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한참 임진왜란이 진행중이던 1592년 음력 6~7월 사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었다가 조선으로 복귀하던 신점과 당시 조공 및 요청 상주차 명에 들어와 있었던 '건주의 도독'이 영평에서 조우했다. 이들은 월경 채삼인의 송환 혹은 대처 문제로 잠시 설전을 벌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곧 헤어졌다.
이때 신점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건주의 도독'이 누구인지에 관하여서는 이설이 있다. 크게 두 가지로 설이 나뉘는데, 당시 건주의 지배자로서 명으로부터 도독첨사의 직첩을 받았던 누르하치라는 설과 누르하치 휘하의 외교실무자이자 명으로부터 도독지휘의 직첩을 받았던 마삼비라는 설이다.
신점과 '건주의 도독'이 대화를 나누었던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음력 8월 10일에 누르하치의 상주문이 명조정에 바쳐진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에1, 해당 도독의 정체는 누르하치라는 의견이 다수의 주류이다. 그러나 마삼비라는 의견 역시 근거가 있다. 해당 주장은 마삼비에 의한 '본인의 누르하치 설득을 통한 건주의 임진왜란 참전 가능성 표명' 즉슨 청병제의가 음력 9월 14일경 요동도사를 거쳐 조선 조정에 전해진 것을 근거로 한다.2
마삼비의 청병제의는 조선왕조실록과 동이고략을 근거로 볼 때 마삼비가 조공을 바치러 명나라 영토에 들어온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해당 제의가 발생한 시기는 조선에 해당자문이 전해진 시기를 고려해보건대 음력 8월중후엽에서 9월초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점과 대화를 나눈 '건주의 도독'이 마삼비라는 의견은 해당 청병제의가 제기된 상황과 시기를 근거로 삼는다. 다시 말해 마삼비가 누르하치를 대행하여 조공과 상주문을 올리기 위해 명나라에 들어온 상황에서 영평서 신점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말미암아 음력 8월에 '누르하치가 상주문을 올렸다'는 신종실록의 기록을 통한 지적을 회피 혹은 반박한다. 마삼비가 대행을 했더라도 '누르하치의 상주'임은 맞으니 누르하치의 상주로 기록되고 그로서 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음력 9월 17일 기사에 실려있는 요동도사를 통한 병부의 자문을 살펴보면 마삼비가 '이번 조공에서 회환하면(如今朝貢回還), 누르하치에게 파병에 관해 건의하겠다'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부의 자문이 발송된 시기가 시기이다보니, 언급된 '이번 조공'을 자칫 음력 8월에 있었던 조공겸 상주로 판단하기 쉽다. 그렇기에 마삼비가 '음력 8월의 조공'을 위해 명나라에 왔다가 신점과 만난 것이라는 유추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이번 조공'이 지칭하는 조공은 음력 8월의 조공겸 상주가 아니라 기록상 음력 10월에 있었던 조공, 즉슨 청병제의를 발언한 시점서 미래에 있을 조공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기 건주는 1년에 2회 조공하거나 입경하여 상주를 했다.31592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해에 건주는 음력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을 했다. 그런데 이중 음력 10월에 있었던 건주의 입공은 그 주관자가 명확하다. 명신종실록을 살펴보면 음력 10월의 조공 주관자가 '마합합길(馬哈哈吉)'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마합합길은 마삼비의 명나라식 호칭중 하나이다. 즉, 음력 10월의 건주 조공은 마삼비가 직접 북경에 와서 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음력 10월의 조공을 마삼비가 주관했다면 음력 8월의 입공과 상주는 응당 다른 사람이 주관했을 수 밖에 없다. 북경과 건주를 왔다갔다 하는 왕복 시간과 조공을 대기하는 시간, 회동관에서 거래를 하는 시일등을 고려 해보자면 음력 8월에 조공을 바친 인물이 건주로 돌아가고서 2개월 만에 또 다시 조공을 바치러 올 수는 없는 법이다. 즉, 음력 8월의 조공은 기록대로 확실히 누르하치가 주관했으며 음력 10월의 조공은 마삼비가 주관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음력 10월의 조공을 준비하고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명나라 지역에서의 대기 시간등을 생각해 보자면 마삼비가 이끄는 2차 조공단의 경우 음력 8월부터 조공을 준비하고 이후 요동을 경유하여 북경을 향해 이동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당장 음력 6~7월에 있었던 영평부에서의 '건주의 도독'과 신점간의 대화와 음력 8월 10일의 누르하치의 상주문 진공간의 시간차를 생각해 보자면 음력 10월의 조공 역시 이동에서부터 입공까지 거진 1달에서 2달 정도의 시간은 소요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삼비가 음력 8월에 조공을 바치러 명나라에 들어와서 '청병 제의'를 하고 그것이 음력 9월 14일에 조선에 자문형식으로 전해진 것도 시일상 가능하다.
물론 마삼비가 북경에 들어와서야 청병 제의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시기상으로 볼 때 이 때 마삼비는 북경에 들어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요동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명나라 관리들에게 해당 발언을 했고, 그 발언이 요동도사에 의해 병부로 전해진 뒤 병부에서 논의하여 다시 요동도사를 통해 조선으로 자문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결론적으로, 음력 8월에 누르하치의 상주를 바친 인물은 누르하치를 대행한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누르하치 본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마삼비의 경우 음력 10월의 2차 조공을 주관하였으므로 음력 7월 이전 영평부에서 신점과 대화를 나누었던 '건주의 도독'은 '마삼비가 아니라 누르하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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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명신종실록 만력 20년 음력 8월
2.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음력 9월 14일
3.박정민, 누르하치의 두만강 유역 진출과 조선의 藩胡 상실, p.181.2014
이거 나중에 다 모아서 책으로 낼꺼지?
누가 이딴걸 출판해 주겠음.
아냐. 의외로 별 거 별 거 다 출판해. '세계관으로의 미술론' 뭐 이런 것도 출판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