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환은 강원감사를 지냈던 이광준의 아들이다. 그는 1619년 벌어진 명-조선-예허 연합군의 후금을 상대로 한 대규모 공격작전과 그로 인해 촉발된 사르후 전역(薩爾滸之戰)에
조선군 소속 장교(도원수 강홍립 휘하 종사관)으로 참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민환은 사르후 전역의 부속 전투인 부차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전, 이후 부차 전투의 후금군 주장이었던 암바 버일러(Amba beile) 다이샨(daišan)과 조선군 지도부간 협의에 따라 후금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이민환은 후금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만난 후금측 지휘관들의 여진족식 이름을 조선식 한자표기법으로 음역하여 기록했다.
예컨대 후금의 구사이 어전이자 누르하치 휘하 개국공신이었던 어이두(Eidu)는 어두(於斗), 누르하치의 6촌격 종제이자 후금 최고위 정무담당자 아둔(Adun)은 아두(阿斗), 누르하치의 사위이자 당시 후금의 최고 선봉장이었던 양구리는 언가리(彦加里)인 식이었다.1
이렇게 조선식 음역표기로 기록된 후금군 지휘관 중 '사'(奢)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이민환의 기록 내에서 부차 전투 당시에 조선군과 싸웠던 후금군 지휘관 중 한 명이자 후금군 최고위 장수중 한 명이라고 표현되었으며, 후금 장수중 가장 수완이 좋은 축에 속하는 인물이라고도 표현되었다.
이민환이 기록한 '사'라는 장수는 이민환의 기록문만 가지고는 후금의 누구였는지 유추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그러나 교차검증을 진행하면 그가 누르하치의 양자이자 후금 최고위 장수인 후르한(Hūrhan), 이칭 다르한 히야(darhan hiya)임을 파악할 수 있다.
후르한과 '사' 라는 이름이 도저히 이어지지가 않는 탓에, 꽤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후르한'이라는 이름이 '사'로 음역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사실, '사'라는 호칭은 이름인 후르한을 음역한 것이 아니라 후르한의 칭호에 붙었던 '히야(hiya)'를 음역한 것이다.
후르한은 1609년 음력 12월, 동해여진 워지부의 후여 골로(Huye golo) 공략을 지휘하여 포로 2천여명을 획득하는 대공(大功)을 세웠다. 이 때 후르한은 누르하치로부터 공적에 대한 포상을 받고 다르한 히야(darhan hiya)라는 호칭을 수여 받았다. 다르한은 '면세자', '성스러운' 이라는 뜻이며 '히야'는 시위(侍衛)를 뜻한다.2
후금에서는 한 번 호칭을 획득하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름 대신 호칭으로 부르거나, 이름에 연이어 호칭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후르한 역시도 이에 해당하여 다르한 히야라는 호칭을 획득한 뒤에는 다르한 히야라고 호칭되었으며 그와 동일하게 기록되었다.
아마도 이민환은, 후르한의 평시 호칭(다르한 히야)를 듣고서 다르한이 성이고 히야가 이름인 줄 알았던 듯 하다. 그리하여 본인이 이름으로 판별한 히야를 음역하여 사奢 라고 표기,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음역만 가능하다면 어떤 한자를 쓰던지는 상관 없어서, 1621년 외교임무 겸 첩보임무차 요양을 방문했던 정 충신은 본인의 보고서한에 후르한(다르한 히야)를 대사(大舍)라고 기록했다.3 이는 '다르한' 부분을 대(大)로 음역하고, 히야 부분을 사(舍)로 음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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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비단 이민환뿐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인들은 후금의 인명을 조선식으로 적절히 음역했다. 대표적인 예시는 잉굴다이->용골대(龍骨大)
2.후르한은 이 이전부터도 '시위'의 역할을 맡아 후르한 히야(Hūrhan hiya)라고 불리고 있었다.
3.『조선왕조실록』광해 13년 음력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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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렸던 것을 약간 손봐서 다시 재업
이런거 조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