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출타자가 있어서 계획에도 없던 조촐한 번개 회식이 잡혔습니다.
주말에도 바쁘게 (음주)달렸는데 주중에 느린 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네요.
오늘의 회식 장소는 상암입니다.
상암은 이 동네 사람들에게 읍내로 불리는 구도심과
디지털, 미디어 회사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신도심으로 나뉘어요.
대기업들이 들어선 최신식 고층 빌딩들과
유흥가로 가득찬 30년 넘은 상가주택들이
2차선 도로를 기준으로 나뉘어 있어 묘한 대비를 보이는 곳이에요.
오늘 간 곳은 구도심(읍내)쪽에 위치한 백년손님이란 가게입니다.
약 9년 전 처음 상암을 들락거렸을 때부터 존재하던 곳인데 막상 방문은 처음이네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상암도 상당히 많은 업장이 생기고 또 사라집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업장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가게는 영화 기생충에 소재로 나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반지하'에 위치해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나름 독특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은근 반지하 형태의 업장이 많습니다.
제가 단골로 다니는 이자까야나 라멘집, 돈까스집 등 반지하 업장이 퍼뜩 떠오르거든요.
반지하라는 건물양식이 전세계에서 흔치는 않다고 해요.
한국에 반지하가 들어서게 된 이유는 1968년 북 무장공비가 한국을 습격한 김신조 사건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서울시는 전쟁발발에 대비하여 반공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하실을 의무화하도록 합니다.
한데 지하실은 거주 목적으로 임대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 좋은 갓물주들은 지하층을 반정도만 묻어서 지하면서도 1층이기도 한
반지하 형태를 개발해 임대허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불법)
이후 너도 나도 반지하 개조에 열을 올렸고
정부는 주택난도 심해진 김에 겸사겸사 반지하를 합법화 시켜버리면서
지금의 반지하 문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김신조 씨는 너무 유명해진(?) 이름을 개명하고 목사로 활동한다고 들었습니다.)
각설하고 매장에 들어갔더니 독특한 분위기입니다.
50대 중년 손님분들 두 팀이 계시고, 00년대 세기말 감성(?)이 담긴 인테리어.
그와중에 최신 빌보드100 음악들이 흘러나옵니다.
제가 학생일때 자주가던 학사 주점을 보전한 것 같은 느낌이에요.
백년손님처럼 귀중하게 모시겠다는 의지가 담긴 상호와 그림...
사장님께서 직접 그리신 작품이겠죠?
(곰곰이 생각하면 사위도 아니고 손님을 손님으로 맞이하겠다는 건 당연한 말이기도 하네요...?)
늘 깨어 정진하라는 사장님의 말씀...
술집에서 깨어 정진 하라는 것은
.
.
.
취하지 않고 계속 마시겠습니다...?
오른쪽 냉장고에 막걸리가 종류별로 가득찬게 보이실거에요.
한식을 베이스로 하는 집인만큼 다양한 종류의 막걸리를 구비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걸리 먹은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패스...
기본찬으로 깔리는 땅콩볶음, 열무김치, 양배추 피클
땅콩볶음은 만드신지 제법 된듯 눅눅하네요 패스...
피클과 열무김치 둘다 무난한 맛.
밑반찬 깔렸을 때 "아이고 수고하셨습니다~"하며 소주한잔 하는게 회식의 국룰이죠.
이집은 닭도리탕, 제육, 오징어볶음, 골뱅이 무침, 각종 전류를 파는 식당입니다.
같이 간 동료분이 이곳의 시그니처가 육전이라고 해서 육전이 포함된 손님세트를 시켜보았습니다.
손님세트는 육전 + 오징어제육 +누룽지탕이 나옵니다. (45,000원)
육전이 금방 나왔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육전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어요.
육전하면 기름 자작하게 부쳐내서 가장자리는 바삭하고 그 외 부분은 부들부들한 그런 것이 떠오르는데
여기는 달걀 물과 얇은 고기를 찌듯이 구워낸 느낌.
시중에서 판매하는 느낌보단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느낌에 가까운 것 같아요.
얼핏 혹평 같기도 하지만... 이런 육전도 나름 매력이 있어요 ㅎㅎ
이곳의 특징이기도 한 것 같은데 달걀 노른자+간장 장에 육전을 찍어먹도록 하시더라고요.
이건 뭐 말 안 해도 맛있죠.
약간 스키야끼 느낌도 나고요.
문득 달걀을 달걀에 찍어먹는 게 모순적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김치찌개집 가서 밑반찬으로 김치먹는 우리네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맛있는 건 중복이고 뭐고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달걀에 달걀을 찍어봅니다.
두번째 메뉴인 오징어 제육이 나왔습니다.
누룽지탕이 세트로 있길래 너무 매운 건 아닐까 긴장했는데 기우였네요.
달달하면서 적당히 매콤 짭짤한게 밥반찬 느낌의 오징어 제육 볶음입니다.
요즘 오징어볶음이나 제육볶음 먹으면 억지로 불맛을 낸 것 같은 곳이 많은데 여기는 은은하게 났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동료들은 오징어 제육이 아쉬웠다고 합니다.)
오징어 제육 볶음이 맛이 없기 어렵죠.
기본 간만 잘 돼 있어도 밥 한공기 뚝딱, 소주 한병 뚝딱이니까요.
중간에 맛보라고 내어주신 갓김치.
담궈두신게 다 소진되고 이 정도만 남았다며 주셨는데 안 주셨으면 큰일날뻔...
그냥 먹어도 소주 안주로 좋고 다른 메뉴와 곁들여도 맛있더라고요.
갓이 끝물이라 약간은 많이 익혀졌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새콤하니 개성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까 혹평아닌 혹평을 한 것 같은데
밋밋한 육전이란 도화지에 갓이라는 물감을 삭 뿌려서 그림이 완성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한 묶음으로 판매하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셋트의 마무리 누룽지탕.
중국식 해물 누룽지탕 느낌 아니고 그냥 누룽지를 끓인 숭늉입니다.
육전이랑 오징어제육에 술 들이켜고 할 땐 손이 안 가지만
술자리를 마무리 할 쯤엔 입가심이 돼서 좋더라고요.
특별한 것은 없지만 구수하니 괜찮았습니다.
술집은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과하게 세련되거나 도회적인 느낌이 지나치게 강한 곳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요.
아무리 맛있는 안주가 있다한들
몸,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소용 없잖아요.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술맛이 나는 분위기인 것은 확실합니다.
촌스러운 인테리어, 투박한 가구들, 정형화되지 않은 음식
그리고 음습한 반지하가 주는 분위기가 역설적으로 편안해요.
사람 냄새가 나는 느낌이거든요.
영화 기생충에서 "이게 반지하 냄새야" 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영화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반지하 냄새가 났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다시피
상암은 세련된 빌딩숲과 다소 박속한 유흥가가 대비를 이루는 곳입니다만
마지막 술자리가 늘 이쪽인 이유는 아마 인간미 넘치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서이지 않을까 싶어요.
'내 삶이 메세지다' 라는 사장님의 말씀처럼
좋은 메세지를 담기 위해 좋은 삶을 살아야겠네요.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God 김치 맛있어 보이네요...ㅎㅎ
제가 갓김치를 좋아하긴 하지만 객관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ㅎㅎㅎ
내 삶이 메세지다 멋진 말이네요
사장님이 시인 기질이 있으신가봐요ㅎㅎ
상암하면 보통 DMC만 가다보니...이런 운치있는 곳이 있는 줄 몰랐네요 ㅎㅎ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저도 dmc 신도심 쪽 자주갑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