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중초본] 110권, 광해 8년 12월 21일 정사 2번째기사
진사(進士)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방도로는 권강(權綱)을 모두 쥐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도 이르기를 ‘오직 임금만이 상도 줄 수가 있고 벌도 줄 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송(宋)나라의 진덕수(眞德秀)도 말하기를 ‘임금된 자가 어찌 하루라도 권위의 칼자루를 놓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뜻깊은 말입니다. 신하된 자가 참으로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요직에 포열(布列)시켜 상과 벌[威福]을 자기에게서 나오게 합니다. 설령 어진 자가 이렇게 해도 안 될 일인데, 만약 어질지 못한 자가 이와 같이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훌륭하신 상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삼가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의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에 가까우므로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합니다.
신은 하찮은 일개 유자(儒者)로서 어리석고 천박하여, 비록 도성 안에 살지만 외방에 사는 몽매한 백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 조정의 일에 대해서는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도 알지를 못하지만, 단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가지고 성상께 우러러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의 고굉(股肱)·이목(耳目)·후설(喉舌)을 맡은 관원들과 논사(論思)·풍헌(風憲)·전선(銓選)을 담당하고 있는 관원들은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간혹 그들의 무리가 아니면서 한두 사람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자들은, 반드시 그 사람됨이 무르고 행실이 줏대가 없으며 시세를 살펴 아첨이나 하며 세상 되는 대로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대각의 계사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의 차자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옥당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銓曹)의 주의(注擬)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전조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풍지(風旨)를 받들어 그렇게 하기도 하고 그의 지휘를 받아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합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에 이르러서도 그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疏章)이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자기 편이 아닌 자는 비록 사람들의 중망을 받고 있는 자라도 반드시 배척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자는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자라도 반드시 등용합니다. 모든 일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비록 하나하나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미루어 보면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권세를 멋대로 부리고 있는 것이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비록 보필(輔弼)의 임무를 맡은 지위에 있지는 않으나 전하께서 믿고 맡기셨다면, 그는 마땅히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를 당(唐)나라의 이필(李泌)이나 육지(陸贄)와 같이 해야 하는데, 도리어 나라를 저버리기를 이렇게 하니, 신은 매우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상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지내기 때문에 그가 이토록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어질다고 여겨서 맡겨 의심을 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어질다고 여겨서 의심을 하지 않으신다면,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분변을 해 드리겠습니다.
신이 들으니, 임금은 어진이가 없으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훌륭한 임금이 위에 있더라도 임용된 신하가 불초한 사람이면 정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堯)가 임금으로 있는데도 곤(鯀)의 치수(治水)가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면 임용된 신하가 어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임용된 신하가 불초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잘 다스려지는 때라고 보십니까, 혼란한 때라고 보십니까?
지난번에 해의 이변이 거듭 나타나고 지진이 누차 발생하였으며 겨울 안개가 사방에 가득했었으니, 이는 모두 재변 가운데에서도 큰 재변이었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그 형체가 보이지 않으면 그 그림자를 살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런 재변이 오늘날의 그림자라고 생각합니다. 태양은 모든 양(陽)의 종주(宗主)로서 임금의 표상이기 때문에, 일식(日食)이 하늘 운행의 상도(常度)인데도 《춘추(春秋)》에 일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기록하였고, 전(傳)에는 ‘첩부(妾婦)가 그 지아비를 누르거나 신하가 임금을 저버리거나 정권(政權)이 신하에게 있거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는 형상이니, 모두가 음(陰)이 왕성하고 양(陽)이 미약한 증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흰무지개가 해를 궤뚫는 참혹함은 일식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재변은 까닭없이 생기지 않는 것이니, 어찌 그 이유가 없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에서 ‘충신의 마음은 오히려 임금이 재변을 두려워하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니 위상(魏相)이 역적(逆賊)의 발생과 풍우(風雨)의 재변을 한 선제(漢宣帝)에게 고한 것이 이것이고, 간신의 마음은 오히려 임금이 재변을 두려워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니 양국충(楊國忠)이 장맛비가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당(唐) 명황(明皇)을 속인 것이 이것이다. 대개 임금이 하늘의 재변을 두렵게 여기면 반드시 자신의 허물을 찾아보고 반드시 폐정(弊政)을 반성하여 고치며 반드시 소인을 제거하니 이것은 충신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간신에게는 불편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씀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근래에 왕안석(王安石)이 드디어 하늘의 재변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이이첨이 충신이라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이이첨이 간신이라면 오늘날의 재변을 혹 다른 나라에 전가시키거나 혹 다른 일의 증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일이라고 곧바로 말할 것입니다. 신도 또한 높고 멀어 알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그에게 책임을 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신은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한 점이 많아 나라의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아랫백성들이 원망을 품어 방본(邦本)이 튼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심이 매우 투박해져서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고 풍속이 아주 무너져 염치가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벼슬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래로 시정배에 이르기까지 신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비들에 대해서는 신이 함께 지내며 함께 만나는 자들이니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책과 붓을 가지고 공부를 하러 다니는 자들이 한갓 이록(利祿)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고 인의(仁義)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과거(科擧)는 선비들이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는 길인데, 모두들 빨리 진출할 마음을 품고 서로들 구차하게 합격할 꾀를 씁니다. 차술(借述)을 하여 권세있는 자에게 빌붙고 주사(主司)에 교통하였다는 말을 사람들이 모두 공공연하게 꺼리지 않고 하고들 있습니다. 아비는 아들을 가르치고 형은 동생을 면려하며 친구들끼리 서로 불러다가 온통 이렇게 하고들 있으면서 돌이킬 줄을 모릅니다. 간혹 백 명 가운데에 한두 명이 이와 반대로 하면 도리어 비웃고 비난을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와 다르게 한다고 화를 내어 욕하고 헐뜯는 자도 있습니다. 아, 사기(士氣)는 나라의 원기(元氣)인데 이 지경이 되었으니,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임금을 뵐 때에 이와 같다면 뒷날 조정에 벼슬을 하게 되었을 때에 벼슬을 얻고자 근심하고 그 벼슬을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역적이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이 무리에게서 나올 것이며, 자신을 버리고 나라에 몸바칠 신하가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있다면 반드시 이 무리에게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선유(先儒)의 시에 이르기를 ‘이런 사람을 등용하고 이런 도를 시행하니 어느날 태평의 시대가 올지 알지 못하겠구나.[所用是人行是道 不知何日可昇平]’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시를 읊으며 천장을 쳐다보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이이첨이 임금의 총애를 저토록 오로지 차지하고 있고 나라의 정치를 저토록 오래도록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변이 저러하고 나라의 형세가 저러하고 백성들의 원성이 저러하고 풍속이 저러하고 선비들의 습속이 저러하니, 이자가 과연 어진 자입니까, 어질지 못한 자입니까?
옛날 한 원제(漢元帝) 때에 석현(石顯)이 권세를 멋대로 휘둘렀는데 경방(京房)이 한가한 여가에 원제를 뵙고 묻기를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왜 위태해졌으며 등용한 사람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밝지 못하였고 등용한 자들은 간교한 아첨꾼들이었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묻기를 ‘간교한 아첨꾼인 줄을 알고서 등용하였습니까, 아니면 어질다고 여긴 것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질다고 여긴 것이다.’ 하였는데, 경방이 묻기를, ‘그렇다면 오늘날 어떻게 그들이 어질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가 혼란스럽고 임금이 위태했었던 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어진이를 임용하면 반드시 잘 다스려지고 어질지 못한 이를 등용하면 반드시 혼란이 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유왕과 여왕이 어찌하여 이를 깨닫고서 다시 어진이를 구하지 아니했으며 어찌하여 끝내 불초한 사람을 임용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지러운 시대의 임금은 자기의 신하를 모두 어질다고 여긴다. 만약 모두 깨닫는다면 천하에 어찌 망하는 임금이 있겠는가.’ 하자, 경방이 아뢰기를, ‘제 환공(齊桓公)과 진 이세(秦二世)도 또한 일찍이 이런 임금에 대해서 듣고는 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렇다면 수조(竪刁)와 조고(趙高)에게 정치를 맡겨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졌는데도 어찌하여 유왕과 여왕의 경우를 가지고 헤아려서 깨닫지를 못하였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직 도(道)가 있는 자라야 지난 일을 가지고 앞날의 일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경방이 인하여 관(冠)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그 당시의 재변에 대한 일 및 도적을 금하지 않고 있는 일과 형벌받은 사람이 시장에 가득한 일 등을 모두 말하고, 아뢰기를 ‘폐하께서 보시기에 오늘날이 다스려지는 시대입니까, 혼란한 시대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혼란한 때이다.’ 하자, 경방이 아뢰기를 ‘현재 임용한 자가 누구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다행히 저 시대보다는 낫다. 또한 이 사람 때문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하였는데, 경방이 아뢰기를 ‘지난 시대의 임금들도 또한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아마도 뒷시대에서 오늘날을 보는 것도 오늘날 옛 시대를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도 또한 ‘다행히 저 시대보다는 낫다. 또한 이 사람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실 것입니까? 신은 밝으신 전하께서는 반드시 한 원제의 소견과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가 이미 불초하기가 이와 같고 권세를 독차지하고 멋대로 휘두른 것이 저러하니 말류의 폐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화란이 이를 바를 신은 감히 점치지 못하겠습니다.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은 오늘날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이이첨이 또한 감히 변명을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통분스럽게 생각합니다. 자표(字標)로 서로 호응하였다거나 시권(試券)에 표식을 하였다거나 장옥(場屋)에 두사(頭辭)를 통하였다거나 시험의 제목을 미리 누출하였다는 등의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난해 식년시의 강경(講經) 시험에는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매우 많았는데 심지어 10획을 넘고도 과거에 떨어진 자까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시대에 공부를 하던 자들은 힘을 다하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도, 높은 점수를 받은 자가 이렇게 많은 때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과 달라서 사람들이 열심히 글을 읽는 때가 적은데도 도리어 이와 같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자표로 서로 호응하였다는 일은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의 별시 전시(別試殿試)의 급제자 가운데에는 고관(考官)의 형제와 아들과 조카 및 그들의 족속으로서 참방한 자가 1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시가 비록 상피하는 법규가 없다고는 하나 예로부터 어찌 한 과방 안에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합격한 자가 이렇게 많은 때가 있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이이첨과 황정필(黃廷弼)이 비록 말을 잘한다고는 하나, 상피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급제한 경우를 찾아서 증거를 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시권에 표식을 했거나 장옥에 두사를 통한 일이 또한 반드시 없었으리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반궁(泮宮)의 시험은 정해진 시각이 있어서 성화와 같이 급하므로, 예로부터 비록 재능이 출중하고 공부를 가장 많이 하여 물이 솟구치고 산이 솟아나는듯이 글을 지어 마치 누군가 도와주는 자가 있는듯이 빠른 자라고 하더라도 으레 대부분은 한 편의 글을 간신히 지어내고, 혹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무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재능이 있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고 한 과방의 장원이 되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지은 작품은 사람들의 마음에 차지 않으며 혹 염(簾)을 어긴 구절도 많고 혹 지우고 고친 글자가 많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이 금년의 반시(泮試)를 보니, 글제를 내걸었다가 금방 파하였는데도 명지(名紙)에 즉시 글을 지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시험장에 일찍이 예전에 없었던 이토록 탁월한 인재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듣지 못하였으며, 설령 밖에서 때에 임하여 지어서 들여왔다면, 귀신이 도와주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민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뒤에 들으니, 그 작품들이 자못 훌륭하여 논란을 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치로 헤아려 보건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글제를 미리 유출시켜 집에서 지어오게 하였다는 말이 또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진사 민심(閔𦸂)은 바로 신의 아비와 같이 급제한 사람의 아들인데, 이이첨의 당류이며 신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자입니다. 반시(泮試)가 있기 며칠 전에 신의 친구 전 첨지(僉知) 송희업(宋熙業)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신의 《사문유취(事文類聚)》를 빌려보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전체를 빌려주고 싶지가 않아서 몇째 권을 보고자 하는지를 물었더니, 청명절(淸明節)이 들어 있는 권이었습니다. 그 권이 마침 신의 서실(書室)에 있었기 때문에 갖다가 주었습니다. 민심이 말하기를 ‘다른 권도 보고자 합니다. 전질을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기에 신이 그 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굳이 물었더니, 민심이 말하기를 ‘등촉부(燈燭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것이 들어 있는 권은 친가(親家)에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하였더니, 민심이 ‘사람을 시켜서 갖다 주십시오.’ 하였는데, 신이 ‘찾으러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고 하자, 민심이 ‘제가 가서 찾아 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안방에 보관되어 있어서 외부 사람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고 하니, 민심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가 내 말을 타고 가서 가져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신이 ‘지금 다른 손님을 대하고 있으므로 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더니, 민심이 이에 망연자실하여 일어나서 가려고 하지를 않더니 오랜 뒤에 어찌할 수가 없자 단지 그 권만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에 간신히 가져올 수가 있었는데, 뒷날 반궁의 시험장에 들어갔더니, 바로 유류화(楡柳火)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습니다. 《사문유취》에서 찾아보니 이것은 청명절에 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등촉부에도 볼 만한 글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이 비로소 이상하게 여기며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성상께서 친림하시어 임금의 위엄이 지척에 있는데도 감히 미리 유출했던 제목을 출제하였으니,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이첨이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시험장에 들른 일이 있은 뒤에 신이 신의 7촌 아저씨인 유학(幼學) 윤유겸(尹唯謙)을 만났는데 민심의 일에 대한 말이 나오니, 유겸이 말하기를 ‘반시를 시행하기 며칠 전에 어떤 친구가 나에게서 이 두 권을 빌려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명을 물어 보았더니, 역시 이이첨의 당류였습니다.
신은 성품이 소루하고 게을러 교유(交遊)를 끊고 출입을 삼가고 있으므로 세간의 일에 대해서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은데도 신이 들어서 아는 바가 이와 같고 보면,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보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길에 나도는 말들이 또한 근거가 있는 말일 듯합니다.
이이첨의 네 아들이 모두 미리 시험 문제를 알아내거나 차작(借作)을 하여 과거에 오른 일에 대해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대개 그 네 아들이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재주와 명망이 없는데도 잇따라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혹은 전혀 문장을 짓는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너무 쉽게 오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이첨의 도당들이 이미 과거를 자신들의 소유물로 삼았다면, 이이첨의 아들들에 대한 일은 많은 말로 논변할 것도 없기 때문에 신은 다시 운운하지 않겠습니다.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인정상 박절함을 면치 못하고 또한 잗단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만, 과거가 이토록 공정치 못한 것은 국가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이이첨이 관작(官爵)으로써 벼슬아치들을 끌어모으고 과거로써 유생들을 거두어들여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므로 온 세상이 그에게로 쏠려들어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옛날에 제(齊)나라의 전씨(田氏)가 큰 덕(德)은 없어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푸는 일이 있자030) 안자(晏子)가 경공(景公)에게 간하기를 ‘대부의 집안에서 베푸는 혜택은 나라 전체에 미쳐서는 안 되고, 대부는 군주의 이익을 자신이 취하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작과 과거를 가지고 혜택을 베푸는 것이 어찌 쌀을 나누어주며 혜택을 베푸는 것과 같겠으며, 벼슬아치와 유사(儒士)들이 귀의하는 것이 어찌 일반 백성들이 귀의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에서 말하기를 ‘전씨의 화근은 경공의 시대에는 그래도 막을 수가 있었지만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나게 되어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분변해야 옳은 일을 어찌 일찍 분변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이원익(李元翼)은 우리 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며, 이덕형(李德馨)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바친 사람이며, 심희수(沈喜壽)는 비록 대단한 재능과 덕망은 없습니다만 우뚝하게 소신을 가지고 굽히지 않은 사람이니 또한 종묘 사직에 공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이 모두 삼사(三司)를 사주하여 끊임없이 논집해서 잇따라 귀양을 보내고 내쫓게 하였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온전하게 돌보아 주시어 금부에 내리려던 계책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유희분(柳希奮)과 박승종(朴承宗)은 집안을 단속하지 못하고 몸가짐을 엄하게 하지 않으니 참으로 하찮고 용렬한 자들입니다. 이이첨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바른 말로 논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쟁집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겁많고 나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나라의 훈척(勳戚) 중신(重臣)으로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고 안위(安危)를 함께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이첨이 원수처럼 보고서 반드시 중상(中傷)을 하려고 하니, 그 의도가 흉참합니다. 그가 겉으로 화호(和好)를 하면서 혼인을 맺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그가 박승종과는 본디 혼인(婚姻)한 집안인데도 서로 잘 지내지 못하니 어찌 이익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대개 유희분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는 권세가 없어서 유희분을 두렵게 여기고 있는 것처럼 하여 우호를 맺으려는 태도를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 계책이 참으로 교묘합니다.
옛날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쥐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세신(世臣)과 공족(公族) 및 재능과 공덕(功德)이 자기보다 나은 자를 제거한 뒤에 감히 자기 마음대로 권세를 부렸습니다. 전항(田恒)과 조고(趙高)와 이임보(李林甫) 및 기타 소인들의 일에서 분명하게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김제남은 반역을 한 정상이 분명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었으니,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이 모두 함께 죽인 자입니다. 이원익 등이 풍병이 들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마음으로 역적을 비호하고 우리 성상을 저버리겠습니까. 이이첨 등이 호역(護逆)이라는 두 글자로 하나의 큰 그물을 만들어서,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며 그들과 더불어 함께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을 가지고 때려잡았습니다. 이 이름이 한번 더해지면 해명할 말이 없으며 벗어날 계책이 없게 됩니다. 소인(小人)이 선류(善類)를 함정에 밀어넣는 것은 그 계책을 씀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아, 두려운 일입니다.
홍무적(洪茂績)·정택뢰(鄭澤雷)·김효성(金孝誠) 등도 이 그물에 걸려 세상에 큰 누(累)가 되었고 영원히 언로(言路)가 막혔습니다.
원이곤(元以坤)은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세상의 기휘(忌諱)를 범하면서 남들이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자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 상소의 사연을 보았더니, 그의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두려움에 차 있었고 패기도 없고 정신도 나약하여, 강직한 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였습니다. 더구나 ‘명예를 훔친 낙양의 소년’이라는 말은 길에 흘러다니는 말인데, 성상께 진달하기까지 하였으니, 그것이 이이첨이 말을 꾸며 스스로 해명을 할 기화가 된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시사를 말한 초야의 사람이 형장을 받기까지 한다면 뒷날 위망이 눈앞에 닥치는 일이 있더라도 누가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언자(言者)에게 비록 광망(狂妄)한 잘못이 있더라도 성인(聖人)은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대(銀臺)의 계사와 대간의 논열이 마침내 형구를 씌워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여 형장을 받게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이임보(李林甫)가 어사(御史)에게 넌지시 일러 봉장(奉璋)을 죽이게 한 것 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후설과 이목을 맡은 관원이 모두 그의 복심이라고 한 것을 이것을 가지고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복심을 요직에 포진시킨 것은 어떤 방법으로 하였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옛 전례에 당하관의 청망(淸望)은 모두 전랑(銓郞)의 손에서 나오며, 당상관의 청망도 완전히 전랑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도 전랑이 막으면 의망할 수가 없습니다. 전랑의 직임이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기 때문에 반드시 널리 공론을 모아서,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서 명망과 실상을 함께 갖춘 자를 힘써 얻어서 전랑을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아무도 사사로움을 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홍도(朴弘道)와 박정길(朴鼎吉)은 이이첨에게는 골육과 같은 자들이고 대엽(大燁)에게는 천륜(天倫)을 함께한 형제와 같은 자들인데, 이이첨이 이 두 사람을 전랑에 배치하였습니다. 박홍도는 조금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곧바로 물리쳤습니다. 또 그의 아들 대엽과 익엽(益燁)을 잇따라 전랑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전랑의 중요성은 앞에서 진달한 바와 같은데, 참으로 이이첨의 골육과 같은 자 및 진짜 골육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전후의 전랑들은 반드시 모두 그의 골육과 같은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박홍도와 박정길이 골육과 같고 형제와 같은데 전랑에 배치하였다는 말은 신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이대엽이 집의로 있을 때에 올린 계사 가운데에 이러한 말이 있었으니 이는 성상께서도 보신 바입니다. 전랑들이 모두 그의 골육과 같은 자들이거나 진짜 골육이라면 전조(銓曹)가 주의(注擬)한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복심이라는 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무릇 과거의 고관(考官)들도 또한 모두 자기의 복심으로 임명하였을 것입니다. 관학의 유생들이 모두 그의 도당이 된 것은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과거로 그들을 수합하였기 때문입니다. 황정필(黃廷弼)의 상소의 사연은 한(漢)나라 사람들이 왕망(王莽)의 공덕을 찬양한 것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신은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이첨의 도당이 날로 아래에서 번성하고 전하의 형세는 날로 위에서 고립되고 있으니, 어찌 참으로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를 위하여 말을 하는 자가 없습니다. 아, 우리 나라의 3백여 개의 군(郡)에 의로운 선비가 한 사람 도 없단 말입니까. 유희분과 박승종과 같은 자들은 의리상 휴척을 함께해야 하는데도 오로지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보호할 마음으로, 임금의 위망을 먼 산 보듯이 보며 구제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큽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앞뒤로 올린 글을 자세히 살피시고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먼저 이이첨이 위복을 멋대로 농단한 죄를 다스리시고 다음에 유희분과 박승종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다스리소서. 그 나머지 이이첨의 복심과 도당들에 대해서는, 혹 당여를 모조리 제거하는 율법을 시용하기도 하고 혹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들을 용서하는 율법을 사용하기도 하소서. 그러면 종묘 사직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춘추》 전(傳)에 이르기를 ‘만연되면 제거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만연되었으니 제거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심하고 조심하소서.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흰색과 검은 색도 분변 못하는 자는 아니니, 어찌 이런 말을 하면 앙화가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홍무적(洪茂績) 등은 이이첨의 죄상을 조금도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바다 밖으로 귀양을 갔고, 원이곤(元以坤)은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조금 진달하였다가 화를 당하여 옥에 갇혔습니다. 신이 말한 것은 모두 선배들이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온 나라에서 한 사람도 감히 말하지 않은 것이니, 신이 당할 앙화의 경중은 앉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진덕수가 《대학연의》에서 말하기를 ‘간신(奸臣)이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언로(言路)를 막아서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되어 밖의 일을 보지 못하게 한 뒤에 그 욕망을 멋대로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는 나라를 찬탈하고 작게는 권세를 잡고 정치를 멋대로 하여 못하는 짓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선(正先)이 죽자 조고(趙高)가 정치를 멋대로 하였고 왕장(王章)이 죽음을 당하자 왕봉(王鳳)의 권세가 더욱 치성해졌으며 두진(杜璡)이 쫓겨나자 이임보(李林甫)가 전횡을 하였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이 평소 알고 있던 바입니다. 옛날에 일을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임금이 용납을 하고 죄를 주지 않으면 간신이 반드시 간교한 꾀로 모함을 하여, 혹 다른 일을 가지고 몰래 중상을 하여 죽이기도 하고 혹 귀양을 보내놓고는 그곳 수령을 시켜서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신이 평소 염려하던 바입니다. 성인(聖人)께서 말을 공손하게 하라는 경계를 하셨고 몸을 보전하는 방도를 일렀으니, 이 뜻을 신이 또한 조금은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위태한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신의 집안은 3대 동안 국가의 녹을 먹었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만약 나라에 위급한 일이 일어나면 국난(國難)에 달려나가 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이 이러하고 나라가 위태롭기가 이러한데, 남쪽과 북쪽의 오랑캐들이 이런 틈을 타서 침입해 온다면, 비록 난리를 피하여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더라도 또한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며 꼼짝없이 어디 도망갈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보탬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전하를 위해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의 말을 옳게 여기신다면 종묘 사직의 복이요 백성들의 다행일 것이며, 비록 옳지 않다고 여기시어 신이 죽게 되더라도 사책(史冊)에는 빛이 나게 될 것입니다. 신은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다만 신에게는 노쇠하고 병든 늙은 아비가 있는데, 이 상소를 올리는 신을 민망하게 여겨서 온갖 말로 중지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이치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세히 말씀을 드리고 또한 임금과 신하 사이의 큰 의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의 아비는 금지시키고자 하면 나라를 저버리게 될까 염려되고 그대로 들어주자니 아들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쌍하여 우두커니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상소를 올림에 미쳐서는 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용감하게 결단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 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인자하신 성상께서는 비록 신에게는 무거운 벌을 내리시더라도 신의 늙은 아비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도록 하시어, 길이 천하 후세의 충신과 효자들의 귀감이 되게 하소서. 참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바라는 바입니다.
신이 진달할 말은 이것뿐만이 아니나 글로는 뜻을 다 말씀드리지 못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아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왕좌에 계시면서 조용한 시간에 《대학연의》의 변인재(辨人才) 등의 조항을 가져다가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읽어보시면 군자와 소인의 정상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조정의 격례(格例)를 알지 못하여 말이 대부분 차서가 없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다. 그 뒤에 양사의 합계에 대하여 전교하기를,
"윤선도를 외딴 섬에 안치(安置)하라. 윤유기(尹惟幾)는 윤선도와는 전혀 다르니 단지 관작을 삭탈하기만 하여 시골로 내려보내라."
하였다.
저 윤선도가 어부사시가로 유명한 그 사람처럼 보인다면 정확히 본거임. 이 상소문을 요약하면 1616년에 대북파, 그중에서도 이이첨을 통렬하게 비판함. 1616년은 광해군 즉위 극초반도 아니고 봉산옥사와 계축옥사 및 영창대군 제거 같은 피바람이 분 뒤라 이것만으로도 목숨을 건 행동임. 거기에 윤선도는 겨우 그정도로 되겠냐는 생각이었는지 아예 자길 죽여도 상관없다 말한 다음에 아버지에게는 죄를 묻지 말아달라고 함.
참고로 윤선도와 대립하던 송시열은 한 세대 아래 사람이다.
근데 보길도 그 작은 섬에서 연못과 정자를 지을때 섬사람들 얼마나 괴롭혔을까 생각해 보면 또 헛웃음이 남.
자긴 왕(이었던 자)에게 들이받고도 살아남은 사람인데 평민들이 그런 자길 어찌할 수 있겠냐는 생각으로 그랬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