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오검 중 오오텐타 미츠요는 날카로움을 시험하기 위해 죄인의 시신 3구를 한번에 베니 2구는양단하고 3번째 시신의 뼈에 칼이 걸렸다고 에도 시대에 실험한 기록이 있고
왜란 직전에 일본에 통신사를 수행했던 황진이 전재산을 털어 두자루의 일본도를 사와서 그걸로 무쌍을 찍어 조선 육군 장수 중에서는 최고 기량을 보이기도 했음.
문제는 저렇게 잘 만들어진 걸 제외하면 날카롭긴한데 관리가 빡센 무기가 됨. 즉 관리하는 방법을 알아야 오랜 기간 병기로 쓸 수 있는데 관리하는 방법을 모르면 금방 날이 빠진다던지 문제가 발생함.
근데 그놈의 관리도 쉬웠냐고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일본에는 대대로 도검류를 관리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가문이 출현할 만큼 빡셌음.
하지만 명.청.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단 칼 자체의 위력 하나는 우수하니 꾸준히 수입을 했고 일본 측에서도 은. 구리와 함께 칼이 주요 수출입품이었음.
대단한 반박글들이 달릴 글
명검중 성능 나쁜것도 있냐
엥 일본에서 조선 칼을 수입해갔는데 잘못알고있는거 아님?
명사랑 왕조실록 참조 요망
칼 제작 자체도 거의 가챠 수준의 제작방식이었단게 문제 아닌가.
가챠 수준까진 아니고 철의 공급과 장인의 솜씨가 핵심이라 비젠 오사후네 계열은 대량으로 찍어냈음에도 다 명검임. 대표적인게 권응수장군 유물 장검.
재료가 ㅄ이니까 대부분 노천광이나 사철을 써야하니...
대단한 반박글들이 달릴 글
성능 좋으니까 명검취급 받는거 아니냐??
동아시아 무역 관련 책 보면 베트남 지역 국가들도 일본도 사갔다고 하긴 하던데
철수입 했을땐 성능 좋았음
명검중 성능 나쁜것도 있냐
천하오검은 명검으로 손꼽히지만 실전기록이 있는 건 미카즈키 무네치카와 오오덴타 미츠요 뿐이고 나머진 상징성이 강해서 실제 성능은 별볼일 없다고 함.
근데 일본도는 칼 그렇게 날카롭게 세워도 전장에서 쓸만했던거? 서양칼들 얘기 들어보면 날을 그렇게 날카롭게 안세워서 검날을 잡고도 썼다는것도 있던데
롱소드 말하는거면 1/3부분만 세웠을거임
서양칼도 날을 바짝 세워서 썼고 칼날을 잡은게 아니라 서양검은 칼의 1/3 지점은 날이 없고 손잡이임.
전법이 달라서 그렇. 서양은 갑옷입은 중기사 싸움이 주였으니 날만 날카롭다고 싸움이 안 됨. 반대로 깨부수거나 때려서 충격주는 무기가 발달. 동양은 롸약무기가 앞서서 중갑입고 깝치다 저승구경하기 딱좋음
상단의 2/3은 COP즉 칼의 위력이 극대화되는 부분이라서 날을 세워두고 1/3 지점은 날이 있어도 베이질 않으니 핸들로 만든거
아닌데요. 서양에서도 칼날 바짝 세웠고. 15세기 전후로도 날카로운 칼날에 갑옷 째로 썰렸다는 게 왕왕 나옵니다.
걍 도서관이나 서지학 자료실 가서 10세기부터 13세기 사이 사료 원문 찾아보면 되는데요.
14세기에서 15세기는 백년전쟁 사료가 제일 좋고 그 이후 시기는 장미전쟁.
검으로 갑옷 썰수 있던건 어디까지나 사슬갑옷 시대때 까지고 14세기 후반 판금화 되면서 부터도 굉장히 힘들어짐.
일본도 동아시아 근접 냉병기중 명품은 맞음. 왜냐하면 일본도 자체가 뛰어나서가 아니고 중국과 한국 단검인 한손검이 워낙 거지같아서 그랬음 중국 한국은 배우기도 어렵고 만들기도 힘든(날이 길음) 단도나 단검은 내버리고 창이나 폴암으로 갈아탄게 있엉
전국시대 내내 굴렀던 실전용 칼이랑 북방대비 이외에는 크게 문제 없었던 조선칼이랑 1600년 기준으로 비교하면 일본도쪽이 더 발전했어야 하는게 정상이겠지 머 칼 성능이 두드려서 만든거라 골고루 퍼져있어서 잘깨지고 어쩌구 이거는 그다음이야기고
네가 중국 단검과 쌍검을 모두 쓸 줄 아는데 중국 검술은 막말로 날이 길어진 나이프 파이팅이라고 보면 됨 이걸로 대동류랑 붙으면 3초만이 피떡된다
그리고 만철도 휘두르는 일본군을 썰고 다닌 항일대도
저 도는 문혁때 사용법이 사장됨
뭔 헛소리임. 문혁 당시에도 일본제국주의자들 격퇴한 공산주의의 상징이자 투쟁의 상징이라고 우대받고 아직도 저걸 가보로 보관하는 중국인도 있는데
저 도 사용법이 사장되었다고. 홍위병이 다 죽여서(...)
아니 그러니까 그 사용법도 남아있고 가보로 여겨서 멀쩡하게 있다고요. 현지 직접 가보셨음?
ㅇㅇㅇ 현지 직접 가보고 나 도 배우고 있음 직접 그러시더라 홍위병이 박해하는바람에 최근에 복원한거래
실제로 저 도 원류가 회족의 무기인데 회족이 무슨 박해를 받았는지 알면 모(....)
다만 내가 중국제 폴암인 월도나 중국제 쿼터스태프인 대간을 들고간다면 간단히 이기겠지. 한국 중국 검이 거지같은건 운용교리때문도 한 몫 함
전혀요 조선전기의 팽배수는 남쪽의 왜구 토벌 당시 걍 쳐바르기도 함.
팽배수는 야이 실드+단검이구여.
단검은 무슨 팽배수는 장검과 팽배. 표창이 주요 구성품이고 팽배를 적극 사용하는 건 아군 보호시. 단독 전투시에는 팽배를 사용 안하기도 함.
그건 등패수 아니냐?(...) 팽배수가 라운드실드 그 무거운걸 들고 표창을 던진다고?;
그리고 팽배수는 중갑보병 아님? 운용교리가 좀 다를거 같은데? 애초에 중국 단검은 경장 근접격투용 ㅇㅇ
제대로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등패는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통해서 들어온거고 조선전기 팽배수는 중앙정예군으로 팽배를 이용해 아군을 보호하고 중거리에선 표창으로 적병을 일격에 제압한 뒤 장검으로 아군을 보호하는데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야 할 수 있는 특수병과이자 조선군 핵심병종인데 무슨 국조오례의는 읽어보고 등패같은 소리하세요.
조선군 핵심 병종이라기엔 15세기 이후로 없어졌을텐데? 진짜 표창을 던졌다고? 아니 나 진짜 궁금해서 그래 자료좀 알려주라 그 무거운 라운드실드를 들고 표창을?;
그리고 팽배수 뒤에는 총통병이 있을건제 표창 던진다고?; 내가 잘못 알고있나?
그리고 내 알기에는 제일 많았던 15세기 중반에도 1천명 겨우 채웠을텐데 이게 핵심병종임?;
자료는 위에 다 적어놨는데 무슨 국조오례의. 세종실록 오례의도 안 보고 그런 소리한거였음?
팽배(彭排)는 6천인데, 지금 5천으로 정하고, 5번으로 나누어 매번에 1천으로 하여 넉달에 서로 교대하고, ㅡ 성종실록
무슨 1천명? 이미 성종 대 6천은 찍었다가 그걸 화약무기에 따라 5천으로 줄인건데
국조오례의는 의장서라 사료로 가치가 없어... 국조오례의대로 하면 조선왕릉은 수백톤짜리 화강암 관짝이어야 함 실제 전투사례인 장계가 중요하지 내가 알고있는건 15세기 말 여진족 진압이 팽배수 동원된 마지막 전투로 아는데... 그리고 팽배수 전성기에도 1천명이 안 되었어 주력병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5교대 4개월이잖아 실제 운용은 1천명이지
교대 근무제 이해를 못하나 님 계산대로면 불침번2명 서니까 1개 대대는 8명이네요 기적의 논리 지림
전쟁에 5천명 다 나가니... 그리고 5천명 팽배수 동원된적도 없고 임란때 호란때 팽배수 동원되었다는 말을 못 봐서 그럼 난 싸우자는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러는데 거 되게 공격적이네 님 병장기 사용은 해봄?
그리고 국조오례의가 무슨 ㅅㅂ 사료로 가치가 없어, 도쿄대학에 그 잡놈이 떠드는 논리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국조오례도 속.보로 계속 보완되서 전기와 중기 후기의 예식과 예법 변화와 주척 변화를 알수 있고 안에 병장기 도식이나 그런게 정확해서 신기전이나 화약무기복원할 때 국조오례의를 참고하는게 기본인데 무슨
아유 뭘 말해서 싸우자고 달려드니 할말이 없다 너 병장기 사용은 할줄 암? 그거만 알려줘
실제 운영은 세종실록에 나오듯이 적의 성세와 전황의 상황에 따라서 운영 수를 늘리고 줄이고 하는거지 교대로 근무하는게 1천명이니까 실제 운영이 천명이라고 우기면 미군은 실제 운영하는 함대 빼고 나머지 부대는 다 없는 거군요. 기적의 논리.
그리고 국내 도검협회나 공식적인 리인액트 혹은 무기 관련 연구회 하나도 등록 안된 사람 같은데, 개인이 국가기관의 감독이나 감시 혹은 허가없이 함부로 그런거 취급하지말고 공식기관을 통해서 멀쩡한 걸 배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