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0613853
누르하치는 1585년 음력 2월에 당시 본인이 통솔하고 있던 휘하 병력의 8배에 이르는 적대세력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다. (타이란 전투) 그리고 그로부터 2달 뒤에는 본인이 통솔하고 있던 군대의 10배에 달하는 적대세력 연합군과 일전을 벌여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혼하-기린 하다 전투)
두 전투에서의 승리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건주 내에서 확고부동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누르하치의 명성은 상승했고 반대급부로 그를 적대하던 건주 세력들은 위축되었다. 이제 건주에서 누르하치를 단독으로 상대할 만한 세력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1585년 음력 4월 혼하-기린 하다 전투로부터 1585년 음력 9월까지 다소 잠잠한 시간을 보낸 듯 하다. 이 시기에 그의 행적은 사실상 비어 있다.
누르하치가 거진 5개월여 동안 외부 원정 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농번기 기간이었던 만큼 외부 행동을 자제하고 내부 생산 활동에 집중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음력 4월의 전투 이후 당분간 외부적 돌출 행동을 자제하며 적대 세력들의 움직임을 살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후자의 추측에 좀 더 집중코자 한다. 비록 음력 4월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다지만, 누르하치에게 있어 자이피얀을 구심점으로 하는 적대세력 연합군은 여전히 상당히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전력은 여전히 상당수 유지되고 있었다. 음력 4월 전투에서의 적군 총투입병력이 8백여명이었던 것에 비하여 실제 전사자는 1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는 또 다시 수백명의 적과 싸워야 될 수도 있었기에 누르하치로서는 당분간 외부적 움직임을 자제하면서 연합세력이 결집되는지 붕괴되는지를 살피고자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필자가 후자의 추측에 좀 더 무게를 실긴 했으나, 기실 두가지 추측 모두 신빙성은 충분하다. 그렇기에 필자는 두 가지 이유의 상호작용 탓에 누르하치가 약 5개월여간 휴식기를 가진 것으로 추정한다.1
약 5개월여간의 휴식 뒤, 누르하치는 1585년 음력 9월 다시 외부원정을 시작했다. 이 때 누르하치는 안투 구왈기야를 공격, 성주 노이모혼2을 죽이고 해당 세력을 복속시켰다. 그 이후에도 다시 장기간 휴식기를 가진 누르하치는 이듬해인 1586년 5월 보이혼을 공격하여 그 곳을 점령했다. 두 곳의 속민들은 물론 모두 누르하치의 휘하로 편입되었다.
두 세력은 모두 1585년 음력2월~4월에 누르하치를 습격했던 건주의 반(反) 누르하치 동맹 소속3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우연일 수도 있겠으나 누르하치가 상당히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일 수도 있다. 요컨대 동맹에 소속된 세력을 건들면 해당 동맹에 소속된 세력들이 자신을 막기 위해 집결할 수도 있기에, 누르하치가 동맹에 소속되지 않은 세력들만 골라 복속시켜 힘을 키웠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르하치가 실제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안투 구왈기야와 보이혼을 공략했건간에, 누르하치는 두 세력을 복속시킨 뒤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 동안 누르하치는 어떤 선제공격시도도 받지 않았다.
1586년 음력 7월, 보이혼을 복속시킨 지 두 달여 뒤에 누르하치는 드디어 자신에 대한 대항 동맹에 소속되어 있었던 '토모호'를 상대로 군을 일으켜 성을 포위공격했다. 그러나 해당 작전 도중에 번개가 쳐 누르하치의 병사 두 명을 죽였다. 누르하치는 그 현상을 불길하게 여겼고 결국 회군하였다.4
누르하치는 일단 회군하긴 하였으나 그렇다 하여 토모호 공격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한 번 공격을 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고 판단하였고 그에 따라 재차 토모호로 진격, 토모호를 복속시켰다.
토모호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청태조실록과 만주실록에 모두 음력 7월의 1차 토모호 공격과 연달아 기록되어 있으므로 회군한 뒤 최소한의 재정비만 하고 거의 곧장 재출격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다만, 토모호는 누르하치에 의한 직접적인 공성으로 함락되진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들은 직접적인 공성으로 인해 성이 함락되기 전에 누르하치에게 항복을 요구받고서는 그대로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실록 만문본은 이 사건에 대해 누르하치가 토모호를 '항복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청태조고황제실록 한문본은 누르하치가 토모호로 진격하여 '초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들을 보건대 누르하치가 토모호를 물리력으로 점령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성이 함락되기 전에 누르하치가 토모호에 항복을 요구하였으며, 토모호측이 이를 수용하여 항복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토모호까지 점령한 후 누르하치는 드디어 한 가지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최초에 거병을 한 목적이자 자신의 부친과 조부의 원수인 '니칸 와일란'에 대한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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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물론 청사고와 팔기통지의 누르하치의 거병동지들(어이두등)의 행적을 살펴보자면 시기가 쓰여 있지 않은 누르하치의 군사행동들도 보이기에 이 5개월간의 공백기에 해당 군사작전이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외부에 대한 군사 행동은 하지 않았으나 이 시기쯤 동해여진의 후르카의 일부가 누르하치에게 귀부해왔다.
2.만주실록서는 놈혼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노이모혼이 이전 동고부와 닝구타 버일러 세력간의 다툼에 하다측의 사신으로 등장했던 노이모혼과 동일인물인지 혹은 동명이인인지는 불확실하다.
3.자이피얀, 바르다, 토모호, 사르후, 둥기야
4.이는 당시 여진족의 샤머니즘적인 신앙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