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이는 1570년대에 건주 여진 수장중 한 명이었던 히타라 씨족의 아구, 속칭 두두 아구1의 장남이었다.
두두 아구는 명나라로부터 직첩을 받고 건주 우위도지휘로서 인정을 받은 여진족 수장이었으나, 무역 문제와 요동에서의 명나라의 불공정한 처사등의 문제로 인해 명의 수비 배승조와 다툰 끝에 배승조를 죽이고 명나라를 상대로 반기를 든 인물이었다.(1573~1575)2
그러나 당시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몇 차례에 걸쳐 토벌되어 기가 꺾였고, 결국 세력을 잃은 채 해서여진 세력 '하다'의 군주 완 한에게로 도망쳤다. 하지만 완 한은 명나라에 우호적인 여진 군주였기 때문에, 아구를 숨겨줄 이유도 도와줄 연유도 없었다. 결국 아구는 오히려 완 한에게 사로잡혀 명나라에 넘겨졌다. 명나라에 넘겨진 아구는 1575년 처형당했다.
아타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포박하여 명나라에 넘긴 완 한과, 부친을 죽인 명나라에 원한을 가지게 되었지만 당장은 힘이 없었기에 그 분노를 참아 넘기며 오히려 하다의 왕자 후르한3에게 몸을 의탁하며 실력을 길렀다. 그러다가 완 한 치세 말년에 이르러 하다의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 한 마저 죽자 드디어 또 다른 해서여진 세력인 여허와 연대하여 하다를 공격했으며 그 뒤에는 명나라를 상대로도 공격을 시작했다. 1582년의 일이었다.
요동을 침략하는 아타이에게 검을 겨눈 것은 '아구의 난' 이후로 여전히 '요동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던 총병 이성량이었다. 1582년, 이성량은 조자곡 일대에서 아타이의 군대와 치열한 혈전을 벌였고 1천 5백에 달하는 피해를 아타이에게 입힌다.4
그러나 아타이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항했다. 1583년 그는 자신의 동생 아하이와 함께 다시 군대를 일으켜 혼하 일대의 명나라 영토를 대거 약탈했다.
그런 아타이의 지속적인 공격에, 이성량은 다시 한 번 군대를 일으킨다. 그는 이번에는 아타이와 아하이를 격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아예 그들의 세력을 뿌리 뽑은 뒤 건주에 새로운 친명세력을 키우려 했다. 그들을 격퇴한다고 해도, 완전히 제거치 않으면 또 다시 힘을 키워서 명나라의 변방을 약탈할 수 있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건주의 추장인 니칸 와일란, 기오창가와 그 아들 탘시를 향도로 앞세운5 이성량은 대군을 동원하여 아타이의 구러성과 아하이의 샤지성을 동시에 포위하고 공성을 개시한다. 이 전투에서 아하이의 샤지성이 먼저 함락되고, 이후 아타이의 구러성이 함락되었다.6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친명파 여진 부족장 기오창가와 탘시가 명군에게 살해당한다. 이 살해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니칸 와일란이 기오창가와 탘시가 명군에게 살해당하도록 계책을 꾸몄다는 설, 이성량이 그들을 일부러 죽였다는 설, 단순 오인살해라는 설등이 주요 가설이다.
어쨌든, 그들의 죽음은 1차적으로 명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에 이성량은 기오창가의 손자이자 탘시의 장남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하고 약간의 배상을 해준다. 칙서 30통, 말 30필이 바로 그 것이었다.
장남은 그 배상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조에 충성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다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겉으로만 충성을 다짐하고 속으로는 복수를 생각했는지는, 당시로서는 맹세를 한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를 문제였으나 어찌되었든 일은 그것으로 봉합되는 듯 했다.
그러나 탘시의 장남은 단 한가지, 니칸 와일란만은 자신이 죽이게 해달라고 했다. 아마도 명군에 의해 자신의 부친과 조부가 죽은 것이 니칸 와일란의 계책탓이라고 생각한 듯 한데, 이후 니칸 와일란의 행보를 보면 실제로 신빙성이 있어서 문제였다. 이성량은 그 요구를 거부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니칸 와일란을 따로 보호해주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든, 명조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기에 장남은 자신이 자구적으로 복수를 하고 자신의 세력을 일구고자 했다.
당시의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아버지가 물려준 13벌의 갑주, 자신을 따르는 30여명의 친족과 구추(종사)들. 몇 안되는 동맹자. 안팎의 수많은 적.
그리고 '누르하치'라는 하잘 것 없는 이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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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이의 난 2부에서는 1582년에 명나라를 향해 반기를 든 아타이가 마침내 몰락하고 참살당한 구러성 전투의 전개를 보다 상세히 다루어 보고자 한다.
구러성 전투를 다룬 사료들은 후금과 청의 태조계 실록(무황제실록, 고황제실록, 만주실록)과 기전체 사서인 명사, 청사고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 사료에서 나타나는 구러성 전투의 전개 과정과 그 결말은 사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다만, 이들 사료들을 모두 추합하며 순서를 짜맞추면 어느 정도 그 전말이 드러난다.
이 글에서는 그 전말에 대해 약소하고 간략히 다루어 볼 것이다.
위에서 이미 서술했듯 아타이는 1573~4년경 명나라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이성량에 의해 토벌당하고 1575년 처형당한 아구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뒤로 얼마간 잠자코 힘을 기르다가, 1582년부터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성기 시절의 요동총병 이성량, 그리고 그가 이끄는 명나라 요동 방위군은 아타이와 그의 세력이 감당하기엔 너무 강한 상대였다. 1582년 조자곡 전투에서 아타이는 대패했고 결국 본인의 본거지인 구러성으로 도망친다.
1583년 아타이는 본인의 동생 아하이와 함께 다시 거병하여 요동의 혼하 일대를 겁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량을 분노케 만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성량은 대대적으로 토벌군을 구성하고 친명파 여진족 향도들7까지 동원하여 아타이의 구러성과 아하이의 샤지성으로 진격한다. 그것은 1583년 2월의 일이었다.
머지 않아 구러성과 샤지성은 이성량이 동원한 대군에 의해 포위된다. 이때 구러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전력이 온전한 상태였으나 샤지성의 경우 전력이 약 절반 이하로 감소해 있었는데, 샤지성 거주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군민이 명군의 공격을 맞이하기 전에 성을 빠져나가 도피했기 때문이었다.8
이런 상황에서 이성량은 본인이 구러성 공격을 지휘하고 본인 휘하의 요양부총병 진득의에게는 샤지성 공격을 맡기고자 했다. 아타이가 난의 주동자이기도 했으나, 구러성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온전한 상황에서 이성량 본인이 지휘하는 토벌군 주력이 구러성을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뒤 이성량은 각 성을 포위하고 있는 양군에 공격을 명하여 공성전을 개시하였다.
공성전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샤지성 공격을 맡은 진득의는 샤지성을 함락하는데에 성공했다. 아하이는 전투 과정에서 전사했고, 샤지성의 군민들은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샤지성은 그렇게 빠르게 무너졌지만 구러성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구러성은 화공(火攻)을 비롯한 갖은 공격에도 꽤 긴 시간을 버텼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때는 전투 시작 시기로부터 약 이틀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고 한다.9 당시 건주여진의 성보 수준과 명군의 화력을 생각해 보자면 상당한 선전이었다. 아타이 본인이 필사의 각오로 버틴 것이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러성은 최종적으로 함락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성량이 작정하고 덤비는 상황에서 아타이가 계속해서 버티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구러성은 전투 이틀여 만에 함락당했고, 아타이는 살해당했다.
그런데 구러성의 최후는 사료마다 그 묘사가 다르다. 크게 두 가지로 묘사가 갈리는데, 하나는 '속임수에 의한 함락', 또 하나는 '직접적인 공격에 의한 함락'이다.
후금의 만문사료인 겅기연 한의 이전 좋은 기록(현행전례)에 의하면 구러성의 방어가 튼튼한 탓에 결국 성에 있던 말단인을 '아타이를 죽인 자에게 성을 줄 것이다'고 속여 그로 하여금 아타이를 죽이게 하여 성을 함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와 아버지 탘시 역시 명군의 향도로 나선 여진족 추장, 니칸 와일란의 간계에 의해 명군(이성량)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10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은 현행전례에서 더 나아가서, 구러성이 함락되지 않자 분노한 이성량에게 겁박받은 니칸 와일란이 성안의 군민들을 선동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타이를 배신하게 하였고, 그로서 아타이를 제거했다고 한다. 아타이가 제거되자 이성량은 성안 사람들에게 문을 열게 하여 구러성을 함락했는데, 그와중에 니칸 와일란이 명군을 교사하여 기오창가와 탘시를 죽였다고 한다. 현행전례에서는 아타이를 제거하기 위한 속임수를 쓴 주체가 확실하지 않은 반면, 여기서는 확실히 니칸 와일란이 주체임이 드러난다.
청사고 태조본기 역시 기본적으로 위의 서술을 따르지만 자세한 묘사는 생략되었으며, 결정적으로 니칸 와일란이 아타이의 장정들이 아니라 '아타이 본인'을 속였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명사 이성량 열전, 청사고 왕고 열전 등에는 구러성이 '직접적인 공성을 통해' 함락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타이 본인 역시도 전투중 전사하였다고 서술하고있다.
이성량 열전에는 간단히 이성량이 출정하여 구러성을 화공, 아타이를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11, 왕고 열전에는 그보다 자세하게 이틀여에 걸친 화공을 통한 공성과정 속에서 아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전자의 '속임수를 통한 함락'과 후자의 '무력을 통한 직접적인 함락'중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은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등에서 니칸 와일란의 계책으로 인해 아타이가 죽고 구러성이 함락된 것은 누르하치의 초창기 숙적이자 원수인 니칸 와일란의 비겁성을 강조하기 위한 후금~청 사관의 의도적인 편집으로 보이며, 실제로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난다. 이들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현행전례'에는 비록 니칸 와일란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속임수를 썼다고는 명시되지 않았으나, 공격측인 명측의 비겁성을 강조함으로서 이 전투에서 죽은 아타이의 억울함을 부각한다.13 더불어 니칸 와일란의 기오창가와 탘시에 대한 살인교사는 그대로 나오면서 니칸 와일란의 비겁함 역시도 부각한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자면 아무래도 명사의 이성량 열전과 청사고 왕고 열전의 서술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된다.14
그러나 이것 역시 결국 추정에 불과하다. 전자의 '속임수를 통한 함락' 역시 여전히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로 인해 진실은 누구도 확단치 못한다.
어찌되었건간에 구러성은 그렇게 무너졌고 아타이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누르하치의 부친인 탘시와 조부인 기오창가 역시도 명군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기오창가와 탘시가 왜 그 현장에 있었는지, 그들이 정확히 누구의 뜻에 의해 죽은 것인지는 사료마다 달라 확답할 수 없으나(앞서 말했듯 그들 역시 이성량의 향도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 역시도 확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그들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었음은 확실하다.
이 사건 이후 누르하치는 명나라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그 배상에서 더 나아가 니칸 와일란을 죽이게 해달라고 명나라에 청원하였다. 누르하치는 니칸 와일란이 자신의 부친과 조부를 죽이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었고, 실제로 이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꼭두각시가 필요했던 명나라로서는 그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누르하치는 30여명이 채 안되는 동지들, 몇 안되는 동맹자들과 함께 '부친과 조부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준비해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녕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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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친 '아구'의 복수를 명분으로 명나라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던 건주 구러성의 성주 아타이는 결국 1583년 2월 구러성 전투에서 명군 토벌대 총지휘관 -요동총병 이성량에게 패배하고 전사한다. 그것으로 아타이의 난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의 여진인들이 참살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건의 끝인 동시에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 아타이의 난 진압 과정에서 허투 알라의 버일러였던 기오창가와 그 아들 탘시가 명군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한 탓이엇다.
탘시의 아들이자 기오창가의 손자인 누르하치는 사태 이후 명나라에 대해 본래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이성량에게 소소한 사과와 배상을 받았으나 누르하치는 거기서 더 나아가 책임자에 대한 복수를 원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누르하치가 꼽은 책임자란 아타이의 난 당시 명군의 편에 서서 종군한 건주 버일러 니칸 와일란이었다. 누르하치는 니칸 와일란이 바로 자신의 부친과 조부가 죽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었고, 그렇기에 명나라에 복수를 청원했다. 그러나 이성량을 비롯한 명측은 누르하치의 해당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배상으로 해당 문제가 종결지어졌다고 파악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누르하치의 편을 들어 니칸 와일란을 제거하자면 친명파 추장 하나를 스스로 제거하는 셈이 되었다. 그들로서는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명측과 이성량이 니칸 와일란을 도우며 누르하치를 찍어누르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로서는 친명파 버일러였던 니칸 와일란과 누르하치 둘 중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의 자세를 견지하려 했던 것 같다.15
이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복수'와 '생존', 그리고 '야망'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위해 니칸 와일란을 칠 것을 결정했다. 그는 약 3개월여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니칸 와일란의 투룬성을 공격했고, 니칸 와일란을 도망치게 하여 그의 영향력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 때서부터 본격적으로 누르하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583년의 최초 거병 당시 누르하치의 힘은 어느 정도였을까? 일단 거병 직전 누르하치는 고작 30여명의 친족, 구추들만을 직속으로 두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30여명'이라는 직속 수하 숫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견 나온 명의 부총병 이여매의 거론으로 확실시 된다.16 이여매는 비록 명나라 장수이지만, '그' 이성량의 아들로서 누르하치의 당시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발언은 신빙성이 상당히 높다.
한편, 누르하치에게 존재하던 갑주는 고작 13벌이었다.17 그것은 부친 탘시의 유품이었는데, 그로서 누르하치는 30명의 친족과 구추들 중 정예 12명(한 명은 자신)에게 갑주를 입혀줄 수 있었다. 16세기 당시 여진 세력의 갑주 수급률을 생각해 보자면 비율이 아주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비율이 아니라 숫자였다. 고작 13명의 갑병, 도합하여 30명의 병력은 '거병'을 운운하기에 심히 부족한 전력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르하치에게 '동맹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기야무후의 가하샨 하스후와 잔 비라의 창슈와 양슈 형제, 그리고 사르후의 노미나와 나이카다 형제가 모두 누르하치의 거병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니칸 와일란의 안하무인한 태도와 행보를 내심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니칸 와일란에게 대항할 구심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마침 명망이 높은 가문의 누르하치가 그 역할을 자처하였으므로 그들은 누르하치와 함께 '니칸 와일란 토벌'의 맹세를 나누었다.
이들 중 노미나와 나이카다 형제의 경우 거병전 누르하치의 친족이자 닝구타 버일러 세력18내의 반(反)누르하치 파의 인물 중 한 명인 롱돈의 종용을 따라 중간에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러나 나머지 세 명, 가하샨 하스후와 창슈, 양슈는 누르하치를 배신하지 않고 그와 함께 투런성 공략에 함께 했다.
이들의 군세를 모두 합쳤을 때에, 누르하치의 군대는 약 100여명이었다. 그 중에서 갑옷을 입은 갑병(uksin)은 30여명이었다.19 혼자서 움직일 때보다는 무척이나 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하기 짝이 없는 군세임은 마찬가지였다. 명나라가 주시하던 수준의 추장이었던 니칸 와일란을 상대로 공성전을 시도하기에는, 객관적으로 턱없이 모자른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그대로 진격을 개시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첫 원정을 시작했다.
한편, 원초적 만문 사료인 겅기연 한의 이전 좋은 기록(nenehe genggiyen han i sain yabuha kooli uheri juwan nadan debtelin, 현행전례)에는 누르하치의 거병 당시 병력수에 관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서술이 나온다.
현행전례 원문을 살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서술이 존재한다.
[sure beile i gūsin uksin. emu tanggū cooha i tere turun i hoton be afame gaiha.]
해당 부분은 수러 버일러(누르하치)가 군대를 동원하여 투룬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서술구이다. 그런데 'emu tanggū cooha i tere turun' 부분에서 초오하(군대)의 다음에 오는 i의 해석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i를 일반적 용례대로 '의'로 해석한다면 30명의 갑병으로 100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투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풀이가 되는 반면, i를 '으로' 등으로 해석할 시 30명의 갑병, 100명의 군대로 투룬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해석이 된다.
이에 대해, 이시바시 다카오의 경우 투룬성에 100명의 니칸 와일란의 군대가 남아있었다고 해석하여 1583년 5월의 투룬 전투 당시의 누르하치의 군대를 30명, 투런성의 군대를 100명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실상 현행전례 이후 편찬된 모든 후금-청 계통 사료들이 당시 누르하치의 군대를 '30명의 갑병, 도합 100명 군대'20로 비정하고 있다는 점을 보자면 현행전례 역시도 '30명의 갑병, 100명의 군대'로 투런성을 공격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 가지 특별한 것은, 현행전례 이후의 사료들은 모두 누르하치가 데리고 있던 병력수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누르하치의 군대를 확실하게 한 문장으로 독립시켜 다룬다는 것이다. 이는 현행전례처럼 문법적인 문제로 인해 해석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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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가 제거한 계모 '하다나라 컨저'의 형제들, 즉슨 삼잔, 남잔, 너신, 완지간41은 1583년 음력 8월 무렵 누르하치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누르하치가 계모를 죽인 것을 원망치 않으니 누르하치 역시도 본인들의 잘못42을 나쁘게 생각치 말라고 하였다.
물론 그들이 감정적으로 누르하치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참 상승기세를 타고 있는 누르하치와 옛 원한으로 다투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기에 그렇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그들의 화해 제안을 꽤나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누르하치는 내외부에 적들을 너무 많이 만든 상태였고 그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여러모로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럴때 자신과 상호간 원한관계에 있던 삼잔 일족이 먼저 화해를 청하니 그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계모쪽 일족과 화해를 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자신이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힌 사르후 성에서 온 사절들이었다. 그들은 누르하치가 지난 전투에서 끌고 간 볼모들, 즉슨 본인들의 가족을 돌려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들은 그 대가로 누르하치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며 누르하치에게 고두43를 했다.
누르하치는 이들의 요청에 마음이 약해졌는지 아니면 이들의 요청이 충분히 진실성이 있다고 여겼는지 그들의 요청을 꽤나 시원하게 들어주었다. 누르하치는 본인이 볼모로 데리고 있던 사르후 장정들의 가족들을 그들에게 돌려주었고 대신 그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며, 사르후의 사절들은 그러하겠다고 답변한 뒤 돌아갔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사르후 복속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르후로 돌아간 사절들은 거의 곧장 누르하치에게 대항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에 의해 파괴되었던 성을 수리하고 누르하치에게 적대적인 이들과 연대한 것이다. 사르후가 누르하치에게 진실로 복속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사르후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반기를 들 기미를 슬금슬금 보이고 있을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의 동맹자이자 친구인 가하샨 하스후에게 본인의 여동생인 아지가를 시집보냈다. 그 목적은 당연하게도 하스후와 처남매부 관계를 맺음으로서 동맹간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는 이미 노미나와 나이카다의 배신과 그로 인한 그들과의 충돌을 겪은 직후였기에 동맹간 관계에 크게 신경을 써야 했고 그 결과는 바로 정략혼이었다.
가하샨 하스후를 매부로 삼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르하치는 곧 새로우면서도 이미 충돌이 예상된 적과 맞붙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해서 여진계 세력인 하다였다.
하다는 강력한 통치자였던 완 한의 치세 아래에서 지난 수십년간 여진 세력중 최강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완 한 치세 말년에 이르러 내분과 영향력 상실로 급격히 약해졌다. 완한이 1582년 죽은 뒤 그러한 약화 기조는 더욱 강해졌고, 완 한의 뒤를 이어 하다를 계승한 그의 아들 후르한이 1583년에 죽고서는 사실상 최악의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후르한의 아들 다이샨44, 완 한의 다른 두 아들인 캉구루와 멍거불루가 하다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형국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 하다였으나 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아직(1583년 음력 8월)까지는 세력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 그 무렵의 하다에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 누르하치파 였던 캉기야, 초키타, 기오샨45이 병력을 요청하러 왔다. 그들의 병력 요청 목적은 '누르하치 제거'였다. 누르하치가 컨저를 제거하고 독선을 펼치는 것을 명분으로 그를 제거해달라는 것이었다.
하다측은 이 요청을 수락했고 숫자 미상의 군대를 파병했다. 아마도 이 당시의 하다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만큼 그리 많은 군대는 파병하지 못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의 누르하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숫자의 군대가 파병되었으리라 유추된다.
하다의 파병군을 안내한 것은 캉기야, 초키타, 기오샨과 마찬가지로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 누르하치파 였던 '리다이'였다. 그는 닝구타 버일러의 셋째였던 소오창가의 큰 아들이자 조오갸의 성주로서 꽤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인도를 받은 하다군은 누르하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후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그 곳을 습격, 약탈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후지' 근처에는 하다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침 그 근처에는 누르하치 휘하의 장수였던 '안피양구' 46역시도 있었다. 그는 '바순'이라는 용사와 함께 12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47 근처에 하다군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말을 몰아 하다군이 약탈물을 분배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피양구는 하다군이 노획물을 분배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휘하의 기병대와 함께 즉시 돌진하였다. 하다군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상태에서 안피양구의 습격을 받자 궤멸적 피해를 입고 혼비백산 퇴각하였다. 거기서 하다군은 4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는데, 안피양구와 그가 이끌던 군대의 숫자를 생각해 보자면 대단한 타격이었다.48
하다군의 향도 역할을 맡았던 리다이 역시도 본인의 근거지로 도주했다. 안피양구는 병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리다이와 도주하는 하다군을 붙잡진 못했으나 하다군이 노획했던 물자는 모두 되찾았다.
하다군의 공격을 휘하 장수 안피양구의 용맹으로 말미암아 격퇴한 누르하치는 상황을 살펴보면서 자신이 어떤 문제부터 풀어야 할 지를 고민했고 머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내부반대세력 대표중 한 명이자 하다군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리다이의 제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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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년 음력 8월 막바지49, 누르하치가 속해 있던 건주여진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反) 누르하치 파50는 본인들과 정략혼 관계로 맺어져 있던 해서여진의 강력한 세력 '하다'에게 군대를 요청하여 누르하치를 제거코자 했다. 이 때 하다에 군대를 요청한 이는 캉기야, 기오샨, 초키타였다.
그들의 요청을 받은 하다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의 급성장을 경계하여 숫자 미상의 군대를 파병하여 누르하치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후지를 공격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휘하 장수 '안피양구'의 활약으로 큰 피해 없이 그들을 격퇴하는데에 성공했다. 이 때 하다군은 40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들의 향도 역할을 하던 '닝구타 버일러 세력'의 소속자 '리다이'는 본인의 성으로 도망쳤다.
누르하치는 하다군을 격퇴한 뒤 어떤 세력을 먼저 제거해야 할 지를 고민했고 그 결과 자신의 다음 목표를 결정했다. 그 목표는 바로 조오기야 성으로 도주한 자신의 대적자이자 일족, '리다이'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결정을 내린 즉시 리다이를 공략하진 않았다. 8월달 한 달 동안에만 기야반 원정, 사르후 원정, 하다군과의 충돌등의 사태를 겪었기 때문에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는 그 이후로 약 4개월여간 군대를 정비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누르하치에게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었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누르하치는 그 재정비의 시간 동안 또 다시 자신을 습격하러 온 암살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것은 1583년 음력 9월의 일이었다.
9월의 어느 날 밤 누르하치가 곤히 자고 있을 무렵, 누르하치가 기르던 개 '탕구하'가 집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으르렁 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누르하치는 잠에서 깨어나 큰 딸 눈저와 자신의 아직 어린 두 아들, 추영과 다이샨을 집 안 은신처에 숨겼다.
이후 누르하치는 칼을 들고서 밖을 향해 "밖에 온 자는 누구냐. 어째서 들어오지 않는가? 너희가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나갈 터이니 맞서 싸우자."51라고 말했다.
누르하치는 창문으로 나가는 척 하면서 정작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암살자가 누르하치의 집 마당에 있는 울타리를 들어올려 침입하려는 것이 들어왔다. 반대로 암살자의 눈에는 누르하치가 살기등등하게 자신을 잡으러 나온 것이 들어왔다.
암살자는 겁을 집어먹고 도주했다. 그러면서 누르하치의 집의 가속 파하이를 창으로 찔르고 도망쳤다. 아마도 파하이를 찔러 부상을 입힘으로서 누르하치의 정신을 파하이에 쏠리게 하여 자신을 추격치 못하게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는 비상을 알리는 소라고둥을 불어 마을 사람들을 모두 깨워 암살자를 잡게 하였으나 그들 모두 허둥지둥 대느라 암살자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파하이의 자식들은 파하이를 황급히 수습했으나 파하이는 이미 목숨을 잃었다.
음력 9월의 누르하치 암살 미수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현행전례와 실록들은 이 암살사건의 배후를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反) 누르하치 파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음력 8월에 하다를 끌어들여 누르하치를 제거하려던 계략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리다이까지 노출되어 버리자 급한 마음에 음력 9월에 재차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약 3개월여간 현행전례와 고황제실록, 만주실록등의 기록은 공백상태에 놓여 있다. 청사고의 태조본기 역시도 이 시기에 대한 언급이 딱히 없다. 누르하치가 이 3개월여간 군대를 조련하고 외교 상황을 살피는데에만 집중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어쩌면 이 3개월간 일족들과 치열한 암투를 벌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3개월간의 '공백기'가 끝난 뒤, 누르하치는 마침내 다시금 군대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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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1583년 8월에 하다군을 끌어들여 자신을 제거하려고 한 일족내의 적대자 '리다이'를 1584년 1월에 공격한다.(조오갸 전투)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기상 조건과 정보 누출로 인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끝내 리다이의 근거지 조오갸 성을 점령하고 리다이를 무릎 꿇린다.56 그러나 누르하치는 리다이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핏줄로서의 정을 생각한 것도 있었겠으나 그를 살림으로서 일족내의 자신에 대한 반대세력들을 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리다이의 목숨을 살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닝구타 버일러 세력'57내의 반 누르하치파는 여전히 완전히 무릎꿇지 않았다. 그들은 또 다른 계략을 세워 누르하치를 압박코자 했다. 그 계략이란 바로 누르하치와 견원지간이었으나 1583년 음력 8월에 누르하치와 가시적으로 화해를 하였던 누르하치의 계모쪽 일족, 삼잔과 그 형제들(남잔, 너신, 완지간)과의 연대였다.
이전에 한 차례 설명했듯이 삼잔 일족은 누르하치의 상승기세를 두려워하여 누르하치에게 먼저 화해를 요청했고 결국 화해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진심으로 누르하치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 누르하치파는 그들이 여전히 누르하치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집중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을 포섭키로 했다.
1584년 음력 1월 누르하치가 조오갸성을 막 함락하고 회군한 뒤, 소오창가의 사남이자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 누르하치파 주요인물 롱돈은 삼잔에게 접근했다. 롱돈은 삼잔에게 누르하치와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누르하치에 대한 배신과 자신에 대한 협력을 종용했다. 삼잔은 이 제안을 그리 길게 생각하지 않고 롱돈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청태조실록을 비롯한 후금~청의 실록들은 롱돈이 삼잔을 설득할 때에 쓴 논거를 왜곡하고 있다.
해당 사료(후금~청계통 실록)들은 롱돈이 삼잔을 설득할 때에 쓴 논거를 '삼잔의 누이가 롱돈의 집안58에 시집온 것'으로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즉슨 해당 사료들에서 롱돈은 삼잔을 설득할 때에 삼잔과 자신이 처남매부관계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인 것을 거론하며 자신과 한 패가 되라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이전에 필자가 작성한 글인 '계모의 누르하치에 대한 학대와 누르하치의 복수에 관하여'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실상 롱돈은 삼잔을 설득할 때에 '누르하치가 삼잔의 누나를 죽인 것'을 논거로 그를 설득했다. 이 때 지칭된 삼잔의 누나란 바로 누르하치의 계모였던 컨저이다. 여기에 더하여 삼잔의 '딸'이 자신의 가문59에 시집을 온 것 역시도 부차적인 이유로 거론하였다.60
즉 롱돈이 삼잔에게 누르하치를 배신하고 자신과 함께 하기를 제안할 때에 이용했던 '진짜' 설득논거는 1. 누르하치가 삼잔의 누이(누르하치의 계모)를 죽인 것, 2. 삼잔의 딸이 자신의 집안 혹은 자신에게 시집을 온 것 이다. 그런데 이것이 후일의 실록서 '삼잔의 누이가 롱돈의 집안에 시집을 온 것을 근거로 설득을 했다'고 왜곡이 된 것이다.
이러한 변곡이 일어난 까닭은 청의 사관들이 누르하치가 자신의 계모를 제거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한 탓으로 보인다. 비록 누르하치의 계모 제거는 타당성이 어느정도 존재했으나 그렇다 하여도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아들이 계모를 죽였다는 사실은 어떤 명분으로도 미화되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은폐하고 롱돈이 삼잔을 설득할 때에 썼던 주장을 다소 왜곡한 것이다.
어찌되었건간에, 삼잔과 그 형제들은 누르하치와의 화해를 깨버리고 그에게서 이탈하여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 누르하치 파와 결탁하였다. 직후 그들은 누르하치의 세력을 꺾어놓기 위해 당시의 누르하치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만한 일을 계획한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의 동맹자이자 그의 매부, 기야무후의 수령 '가하샨 하스후'의 제거였다.
삼잔 일족은 군대를 준비시켜 가하샨 하스후가 지나는 길에 그들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가하샨 하스후가 길을 지나는 틈을 노려서 그를 공격했다. 가하샨 하스후는 불의의 습격을 받고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죽었고 그 시신은 사실상 방기되었다. 후금이 건국될 때까지 생존했더라면 후금의 개국공신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을 만한 인물 가하샨 하스후는 누르하치와 함께 거병을 한 지 8개월여만에, 그리고 누르하치의 여동생인 아지가와 혼인을 한 지 반년도 안되어서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은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에 존재하던 반 누르하치파가 거둔 최대의 성과중 하나였다. 어찌 보면 1583년 음력 5월에 누르하치의 동맹자였던 노미나와 나이카다가 누르하치를 배신하게 했던 것보다도 큰 성과였다. 누르하치에게 가장 소중했던 거병동지중 하나를 제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누르하치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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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 음력 1월. '닝구타 버일러 세력'(누르하치 일족) 내부에 존재하던 반(反) 누르하치파는 누르하치의 계모쪽 일파와 결탁하여 누르하치의 매부이자 동맹자였던 기야무후 수령 '가하샨 하스후'를 제거했다. 그것은 누르하치가 일족내의 적대자 '리다이'를 토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다.
누르하치가 해당 사실을 알아채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매부가 길을 가다가 배신자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분기탱천하였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당장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 때에 누르하치의 소집에 응한 일족은 별로 없었다. 매복의 위험도 위험이었을 뿐더러 그들은 가하샨 하스후의 일에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61
누르하치는 결국 자신의 직속 병력만이라도 이끌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 때에 니말란의 버일러이자 보올랑가계 일족으로서 누르하치의 오촌 어른격이었던 '렁던'이 누르하치의 이러한 행동을 말렸다. 그는 누르하치의 행동이 너무 무모하다고 말하며 우리 일족내의 배신자들이 그대를 죽이기 위해 준비를 해놓았을 것이니 가지 말라고 하였다.
누르하치는 그 말을 듣고서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는 갑옷을 갖춰 입고서는 자신의 무용을 선보인 뒤 일족들을 향해 "누가 나를 죽이겠다고 했는가? 나를 죽이려는 사람은 지금 나와라! 누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은 지금 나오라!"62고 외치며 매부를 잃은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다. 누르하치가 그렇게 자신의 본심을 숨기지 않고 분노를 표출하자 아무도 누르하치의 앞에 나서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이후 자신의 몇 구추들63과 함께 가하샨 하스후의 시신을 되찾으러 가서 그 시신을 데리고 본거지로 돌아왔다. 그런 누르하치를 보면서 해당 음모에 참여한 그의 일족들 모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누르하치는 그들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고 가하샨 하스후의 시신에 옷가지들을 입힌 뒤에64 그 시신을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면서 매부의 복수를 다짐했다.
가하샨 하스후 암살로부터 3개월여 뒤인 1584년 음력 4월에는 또 다시 누르하치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4월 어느날 밤 잠을 자고 있던 누르하치는 밖에서 나는 말소리를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식들을 숨겼다. 그리고 활과 검으로 무장을 한 뒤에 부인65의 옷에 몸을 숨겨 그녀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것은 자신이 집 안에 남아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누르하치는 집밖으로 나온 뒤 부인을 홀로 집에 돌려보내고 본인은 집 밖에 매복했다. 그러나 어둡고 흐린 밤중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암살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파악치 못했다.
하지만 때마침 번개가 쳤고, 그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암살자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암살자는 바로 누르하치의 근처 굴뚝 옆에 있었다. 누르하치는 암살자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자신의 검을 들어 칼등으로 암살자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집의 가속들을 불러모아 암살자를 포박케 했다.
암살자 포박 직후 누르하치의 구추이자 가속인이었던 로오한은 자신의 주군에게 암살자를 처단해버리자고 말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이 암살자를 죽이면 암살자를 보낸 자가 암살자의 죽음을 명분으로 하여 자신에게 전쟁을 걸 것이라고 판단했다. 누르하치의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였으나 암살자를 보낸 자가 '그는 그저 자신이 심부름을 맡겨 보낸 사람인데 누르하치가 그런 이를 암살자로 몰아서 죽였다'와 같은 식으로 선전하면 누르하치가 잘못을 뒤집어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시라면 말도 안될 명분이었으나 당시의 누르하치는 사방이 적이었을 뿐더러 그의 세력 내부에도 배신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조그마하고도 작위적인 명분'으로도 자칫 최악의 상황이 촉발 될 수 있다는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암살자를 그저 '소도둑'이라고 칭하면서 그 자를 풀어주고자 했다.
암살자는 누르하치가 본인을 도둑이라고 칭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신은 소도둑이 맞다.'라고 말하며 누르하치의 장단에 어울렸다. 로오한이 이 때에 다시 이 자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누르하치를 설득했으나 누르하치는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누르하치는 그 암살자에게 어떤 처벌도 내리지 않고 그저 풀어주었다.
그렇게 누르하치는 세 번째 암살시도에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때에 누르하치에게 암살자를 보낸 것이 어떤 세력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누르하치가 암살자의 소속 세력이 무엇인지 심문조차 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볼 때에 누르하치 본인은 암살자가 대강 어디서 보내졌는지를 파악하고 있던 것 같다. 이 사건 이후의 일들을 생각해보자면 이 암살자는 아마도 소오창가계의 롱돈이 보냈거나 삼잔 일족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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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는 1584년 음력 4월에 있었던 자신에 대한 세 번째 암살 시도를 회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을 죽이러 온 암살자를 최초로 생포했다.66 그러나 누르하치는 자신이 붙잡은 암살자를 죽이지 않고 풀어줬다. 그것은 암살자를 보낸 자가 자신이 암살자를 죽인 것을 명분으로 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을 방지하려 한 것이었다.
당시 누르하치는 사방에 적대세력을 두고 있던 상태였기에 조그마한 억지스런 명분조차도 타 세력에게 주어서는 안되었으며 그렇기에 분노를 참아 넘기며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때 누르하치의 구추들, 특히 '로오한'이 누르하치의 조치에 대해 반발했다. 누르하치를 죽이러 온 자를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누르하치 역시 그들의 간언이 신경쓰였으나 그는 정치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했고 결국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누르하치에 대한 세 번째 암살 시도 이후 1달여가 지난 1584년 음력 5월, 누르하치는 또 다시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를 받게 되었다.
5월 어느날 밤 막 잠자리에 들려던 누르하치는 집의 가속인이 쪽구들 쪽에 있던 등불의 불을 붙였다가 껐다 하는 짓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그것을 보고 그 가속인이 왜 특이행동을 하는 것인지 괴이쩍게 여겼다. 그러다가 누르하치는 그 가속인이 외부에 신호를 보내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안그래도 1달전에 자신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었던 참인지라 누르하치는 해당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안에 갑옷을 입고 겉에는 여자의 긴 예복을 입었다. 여인으로 위장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었다.67
누르하치는 밖으로 나와 굴뚝 옆에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그의 눈에 공터 근처에 이상한 형체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밤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누르하치는 그것을 활로 겨누었다.
때마침, 4월에 있었던 암살 시도와 마찬가지로 천둥번개가 쳤다. 그 번개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암살자의 위치를 파악했다. 암살자는 먼저 누르하치를 발견하고서 그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이 겨누고 있던 활을 반사적으로 사격했다. 누르하치의 첫 발은 암살자의 옷을 꿰뚫었으나 그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두 번째 화살을 쏴서 그의 다리를 맞추어 그가 넘어지게 만들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검을 뽑아 암살자의 머리를 칼등으로 치면서 암살자의 정신을 빼놓았다.
이후 누르하치의 동생들과 구추들이 몰려와 누르하치에게 '그를 때리기만 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번에는 이 암살자를 죽이자'고 간언했다. 4월달에 암살자를 풀어서 보내줬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또 다시 암살 시도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이번에도 역시 '명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일족들과 구추들에게 '이 자를 죽이면 이 자의 주인이 그것을 명분으로 하여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68라고 말했다. 동시에 "이 자를 죽이면 국인들은 모두 우리가 먼저 싸움을 일으켰다고 여길 것이다."69라고 말하며 명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누르하치는 '이수'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암살자를 풀어 보냈다.
해당 암살자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볼 때에 이번 암살자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심문이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그로 밀마암아 그 암살자를 보낸 이 역시 확실히 특정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584년 음력 5월에 누르하치에게 암살자를 보낸 이들 역시 4월달에 누르하치에게 암살자를 보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록이 남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이번에 암살자들을 보낸 자들 역시 삼잔 일족일 가능성이 높다. 누르하치가 삼잔 일족을 대대적으로 토벌한 뒤에는 암살자들이 더 이상 누르하치를 노리지 않았다는 점은 간과하기 힘들다.
어쨌건 간에 누르하치는 1584년에 들어서 두 차례나 존재했던 자신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의 범인들을 모두 풀어서 보내주었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이에 대해 전혀 분노를 느끼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누르하치의 분노는 음력 1월 자신의 매부 가하샨 하스후가 배신자들에게 암살당한 뒤로 점점 더 깊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신중론자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분노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다시금 검을 뽑은 것은 이로부터 1달여 뒤 자신의 준비가 완전히 끝났을 때 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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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 음력 5월 자신에 대한 네 번째 암살 시도 역시 회피한 누르하치는 해당 암살 미수 사건의 미수범 역시도 별 다른 처벌을 하지 않고 그냥 풀어주었다. 전쟁을 시작하기엔 아직 준비가 덜충분하다고 여기고서는 분을 삭히며 내린 결정이었다.
누르하치가 마침내 다시 검을 뽑은 것은 그로부터 1달여 뒤인 1584년 음력 6월이었다. 그 때 누르하치는 공략 대상으로 '마르둔'을 골랐다. 마르둔은 다름이 아니라 누르하치의 매부 가하샨 하스후를 죽인 배신자, 삼잔과 그 형제들(남잔, 너신, 완지간)의 성이었다.
누르하치는 해당 원정에 4백명의 군병력과 3대의 방패차를 동원했다.70 병력규모 면에서는 약 1년여전 그가 최초로 거병했을 때 그와 함께한 군병력의 4배에 이르는 규모였으며 역량 역시도 정예화가 되어 있었다. 뭣보다 공성겸 야전병기인 방패차가 존재한다는 것이 큰 특징이었다. 누르하치가 그러한 '대규모 병력'71의 동원이 가능했던 것은 음력 1월 매부인 가하샨 하스후가 삼잔 일족에 의해 죽었을 때부터 착실하게 전쟁준비를 해온 성과였다.
누르하치가 그렇게 단단히 준비를 한 것에는 마르둔의 공략이 대단히 힘들기 때문도 있었다. 마르둔은 산악 지형을 끼고 존재하는 산성으로서 방어 입지가 아주 좋은 곳이었다. 비록 누르하치의 힘이 거병 초보다는 확실히 성장했다고는 하나 마르둔의 공략은 그로서도 무척 힘든 도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몇 개월 동안 분노를 죽여가면서 철저히 준비를 해온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최초에는 정공법을 통해 마르둔 공략을 시도했다. 그는 방패차들을 횡대로 나란히 앞세워 병사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성벽으로 전진시켰다. 그러나 마르둔은 과연 천혜의 요새여서 성에 가까이 근접할 수록 접근로가 좁아진 탓에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열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방패차 1대를 앞세우고 그 뒤에 병사들과 다른 방패차들을 줄줄이 세워 성벽에 접근케 한 것이다.
이런 대형으로 제대로 된 공성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방패차 2대가 공성과정에서 마르둔군의 투석에 의해 파괴되었고 오직 1대의 방패차 만이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가 적 지휘관 너신을 저격해 부상입히고 4명의 적을 사살해 적들의 방어의지를 일시적으로 꺾었고, 누르하치군은 그 틈에 겨우 후퇴를 했다.
누르하치는 최초의 공격에서 패배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렇다고 하여 마르둔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대신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정공법이 실패했으니 다음 방법으로 포위고사전을 개시한 것이다. 그것은 마르둔이 산성인지라 급수처가 성 외부에 있는 것을 이용해 그들을 말려죽이려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두 번째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마르둔군은 누르하치군의 포위로 물을 급수하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식수가 바닥나자 전투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포위 4일째에 이르렀을 때에 마르둔군은 더 이상 저항을 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
그렇지만 누르하치는 마르둔군이 상당히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정공법을 시도하진 않았다. 아무리 적의 전력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마르둔의 지형을 생각해 볼 때에 재차 정공법을 시도하다간 예상보다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휘하 제장 안피양구를 위시로 한 침투부대를 이용해 야습을 가하여 마르둔을 함락했다.
함락된 마르둔을 탈출한 적장은 오직 너신과 완지간뿐이었다. 그들은 누르하치에 적대적인 세력이었던 자이퍈으로 도주하여 몸을 의탁했다. 마르둔의 주인이자 누르하치를 배신한 주역인 삼잔과 남잔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남지 않았다. 실록은 물론이요 현행전례 역시도 그들의 운명을 서술치 않았다. 그러나 지난 몇 개월동안 암살자를 풀어주는 등의 치욕을 감내하며 복수의 검을 갈아온 것이 바로 누르하치임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금까지 누르하치를 상대로 여러 흉계를 꾸며 그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준, 누르하치의 오촌이자 반(反) 누르하치파의 대표주자 '롱돈' 역시도 1584년 이후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도 삼잔등과 함께 마르둔에 있다가 누르하치에 의해 죽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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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 아구 독독이라는 뜻
- 청사고를 기준으로 하자면 1574년에 배승조를 죽이고 난을 일으킨 듯 하나, 여기서는 명사를 기준으로 하였다.
- 누르하치의 양자이자 후일의 후금 오대공신 후르한과는 동명이인
- 명사에는 병력과 말을 도합하여 1천 5백의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되어 있고-이중 말 500필은 노획한 것이다-, 청사고에는 이성량에게 확실히 죽은 병력이 156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청사고의 경우 연대표기가 실제와는 약 7년가량 차이가 있다. 청사고 특유의 연대오류는 여러 열전과 지(志)에서 등장하는데, 이 경우에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 만주실록을 포함한 후금~청 계통 사서에서는 탘시와 기오창가가 단순히 아타이에게 시집을 갔던 손녀-조카를 구하러 가기 위해 구러성에 갔던 것으로 나온다. (단, 여진-청사학자 이훈은 본인의 글에서 기오창가의 손녀가 아타이가 아니라 아하이에게 시집을 갔다고 서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이들이 명나라에 충성을 했던 것을 가리기 위한 미화작업으로 추정된다.
- 명사에서는 순서가 반대인데, 전자의 경우가 더 신빙성이 있다.
- 후금~청의 사료는 이 향도로 오직 니칸 와일란만을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탘시와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는 아타이에게 시집을 보낸 본인의 조카-손녀를 구하기 위해 구러성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이들 역시도 명군의 향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 『만주실록』 만력 11년, 『청태조실록』 만력 11년. 아마도 명나라 토벌군을 상대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음을 파악한 아하이가 피난을 원하는 이들을 내보내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 『청사고』권222 열전 9 왕고 열전,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등에는 구러성이 버틴 시간은 명시되지 않으나 이 사료들에서도 구러성이 상당히 긴 시간을 버틴 것으로 묘사된다.
- 『현행전례』, 이시바시 다카오 저작 『대청제국』에서 재인용
- 『명사』권238 열전 126 이성량 열전
- 『청사고』권222 열전 9 왕고 열전, 진첩선에 의하면『명사기사본말』에도 해당 구절이 거의 똑같이 반복이 되어 있다고 하나 필자는 해당 구절을 찾지 못하여 왕고 열전만을 인용한다.
- 아타이는 누르하치의 사촌누이의 남편이기도 했다.
- 청사고 태조본기의 경우 누르하치의 본기이니만큼 태조실록의 묘사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도 니칸 와일란이 속임수를 쓰는 대목이 서술된 것으로 보인다.
- 무엇보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의 일족 및 누르하치와 기존부터 전략적 우호 관계가 있었음이 파악되기에, 해당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2월
- 청태조실록 만력 11년 5월, 만주실록 만력 11년 5월
- 누르하치가 속한 일족이라 할 수 있는 집단
- 청태조실록 만력 11년 5월, 만주실록 만력 11년 5월
- 혹은 100명에 약간 부족한 군대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무황제실록의 한문본이 그러하다.
- 다른 이유들로는 누르하치가 본인의 계모이자 하다의 왕녀였던 컨저를 제거한 것, 일족내에서 그리 큰 입지가 없었던 누르하치가 복수를 명분으로 '지도자' 행세를 하려 한 것등을 들 수 있다. /2020년 12월 17일 추가 내용
- 만주실록, 조선왕조실록등에서 인용. 지난편의 각주 참조
- 이시바시 다카오의 경우 현행전례의 해당 구절 서술을 '투룬 성에 100명의 군대가 남아 있었다.'고 해석하여 누르하치가 확실히 병력적으로 열세였다고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이 부분은 누르하치의 군대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전 편격인 [1583년 5월, 누르하치의 거병 당시 휘하 병력수] 참조
- 청사고 권225 어이두 열전
- 누르하치의 일족
- 닝구타 버일러들 중 첫째
- 닝구타 버일러들 중 둘째
- 닝구타 버일러들중 셋째
- 닝구타 버일러들 중 여섯째
- 청태조실록(고황제)와 만주실록등에는 해당 침입자들의 숫자가 생략이 되어 있으나 현행전례에는 3~4명으로 명시되어 있다.
- 명나라의 방어거점. 하구대(河口臺)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대에는 많아야 4~5명 혹은 10명 가량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명나라 병사'가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의 거점'이라는 점에서 강한 세력도 공격을 꺼릴 수 밖에 없는 거점이었다.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곧 '명나라에 대한 거역'이었기 때문이다.
- 수비(守備) 이상, 참장(參將)아래의 중간급 무관
- 당시 누르하치의 거점 위치와 노미나의 거점 위치등을 생각해 보자면 니칸 와일란을 제거하기 위한 공격에서 사르후를 경유하여 이동했을 것이 유추된다. 그 탓에 노미나가 누르하치에게 이러한 협박을 한 것으로 보인다.
- 하다가 누르하치를 주시하고 있었던 이유는 누르하치가 하다의 왕녀 출신이자 본인의 계모였던 컨저를 숙청하고 '닝구타 버일러 세력'즉슨 누르하치의 일족과 하다와의 연결고리를 약화시켰기 때문이었다.
- 또한 당시 노미나의 경우 자신이 니칸 와일란에게 누르하치의 공격 정보를 알린 것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료에는 누르하치가 노미나와 나이카다를 원망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누르하치가 노미나와 나이카다에게 이러한 원망의 '뜻'을 전했을지는 미지수다.
- 당시 누르하치 근거지
- 해서여진계 여진 국가
- 완치한, 완지간등으로도 호칭되는데 여기서는 완지한이라는 호칭을 썼다.
- 농장을 뜻하는 만주어
- 누르하치의 소속 일족
- 지난 글까지는 완지한으로 표기했으나 이후부터는 완지간으로 표기토록 할 것이다.
- 누르하치의 톸소(농장)을 멋대로 분할한 것을 지칭한다.
- 머리를 땅에 닿게 하여 인사하는 예
-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과는 동명이인
- 이들 세 명은 모두 닝구타의 여섯째 버일러 보오시의 아들들이다 → 2020년 12월 17일 정정 : 이 중 오직 캉기야만이 보오시의 아들이며 초키타와 기오샨은 그의 구추로 추정된다. 만주실록 만문본과 한문본을 동시에 살펴보면 이들의 출신이 구분됨을 알 수 있다.
- 안피양구의 이름은 정확히 말하자면 실제로는 '암바 피양구' '암반 피양구'였다. 여기서 암반은 접두 호칭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하나의 주제로 제대로 설명하겠다.
- 청사고 권 225 안피양구 열전
- 청태조실록 만력 11년 음력 8월, 만주실록 만력 11년 음력 8월
- 정확한 날짜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1583년 음력 8월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 순서로 일어난 것으로 보아 8월 후반으로 유추된다.
- 반(反) 누르하치 파는 닝구타 버일러 세력중 더시쿠, 리오찬, 소오창가, 보오시의 일족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친 누르하치파는 기오창가, 보올랑가의 일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보올랑가의 일족들은 언제 누르하치에게 합류했는지 확실치 않다. 이는 후에 좀 더 자세히 다루겠다.
- 만주실록 만력 11년 음력 9월, 현행전례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맥락의 발언을 했다.
- 이 때 공격당한 지역은 '후지'였으며 누르하치 휘하 장수 안피양구의 관할이었다. 현행전례 1583년 음력 8월/청사고 권 225 안피양구 열전
- 행군기간은 현행전례 1584년 음력 1월 참조
- 롱돈은 이미 1583년 음력 5월에도 누르하치의 동맹자들이었던 사르후의 노미나와 나이카다를 종용하여 누르하치를 배신케 하는 등, 누르하치의 일족내 반대세력중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 현행전례 기준의 발언. 다른 실록들은 좀 더 간결한 발언으로 후퇴거부의사를 밝힌다. 이 발언으로 미루어 보건대 누르하치는 일족내의 반 누르하치파가 리다이를 도울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듯 보인다.
- 만주실록 1584년 음력 1월, 청태조실록 1584년 음력 1월, 현행전례 1584년 음력 1월
- 누르하치의 일족 세력
- 혹은 롱돈 자신
- 혹은 자신
- 현행전례 1584년 음력 1월/ 하다 세력의 '완 한'은 닝구타 버일러 세력을 본인의 영향력 아래에 두기 위해 자신의 가문 여식들을 닝구타 버일러 세력에 지속적으로 시집을 보내었다. 여기서 혼인관계가 확실히 파악된 것은 소오창가의 둘째 아들 우타이와 누르하치의 부친인 탘시다. 그러나 현행전례의 이러한 서술을 볼 때에 롱돈 역시 하다나라 씨족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 청태조실록 만력 12년 음력 1월, 만주실록 동년동월, 현행전례 동년동월/이로 미루어 볼 때에 당시까지도 누르하치의 일족내 입지가 불안정했음을 알 수 있다.
- 현행전례 1584년 음력 1월의 누르하치의 발언을 의역. 다른 사료들은 좀 더 간결한 대사로 이 때의 누르하치의 발언을 축약표현한다.
- 구추에 대해서는 '여진족의 종사들, 구추(gucu)' 글 참고. 이 때에 누르하치가 데리고 간 구추들에는 안피양구와 어이두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유추된다. 특히 어이두의 경우 가하샨 하스후와 '피가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었기에 거진 확실하게 작전에 참여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 이로 미루어 볼 때에 가하샨 하스후의 시신은 수습 당시에는 나체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가하샨 하스후를 살해한 이들이 그 옷가지를 벗긴 듯 하다. 모욕의 의미로 벗겼을 수도 있으나, 이 당시 여진은 옷가지가 귀하여 전쟁에서 적을 살해하면 그 옷을 벗겨 노획물로 삼았다는 것을 볼 때에 노획물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 퉁갸 씨족의 하하나자칭으로 추정
- 해당 암살자를 보낸 세력은 삼잔 일족 혹은 닝구타 버일러 세력내의 반(反) 누르하치 파로 추정된다.
- 한문사료인 청태조실록등에는 평상복을 입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만문사료인 만주실록을 살펴보면 실상 여인의 옷을 입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문사료에서 위와 같이 각색이 된 것은 한문사료 특유의 번역변질성에 더불어 '여인의 옷'을 태조가 입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으로 보인다.
- 만주실록의 누르하치 발언 의역 및 축약
- 여기서 말하는 국인이란 건주 여진인들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현행전례 1584년 음력 6월, 청태조실록 동년 동월
- 4백명은 당시 누르하치의 세력규모나 다른 건주 세력의 수준을 생각해 보자면 꽤 대규모 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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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대략 5퍼센트쯤.
차라리 링크를 올려
이성계가 여진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을 계승시키고 그걸 계속 조선이 통제 가능했다면 어땠을까...
이성계 시절에도 여진 완전히 장악 못했는데
IF론으로 이성계가 건주까지 완전히 장악한다고 하더라도 명나라가 개입하는 시점에서 다시 뱉어내야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