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네덜란드 화가 휘베르트 보스 작품)
16세기~17세기 초 무렵 존재했던 해서 여진 계통의 거대 세력들. 하다, 호이파, 울라는 1613년까지 차례대로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에 의해 멸망당하여 건주 세력에게 흡수되었다. 이들이 멸망한 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해서 여진 세력은 여허였다. 여허는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한 여진 통일'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1619년 중후엽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1619년 음력 8월, 여허에게도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건주 여진의 후신이자 여진 통일 국가인 후금의 대군이 누르하치의 친정 아래 여허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 쳐들어 온 것이다. 그것은 사르후 전역에서 후금이 명-조선-여허 삼각동맹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지 5개월이 조금 지나서였다.
이 전투에서, 동여허의 군주 긴타이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대군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긴타이시는 자신이 이길 수 있는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동여허 중앙부의 누각에 고립되자 후금측에 '확실한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그 협상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항복을 포기했다.
대신 긴타이시는 자신의 최후의 보루이던 팔각 누각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1살을 기도하는데, 죽기 전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던지 화상을 입은 채로 누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머잖아 후금군에게 생포되었고, 이후 누르하치의 명령에 따라 교살로 처형되었다. 누르하치의 말에 따르면, 치료를 해도 살 가망이 없었기에 처형된 것이었다.1
이상까지가 여허의 멸망에 관한 실제 역사의 간략한 요약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 이야기에 야사 한 토막이 덧붙여진다.
야사에 의하면, 팔각 누각에서 빠져나온 긴타이시는 후금군에 의해 포박된 뒤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누르하치와 후금의 왕자, 장수들을 향해 독기서린 저주를 퍼붓는다. 먼 훗날 자신의 일족(여허나라 씨족)이 너희들의 나라(후금, 청)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저주였다.
누르하치는 그런 긴타이시의 저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긴타이시의 처형을 명령한다. 결국 긴타이시는 그대로 처형되었고, 동여허의 마지막 지도자는 사라졌다. 동여허의 백성들과 병사들, 그리고 긴타이시의 자식들을 비롯한 나머지 여허나라 씨족은 후금에 복속되었으며, 이후 후금의 백성, 그리고 신규 귀족으로 편입된다.
시간이 흘러, 여허 왕족의 씨족이던 여허나라 가문은 청의 기인 가문으로 완전히 정착했다. 그런 여허나라 가문에서, 19세기 초중엽 여인 한 명이 태어났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용모가 수려해졌고, 덕택에 궁에 입궐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함풍제의 후궁으로서 그의 아들을 낳았고, 함풍제 사후 그 아들이 황제에 즉위함으로서 태후가 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청조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효흠현황후, 흔히 알려지길 서태후였다.
위의 이야기는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언급했다시피 이것은 어디까지나 야사, 혹은 부풀려진 전설에 불과하다.
서태후가 여허나라 씨족인 것은 맞으나 실제 역사상 긴타이시는 화상으로 인해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저주를 남겼을 턱이 없으며, 또 만약 남겼다 하더라도 이런 형태의 유언실현은 그저 우연의 일치의 산물일 뿐이다.
이러한 유형의 야사는 나라가 말기에 이르러 쇠퇴해가는 과정 속에서, 혹은 나라가 멸망한 뒤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가십적이면서도 불만표출적인 서사 산물이다. 아마도 서태후가 여허나라 씨족이 아니라 울라나라 씨족이었다면 이 저주의 출처가 울라의 마지막 군주로서 누르하치에게 패망했던 부잔타이였을 것이며, 하다나라 씨족이었다면 하다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였던 멍거불루가 출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야사가 만들어질 정도로, 긴타이시의 저항이 오래토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참조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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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다만 치료의 가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누르하치가 긴타이시의 목숨을 보전해 주었을지는 확실치 않다. 긴타이시는 지금껏 누르하치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해오던, 여진족내에서의 누르하치의 마지막 경쟁자였다. 그가 부상 없이 멀쩡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누르하치가 그의 목숨을 보전해 주었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