 말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 대해선 저번에 아트한테 들었지?”
나비는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응! 커다란 학교.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교육받는다. 들었다.”
“그래, 다 얘기하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내가 거기를 졸업하는 거부터 시작할 거야. 사실 졸업이라고 해봤자 선생님들 골치만 썩이다 쫓겨난 거지만 말이야.”
지금은 그저 웃으며 넘기려 하지만, 그땐 참 힘든 시간이었다. 그것도 그녀 덕에 버틴 거지만 말이다.
“우리 종족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단다. 그리고 그 능력의 적성에 따라 아카데미에서 학과를 배정받고 졸업하면 각자 정해진 곳으로 배출되지. 그중에서도 여기 수정의 관리시설 같은 것들은 꽝 중에서도 최악인 곳이야... 애들은 여기보다도 수도의 청소부를 더하고 싶어 했단다.”
나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도시가 얼마나 큰지도 모를 꺼고, 청소부가 뭐 하는 직업인지도 모를 거고, 거기에 특별한 능력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지?
“혹시라도 어려운 게 있다면 나중에 아트에게 물어봐도 된단다. 보자.. 그래. 그중에서도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태어났단다. 그래서 부모에게서도 사회에서도 기대라고는 조금도 받지 못했어. 그러니 여기저기 치이기만 하더라고...”
“그리고 결국 여기 자니아의 관리시설에 배정을 받았지. 처음엔 역시나 싶더니, 엄청 허무하더라고.. 그리고 이 시설에 처음 발을 들인 날 그 일이 일어났단다.”
여기서부터가 이야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나비도 그걸 아는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 지진이 일어나더니 시설 전체가 마비되었더라고,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했지만 내 능력으론 어쩔 수 없어서 왜냐면 그건 전력의 근원인 자니아에서의 전력공급이 끊겼기 때문이었으니깐 말이야. 하지만 그때는 그것도 모르고 시설을 돌아다니며 온갖 걸 다 점검했어. 그렇게 절망에 빠져 지내기를 삼 일째 다시 전력이 돌아왔어.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수도에 연락을 넣은 거였지.”
그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식량은 많았지만, 어둠 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죽는 줄 알았다.
“근데 이게 웬일일까. 수도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 정확히는 수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말이야. 아니아의 관리시설, 본부, 아카데미, 다른 연구시설들도 말이야. 연락이 안 된다면 드론을 통해 직접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싶어, 드론을 수도로 보냈지. 그리고 봐버렸어. 수도가 통째로 없어진 거야. 그곳엔 오직 커다란 구덩이만이 남아있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니아의 관리시설에도 드론을 보냈지만, 거기도 똑같았어. 구덩이만을 남기고 모든 것이 사라졌단다.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 건물들, 그리고 내가 돌아가고자 희망했던 곳들이 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돌았다. 한차례 쉰 나는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니 엄청 허무해지더라고, 이동용 게이트는 그 어디로도 연결되지 않지, 시설은 갑자기 생겨난 보랏빛 안개에 둘러싸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지.. 처음엔 그냥 죽을까도 싶었어. 방에 틀어박혀서 엉엉 울기도 했고,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어… 그렇게 폐인 같이 살기를 사 일째에 누군가 말을 걸어왔어.”
다시 한번 뒤돌았다. 나비와 눈을 맞추고, 팔을 좌우 펼쳤다. 그래.. 마치 아이들에게 영웅의 얘기를 하는 이야기꾼 같았다.
“바로 아트님의 등장이신 거지!!”
말이 끝나자 나비의 초록색 두 눈이 반짝였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봐도 좀 부끄러웠다.
“방구석에 박혀 인생을 놓아버릴 뻔한 폐인에게 아트님은 말씀하셨어, 바로 더 나은 길을 말이야! 자니아의 힘과 시설의 설비를 이용하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이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가도 좋다고 말이야. 처음엔 별이 잘 보이는 곳에다 묫자리나 준비할까 했어,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지, 분명 무엇인가 사고로 인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말이야. 확신은 없었지만 그렇게 믿기로 했어. 그래서 시작된 거야. 이 모든 것이 말이야.”
나는 팔을 내리고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많은 문제가 있었고, 다양한 난관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그래서 난 믿고 싶어. 나와 아트의 이 노력이 분명 무언가의 결실로 남기를 말이야. 이야기는 여기까지. 혹시 궁금한 내용이라도 있어?”
어느샌가 역사교육이 된 거 같았지만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수호신님. 굉장하다.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비. 수호신님 응원한다!!”
나비가 그 모든 걸 이해한 거 같지는 않았지만, 뭐 중요한 포인트는 이해 했을 거라 믿는다. 덤으로 이 작은 소녀의 응원도 얻었으니 나는 만족했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자, 나비. 그럼 집 잘 보고 있어야 한다? 이번엔 무언가 확실하게 물어올 테니 말이야.”
나비는 미소 지었다. 그 작은 미소가 큰 힘이 될 거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트에게 말했다.
“그리고, 아트? 이 정도면 됐지? 자세한 건 다음에 할게.”
침묵을 지키던 아트가 말을 꺼냈다.
“뭐, 그 정도면 충분한 거 같군요. 카일님, 게이트는 이미 충전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언제든지 출발하시면 됩니다.”
나는 결의를 다졌다. 적어도 뭔가 득이 될만한 상황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수많은 탐색 하는 동안 내가 얻은 거라고는 나비 하나뿐이었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해 보실까. 나비 갔다 올게.”
조금씩 게이트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남았을까, 나비가 팔을 머리 위에서 좌우로 흔들며 소리쳤다.
“조심히. 다녀와! 수호신님!!”
나를 응원해주는 존재가 늘어난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게이트로 들어갔다. 요동치는 에너지의 통로를 지나, 나는 건너편에 도달했다. 그곳은 바로…
이질적인 형태의 통로를 지나 로봇은 밖으로 나왔다. 또 다른 세계의 첫발을 내디딘 로봇이 처음으로 본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황폐한 도심 한가운데 홀로 앉아있는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수염을 한가득 길렀고 넝마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표정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걸 본 로봇은 경직됐다. 지금까지 이세계의 주민들은 처음 보는 자신을 경계해 왔고, 언어도 통하지 않았기에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저 로봇을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이 말했다.
"카일.."
라는 소리를 내며 노인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로봇은 충격에 빠졌다. 넝마를 뒤집어쓴 그 노인이 처음으로 소리 낸 단어는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고, 거기에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 때문이었다. 노인은 말을 끝내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는 거죠?!"
로봇은 소리쳤다. 하지만 노인은 그저 다시 한번 뒤돌아 손짓하고 마저 걸어갔다. 로봇은 생각했다. 처음은 무엇인가 함정인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저 노망난 노인 인걸까? 그다음은 노인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라고 말이다. 곧 로봇은 노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또는 그저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거 같다라고 로봇은 생각했다.
로봇은 노인을 뒤따랐다. 길을 걸어가는 노인은 간간이 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로봇은 노인의 삶이 황혼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까지 덮은 낡은 넝마, 여기저기 때가 묻은 배낭, 노인을 지탱하는 찌그러져 움푹 파인 금속 지팡이. 그 노인이 이때까지 겪어 온 경험을 대변하듯 모든 것이 낡았다. 또한 주위의 환경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뾰족하게 하늘을 찌를 거 같이 생긴 건물들은 그저 부서져 옆으로 누워 있고, 온전하게 보이는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색이 벗겨지고, 장식물은 흔적만이 남았고, 거리의 곳곳엔 초록색 잡초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노인이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 로봇이 생각하는 사이, 노인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걸 본 로봇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도착한 것입니까?”
곧 노인은 빠르게 몸을 숙이더니 로봇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도록 손짓했다. 그리고 조금 걸어가 무너진 구조물 사이에 엄폐하며, 전방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번화가로 보이는 도심 속 거리 한가운데에 이 세계의 토착 생물로 보이는 짐승이 몇 마리 있었다. 로봇은 그 짐승들을 관찰했다. 사족보행,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빨강과 주황의 몸체, 성체와 새끼의 무리가 이동하는 모습, 아마 육식동물의 무리로 보였다.
옆에 있던 노인은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잠시 후, 그 짐승 무리는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노인은 다시 일어나 걸었다. 로봇은 다시 한번 노인을 따라갔다. 저런 육식동물의 무리가 도심 한가운데를 누비는 모습을 본 로봇은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곧 한가지 결과를 도출했지만, 그건 나중으로 밀어놨다. 지금 노인에게 질문해도 답해줄 거 같지 않았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걷기를 10여 분. 노인은 어느 폐건물로 들어갔다. 로봇은 건물의 겉모습을 훑어봤다. 창문은 온데간데없고, 입구에 적힌 문자는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마모되어 있었다. 건물로 들어선 로봇은 노인을 따라 그대로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의 있던 몇 개의 방을 지나더니 노인은 막다른 통로 앞에 멈춰 섰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노인이 미쳤거나, 자신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하겠지만, 로봇은 달랐다. 로봇은 그 막다른 벽을 보고 기뻐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죠? 그리고 여길 어떻게 아는거죠?”
노인은 그제야 표정을 드러냈다. 크게 미소를 짓더니 조금 로봇의 뒤로 빠졌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이 말이다. 로봇은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손을 댔다.
“출입 권한- 인증 중…. 접속 완료…… 반갑습니다. 임시_최고관리자 카일님.”
막다른 통로로만 보이던 곳은 양옆으로 갈라지더니 곧이어 그들이 있던 지하에서 더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생겼다. 로봇은 그 계단에 올라섰다. 이번엔 노인이 로봇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이 올라서자 계단은 밑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밑으로 더 밑으로 향했다. 계단이 내려갈수록 벽면에 설치된 전등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시설 내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최고 관리자께서 본 시설에 방문해주신 것에 큰 영광을 느낍니다. 본 시설은 프로젝트 ’은하수’의 시행에 따라 78번째로 건설된 곳입니다. 저희 연구소에서는 요원들의 발명 및 이세계의 주민들과 좀 더 친화적인 교류를 위해…”
얘기를 듣던 사이 두 사람은 연구실의 본관 입구에 도달했다. 로봇이 앞장서자, 그들을 막고 있던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로봇이 지내던 시설과 비슷한 형식의 내부가 있었다. 하지만 더 넓었고, 마치 좀 더 진보적인 곳이었다. 로봇은 입구로 들어서 시설을 둘러봤다.
“분명 여행하는 자들의 시설이 맞아,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시설의 내부로 로봇의 목소리는 조금 울리더니 사라졌다.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로봇은 절망했다. 시설의 관리상태는 양호했지만, 이는 드론이 관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드론조차도 지금은 작동을 멈춘 듯했다. 로봇은 잠시 내부를 걸어 다시 한번 시설 내부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휴게실 의자에 앉아 버렸다. 노인은 그사이 사라져버렸고, 그저 로봇이 조용히 앉아 낙심하고 있었다.
“분명, 이번엔 무언가 발견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멀쩡하게 작동하는 시설은 처음 발견하는 거였고.. 하아. 이럴 게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라도 뒤져봐야겠는걸.”
동족의 발견을 제일 기대했었지만, 로봇은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이용해 시설의 정보를 확인했다. 그것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그렇게 시설의 단말을 이용해 내부 정보를 확인했다. 대부분이 시설 연구원들의 보고서와 메일이었다. 이따금 관심 가는 내용은 발명품들의 예상되는 기능이었지만, 시설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발명품들 또한 로봇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물건들뿐이었다. 그러던 중 로봇은 익숙한 내용의 문서를 발견했다.
여행하는 자들 건국 기념일 행사 안내
인사과에서 여행하는 자들 전 요원들에게 전파합니다.
다가오는 건국기념일(대지의 달 14일)을 맞아, 수정 시설유지과 담당 요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당일 정오 전까지, 수도 아이온데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최고 관리자께서 행사를 준비하셨고, 축사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건국 기념일은 공식적인 행사일이고, 모든 요원에게는 당일 하루의 휴식을 취하라는 최고 관리자의 지침이 내려와 있습니다.
또한 기념일을 맞아.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할 수 있게 미리 계획을 잡아 주시고, 탐색 및 연구를 위해 이세계에 거주 및 상주하고 있는 인원들은 당일까지 복귀하라는 지침도 내려와 있습니다. 문의할 내용은 인사과로 연락 바랍니다. 이상.
여행하는 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건국 764년. 하늘의 달 14일.
인사과장 라비올라.
“하늘의 달… 기억난다. 나도 이거 받았었지…”
로봇은 잠시 과거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거북해하며 회상을 멈췄다. 그러던 사이 사라졌던 노인이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로봇에게 건넸다.
“저기, 이건…?”
침묵을 유지하던 노인이 전해준 것은 정체불명의 기계와 전자 노트였다. 로봇은 그것들을 확인했다. 기계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고, 겉면에 ‘미켈의 대성공을 위한 발명품’이라 적혀 있었다. 그리고 노트의 뒷쪽밑면에는 ‘5등급 연구원 나달’이라고 적혀있었다. 로봇은 기계를 내려놓고 노트의 내용을 확인했다.
노트에는 연구진척도나 개인 메일이 한가득하였다.
“진척도는 아까 메인 저장소에서 확인했고, 메일을 보라는 건가...?”
노인은 정렬된 메일 속에서 한 개를 손가락으로 짚어줬다. 로봇은 일단 그걸 화면에 띄웠다.
‘나달로 부터.
미켈, 저번에 얘기한 그... 청음 번역기계 였나? 그거 상부에서 어느 정도 지원해 준다고 회답이 왔대. 일단 시제품을 제출하면 검토해보고 본부 데이터베이스에도 접속할 수 있게 해준다더군. 보스가 너한테 전해달라는데, 휴가 가서 이렇게 메일로 보낸다. 너 그거 꽤 열심히 준비했는데, 잘됐다 야. 그리고 잘하면 이세계 탐색에도 큰 도움이 될만한 큰 발명이 될 거 아니야. 진짜 운 좋으면 역사서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는 거 아냐? 말이 길어졌네. 아.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보스가 서류 작성해서 신청하래.
763년. 추수의 달 21일.’
로봇은 내용을 한차례 읽어보고, 그 다음 문서를 확인했다.
‘미켈로 부터.
내 발명품이 이렇게 기대를 받는 건 처음이야, 나달!! 연구과장하고도 개인 면담까지 받았다고!
5등급 연구원이 이런 평가를 받을 날이 올 줄이야. 당장 시제품을 받고서는 몇 번 확인해보더라고, 기계가 예상대로 돌아줘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거기서 창피만 당할 뻔했다니까. 거기에 그쪽에서도 발명하고 있던 인공 자아인가, 뭔가도 지원해준데, 얘기 들어보니깐 내가 정보 정리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고. 나야 좋지 뭐, 잘하면 곧바로 3등급까지 올라가는 거 아닐까 몰라. 나 지금 너무 흥분돼!! 시간은 좀 오래 걸리겠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이세계의 주민과 쉽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몰라!!
763년. 별의 달 2일.’
로봇은 나머지 메일을 확인했다. 남은 건 다른 이들과의 잡담, 업무 내용, 그리고 건국의 날 행사 안내 메일이었다. 시설에 있던 모두는 수도로 돌아갔고, 그 사고가 일어나 모두 사라진 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로봇는 추측했다. 하지만 홀로 남은 기계는 멈추지 않고, 수많은 정보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날 자신을 찾아올 누군가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기계를 가리켰다. 로봇은 다시 한번 기계를 바라보았다. 그저 네모난 상자 형태의 그 기계는 잘만 이용한다면 앞으로의 탐색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설명서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좋습니다. 수상한 물건은 아닌 거 같군요. 이걸 한번 작동시켜보죠.”
로봇은 기계를 만지다 선을 하나 찾았다. 선을 느려 뜨려 보니 공용단자라는 것을 확인하곤 자신의 팔에 장착된 장치에 연결했다.
그 순간, 로봇의 머릿속엔 수많은 문자가 지나갔다. 은색 머리의 남자가 하얀 공간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 속삭였다. 곧 그것들은 거대한 검은 파도가 되어 남자를 덮쳤다. 남자는 눈을 떴다.
“후우... 후우…”
자신의 머릿속에 많은 양의 정보를 받아들인 로봇은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제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나..?”
로봇은 어디선가 들어봤던 목소리에 그곳을 쳐다보았다. 로봇의 시선이 닿은 곳엔 그저 노인만이 있었다.
“뭐, 내가 본 미래가 맞았다면 잘 알아듣고 있겠지..”
노인이 머리에 쓴 넝마를 제치자, 넝마 속에서 흰색 더벅머리가 펼쳐졌다. 그의 두 눈은 보랏빛으로 빛났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리고 노인은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네, 카일. 누구냐고 묻고 싶은 마음 잘 아네. 난 많은 이름으로 불렸지. 사기꾼, 독심술사, 예언가.. 하지만 난 이게 제일 맘에 든다네. 자네는 날 ‘현자’라고 불러주면 된다네.”
노인은 머리를 숙이며, 오른손을 곧게 펼쳤다.
“이 도시의 마지막 생존자, 현자라네. 지금부터 서로 참된 교류의 시간을 보내보도록 하지.”
로봇은 처음 듣는 언어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분명 들어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언어였다. 하지만 로봇은 완벽하게 그 언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아, 혹시 현자가 맘에 안 든다면, 노망난 노인이라고 불러도 된다네.”
로봇은 경직됐다. 아까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실수로 말을 흘렸거나, 아니면 그저 얻어걸린 게 아닐까 라고 로봇은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 당신은 누구시죠..? 절 어떻게 알고 있으신 거죠?”
로봇은 질문의 공세를 이어갔다. 노인은 로봇의 질문에 씨익 웃더니, 자신의 옆에 있던 책상에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자아자아. 하나씩 해나가세.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저 이 황폐한 도시를 살아가는 한낱 생존자의 불과해.”
“그리고.. 어떻게 자네를 아냐고 물어본다면, 먼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게나.”
노인은 마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자네 앞에 보이는 노인은 이 황폐한 세계에서도 살아남아 갈 수 있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한가지 능력 덕이지. 솔직하게 얘기하면 난 미래를 볼 수 있다네.”
로봇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미래가 보인다는 말을 제가 믿을 수 있을 것 같나요..?”
노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은 노인이 기침하면서야 끝났고, 노인은 말을 이었다.
“당연히 바로 믿으면 바보지 않겠나!! 하지만 자네도 말이야, 온갖 장소를 그저 기계 하나로 다니면서 내가 미래를 보는걸 이상하게 여기면 되겠나!!”
로봇은 몸에 전기가 흐르는 거 같았다. 몸체의 오작동이 아닌 마치 자신의 탐색을 다 아는 듯이 말하는 그 노인 때문이었다.
“음? 말을 잃은 거 같구먼, 뭐 자네가 길게 설명 안 해도 돼서 좋지 않은가?”
“자자. 내 얘기나 이어서 하지. 그 능력으로 난 많은 걸 봤다네. 이 세계를 황폐화한 전쟁도 봤고, 내 미래도 봤고, 앞으로의 자네의 여행도 봤지.”
“제… 미래를 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확신을 하긴 어렵다네. 내 능력은 수많은 가능성을 보는 것. 내가 본 미래가 곧 자네가 맞을 미래인지는… 장담하기 어렵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까는 미래를 보신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제 미래가 아닐 수도 있으시다니요?”
노인은 허리를 폈다. 로봇을 바라보더니, 수염을 만졌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는 건 앞으로의 가능성일세, 나도 처음에는 내가 보는 게 다가올 미래인 줄 알았다네, 근데 딱 한 번 내가 본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일이 일어났지. 그리고 난 그걸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네.”
노인은 한차례 쉬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기침이 나왔다.
“크흠. 이놈에 기침은 끝나는 날이 오기는 하려나, 보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흐음.. 그래, 내 능력은 말일세.. 내가 본 미래의 시간대가 멀면 멀수록, 장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적중률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되네.”
로봇은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확신하실 수 있으신 거죠? 그리고 어떤 미래를 보신 거죠?”
노인은 그런 로봇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역시 머리는 나쁘지 않군. 안타깝지만, 내 능력에도 규칙이 있다네. 자네가 그 미래를 너무 자세하게 알아버리면 말일세… 영 좋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될 거야.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네.. 다 자네를 위한 거야.”
얘기를 한차례 한 노인은 수통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얘기를 이었다.
“그저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 정도일까.. 자네의 여행이 끝을 알리는 때이지.. 자네는… 그래, 미소짓고 있구만.”
로봇은 자리에 앉은 채 소리쳤다.
“그러면 왜 제게 이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대체 당신이 원하는 게 뭐죠?”
노인은 크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야기 상대.”
오랫동안 노인과의 이야기를 나눈 로봇은 자신이 이세계로 나왔던 불안정한 에너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로봇과 같이 대화를 나누던 노인이 서 있었다.
“너무 걱정말게나, 자네 걱정과는 달리 이곳에 자네가 찾는 것은 없다네. 내가 이 도시에만 산게 30년이 넘는다네! 그래도 허탕만 치는 건 아닐 테니, 다음 여행을 위해 힘내게나!”
“뭐. 얻은 것도 많기는 하지만, 결국 의문점만 더 늘어났군요. 결국, 저와 나누신 대화도 그렇고 해결된 게 하나도 없지 않나요.”
노인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하하하!! 거, 앞으로의 여행을 생각하면 그냥 산책 나왔다고 생각하게나!! 기대한 것과는 달리 뭔가 한가득 챙겨가지 않나!!”
“뭐, 그렇긴 하네요.”
로봇은 노인과 같이 있던 시설에서 챙긴 물건을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수레에 한가득 실어놓은 상태였다.
“카트는 내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게나, 어차피 저기 상점가에 가면 널린 게 그거라네.”
로봇은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얘기만 한가득 듣다가 가는군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제가 드린 기계는 잘 챙겨두시죠. 이번에 얻을 것들을 이용하면 탐색은 더욱더 편해지겠죠. 그럼 다음 탐색까지 두 달씩이나 안 기다려도 되고, 또 이미 탐색한 세계에 다시 한번 오는 것도 크게 고민 안 해도 되겠죠.”
노인은 미소지었다.
“다음에 또 올 겁니다. 제가 물어볼 게 생기거나, 알아야 할 게 생기거나… ‘현자님’께서 그 기계를 작동시키거나 말이죠.”
로봇은 수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노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럼,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혹시라도 맘 바뀌시면 그걸로 절 호출해 주시면 됩니다...”
노인은 로봇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어줬다.
“다음번에 심심해지면 그때 부르겠네. 잘 가게나. 자네의 여행길에 황금빛이 가득하길.”
노인은 어느샌가 여행하는 자들의 표어까지 쓰고 있었다. 로봇은 그걸 보고 그러려니 하며 게이트로 들어갔다. 로봇이 사라지고, 잠시후 게이트가 닫혔다. 노인은 혼자 남게 되었다.
“잘 가게나, 아직은 다가올 미래를 모르고 있지만.. 자네라면 잘 이겨낼걸세. 푸른색의 여행자여.”
노인은 뒤돌아 먼지가 휘날리는 황폐한 도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