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중원에 입관한 뒤 청조에 충성하는 한족 출신 장수들을 번왕으로 임명하여 일정 지역의 통치를 맡겼다.
그것은 명나라의 저항 세력과 농민 반란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청에 충성하는 한족 출신 지도자들에게 일정 지역의 행정을 맡겨
보다 수월히 복속작업을 행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희제 시기가 되면서 한족 외번들의 부정적 영향이 커졌고
결국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강희제의 중앙 정부와 오삼계를 중심으로 한 번국 세력들간 충돌이 일어나 삼번의 난이 발발했다.
어쨌든, 이러한 '청나라 내의 한족 왕'들은 최초에 평서왕 오삼계, 평남왕 상가희, 정남(靖南)왕 경중명, 정남(定南)왕 공유덕 이었다.
(경중명은 제대로 번부를 설치하기도 전에 실책으로 말미암아 자결했으나 일단 정남왕 칭호는 받았고 왕위도 아들에게 이어졌으니 거론한다.)
이들 중 오삼계는 시작부터 평서왕 직위를 받았으나, 나머지 세 명은 청이 입관하기 전 삼순왕이라고 하여 '귀순자 출신 왕'으로 한데 묶여 왕공 작위를 받았다.
그러다가 입관한 뒤 일정한 공적을 세우고 새로운 왕작(위의 왕호들)을 받게 되어 왕으로서의 격이 높아졌다.
삼순왕 시절 상가희, 경중명, 공유덕의 왕으로서의 격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 사학자는 삼순왕을 '친왕'에 상응한다고 표현한 적이 있으나
사실 그것은 형식상 위치일 뿐, 실제 의전서열을 볼 때에는 이들은 말만 친왕이지 실제로는 친왕 밑의 군왕보다 급이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하자면 버일러나 버이서(3등, 4등급 왕공)와 비슷한 수준이 바로 삼순왕의 실질적 직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왕호를 받고, 강력한 군사집단과 영토를 점유하게 된 뒤부터는 이들의 형식상 서열과 실제 서열은 까마득히 높아졌다.
(공유덕과 경중명, 상가희등은 이전에도 독립집단인 천우병과 천조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들은 2등급 왕공인 군왕을 뛰어넘게 되었고,나아가 1등급 왕공인 친왕에 상응하여 어느 시점서부터는 평서친왕, 평남친왕, 정남친왕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 번왕들의 힘을 모두 합치면 단기적으로 청조 중앙정부에 필적한다는 평가가 있는데,
실제로 삼번의 난 당시 이들은 상당한 상승세를 누리며 강희제를 코너 까지 몰았다. (공유덕은 포함되지 않는다. 번을 형성치 못하고 남명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