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다.
이 전쟁의 패배로 자신감을 잃은 프랑스 국민들은
패배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프랑스 내 유대인들이었다.
프랑스의 극우 언론사 "라 리브르 파롤"등은
연일 유대인을 비방했고
악마 같은 유대인들 때문에 지금 나라가 이 모양이 됐다며
옛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이처럼 프랑스가 반유대주의에 물들어가던 1894년,
35세의 군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드레퓌스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매우 애매한 것들 뿐이었으나,
그가 유대인 혈통이라는 것이 결정적으로 적용했다.
재판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프랑스 국민들은 이 "유대인 배신자"를 하루빨리 처단하길 바랬다.
결국 드레퓌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훈장과 계급장을 압수당한 뒤
지금까지 군인으로서 쌓아온 공적을 모조리 취소당하는
굴욕적인 불명예 제대를 하고
섬으로 기한없이 유배당한다.
그렇게 사건이 끝나는것 같았지만....
이때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나선다
에밀 졸라는 문학 신문 "로로르"의 첫페이지를 빌려
역사에 길이 남을 "나는 고발한다"라는 이름의 사설을 투고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이 사설은,
드레퓌스가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를 받고 있으며
그의 재판은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이 투고로 프랑스의 여론은
드레퓌스 옹호파와 반대파로 완전히 분열되어
끊임없는 토론과 난투로 혼란에 빠진다.
이 모든 혼란을 불러온 에밀 졸라는
극우 언론사들에 의해 나라를 좀먹는 매국노라고 비난받았으며
성난 군중들은 에밀 졸라의 작품과 초상화를 불태우고
그의 목숨을 위협했다.
결국 에밀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하고,
후에 프랑스로 돌아와 다시 활동했으나 급사하고 만다.
죽기 직전 에밀 졸라는
"조국 프랑스가 지금은 나를 욕할지라도, 훗날 나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에밀 졸라는 죽었으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결국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드레퓌스를 고발했던 정보부 소속 "페르디낭 에스테라지"가
진짜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렇게해서 사건의 피해자였던 드레퓌스는
12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아내어
군부대에 복귀했고
에밀 졸라는 "프랑스의 명예를 구한 대문호"가 되어
프랑스의 국립묘지 팡테온에 이장된다.
졸라가 없었으면 히틀러는 프랑스 출생이었을것
명예를 구했다고 봐야되나? 한국 감성에서 저정도 했으면 이미 국격은 땅에 떨어져서 수치스러운 일 아님?
프랑스가 벌인일에 비하면 저정도는 매우 명예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