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무라이는 주군에게 절대충성하는 존재였다?
절대 그렇지 않다.
사무라이들이 가장 많이 활약한 전국시대에는, 주군이라도 약해보이면 당연하게 배신당했다.
애초에 사무라이들의 주군-신하 관계는 봉건제도에서 나온 계약관계이며,
경우에 따라서 자신의 주군을 바꾸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투에서 활약하면 그것을 증명하는 증서를 주군에게 발급받았으며,
그 증서를 통해 자신의 몸값을 올려 더 좋은 가문으로 이직하는 일도 빈번했다.
에도 막부를 창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무라이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해야한다는 논리는,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를 설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일본을 통치할 새로운 이념으로 조선에서 건너온 유교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충의사상를 강조, 부하들에게 충성심을 교육하여 자신의 지배에 이용했고,
이것이 후에 말하는 "주군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무사도로 발전했다.
허나 이것도 한계가 있어서, 에도 막부는 이후 수하 다이묘들의 반란,
즉 메이지 유신으로 멸망하게 된다.
2.사무라이는 전쟁에서 일본도만을 썼다?
역시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일본도는 어느정도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무기였고,
백병전이나 난전, 혹은 개인 간의 결투에서 사용하기도 했지만, 전쟁에서 활약한 무기는 어디까지나 창과 활,
그리고 총기가 유입된 이후로는 총이었다.
일본의 아시가루(잡졸)들을 재현한 미니어쳐
전국시대 최고의 가문 중 하나였던 다케다 가문의 기록 "갑양군감(자신의 가문을 과대포장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에서는,
일반적인 전투에서 사상자의 70%는 활에 의해 죽으며, 20%는 창,
나머지 10%가 일본도 및 기타 등등의 이유로 죽는다고 기록하였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간류지마" 대결 장면
이처럼 전장의 위력은 창과 활이 압도적이었지만, 일본도는 상대적으로 휴대가 간편하다는 장점 등으로
난전시 근접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혹은 개인 간의 결투에서 이용되는 일이 잦았다.
일반적인 사무리아의 모습. 활로 무장하고 있지만 각자 전부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상시에도 마음대로 칼을 차고 다닐 수 있는 권리"인데,
이것이 사무라이의 권력을 상징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도는 사무라이의 권력의 상징 및 사무라이임을 나타내는 그 자체로서 신봉되었던 것이다.
3.사무라이는 총을 경멸하였다?
이것 역시 거의 틀리다. 총기가 일본에 수입되던 당시, 총기의 위력에 감탄한 사무라이들은
각자 이 비싼 무기를 어떻게 전쟁에서 운용할지 고민하였다.
그러나 총을 외국 상인들에게 사오는 것은 굉장히 비쌌고, 일본에서 자체 생산하는 것도 힘들었다.
때문에 총기의 위력을 알면서도 그것을 전략적으로(부대 단위로) 운용하기 힘들었던 지역이 많다.
오다 노부나가의 "나가시노 전투" 묘사
부대 단위로 총기를 운용하고 있다
즉 총기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던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컸고,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대가문에서는 총기 부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했다.
물론 보수적인 사상의 사무라이도 많았던 터라, 이 "새로운 무기"에 의문을 품거나
혹은 그 위력을 얕봤던 사무라이 가문도 많았으나, 이는 총기 부대를 전략적으로 운용한
오다 노부나가에게 일본 굴지의 대가문들이 굴복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사격술의 명인으로도 유명했던 "아케치 미츠히데"
또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무라이들은 스스로도 사격술을 연마했으며,
꼭 개인이 사격술을 연마하지 않더라도 부하들에게 사격술을 훈련시켰다.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 묘사된 "신선조"
실은 이들도 전쟁에선 총을 잘만 썼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당시 보수적인 사무라이들의 집단이었던 신선조(신센구미) 또한
전쟁에서는 총을 잘만 썼으며, 이 시대쯤 오면 총기의 위력이 많이 향상되어
이미 총 없이는 전쟁을 이길 수 없는 시대였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진정한 사무라이들은 일본도만 쓰는것처럼 묘사한 영화
물론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4.마치며...
이처럼 사무라이들에 대해 (주로 서양인들이, 혹은 일본 자국민조차도) 흔히 가지게 되는 환상들은
대부분 후대의 창작 혹은 역사적 기록이 과장된 것이며, 실제 사무라이는 봉건제 정치에서 필수적인
"무력을 가진 지방 소영주"에 가까웠다.
그들은 결코 주군에게 충성만 하는 존재도 아니었고, 일본도만을 고집하는 존재도 아니었으며,
총기를 멀리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퍈하게 생각해서 용병정도로 보면 되나
용병 개념이랑은 다름. 용병은 돈 안되면 빠지지만 얘네는 그건 안됐음
활 다음으로 사망률이 높았던 것 : 짱돌
섀도우택틱스에서도 사무라이들 총 존나 쏘던데 그게 맞는 고증이었군
그냥 크루세이더킹 같은느낌이었네
park.kid
그렇게 꼭 딱딱 나뉘지는 않음 후다이라고 해도 배신하는 일도 빈번했고 이에야스의 예시처럼 후다이에게도 경력서를 써주려는 일도 있었음
전쟁에선 리치가 갑이지 창 활 총을 칼로 이기는건 다스베이터 키리토 같은 무협지 주인공들 뿐
봉건체제 자체가 중앙집권에 비해서 각각의 계약으로 인한 고용 형태에 가깝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서 말하는 충성하고는 거리가 크고 일본 역사에서 중앙집권체제가 뿌리내린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무라이가 충성 운운하는 것은 웃기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몇 사례에서는 단지 계약 관계의 주종관계가 아닌 인물이나 가문에 감화되어 끝까지 주군을 모시는 사례가 있었고 그것을 본 후대의 역사가들이 미화해 가면서 그런 이미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토쿠가와 바쿠후는 실제로 반란이나 하극상을 걱정하여 조선의 유학체제를 배워가려고 했던 부분도 있었고 충성심 깊은 사무라이라는 사례들은 도쿠가와 바쿠후 시대를 배경을 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죠 (분명 이시다 미츠나리를 비롯한 서군 멤버들이 토요토미 가문에 충성해서 끝까지 토쿠가와에게 반발해서 충성의 심볼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토쿠가와 바쿠후 시대의 충열지사에 비해서 그들은 시대를 못 읽은 어리석은 구시대 세력처럼 묘사되곤 합니다) 신센구미도 사실 기울어져가는 토쿠가와 가문을 끝까지 수호해가는 이미지가 있는데 저는 그런데 이게 구세력의 발악인지 진짜 충성심의 발로였는지 구분이 좀 애매할 때가 있더군요 아무튼 쿄토에서 활개칠 때는 총을 쓰지 않았던거 같은데 보신전쟁 같은거 거쳐서 홋카이도로 밀려날 때는 서양식 군체제를 받아들여서 총 쓰고 그러대요
교토에서 총을 쏘지 않은것은 단순히 전쟁중이 아니었던 탓이 큽니다. 당시 막부측과 유신지사측은 서로 적대하긴 했지만 공식적으로 전쟁중은 아니었고 서로 회견도 가질 정도였죠. 그런 상황에서 유신지사를 처리하려는 신센구미 역시 적당한 죄목을 씌워서 "체포"하는것이 최선이었고 전시가 아니라도 휴대 가능한 일본도를 쓰는것이 합리적이었죠.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곧바로 총기를 도입.....
아항..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기본적으로는 체포하려는 목적이었긴 하네요 치안 부대였으니 자세히 생각 안 하고 이케다야 사건 같은 거 밖에 생각이 안나서 잠시 햇갈렸어요 ㅋㅋㅋ
뭐 명목은 치안부대이지만 실제로는 체포보단 살상을 더 많이 했으니까요ㅋ 또다른 이유가 있다면 신센구미의 국장인 곤도 이사미의 원류가 도장사범이기 때문에 본인들의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 검술을 강조한 탓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냥 야쿠자라고 생각하면 딱 감이 온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