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중심을 한 서북지역은 자강운동계통의 국권회복운동의 근거지였다.
일제는 병합과정 및 이후의 무단통치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탄압했고,
따라서 1910년의 안악사건에 이어 1911년,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하였다.
<신민회>의 창립발의자인 안창호
그 결과 서북지방 국권회복운동의 조직기반인 신민회가 해체되었다.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의 주체인 지식인, 사회유력자층, 지주·상인층을 겨냥한 이 사건으로 인해 평양의 자본가층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 신민회는 자강운동과정에서 특별히 활약했던
양기탁·신채호·장도빈 등 대한매일신보계의 언론인 및
전덕기·이동녕·이회영·김구·옥관빈·조성환 등 상동청년학원계 인사,
안태국·김동원·이덕환·이승훈 등 서북지역 인사들, 이동휘·이갑·유동열 등 전직 무관인사 등이 망라되었다.
국내 신민회 중앙조직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총회(總會)로 불렀으며,
이 중앙총회 아래 도별로 1개의 도지부(감독부), 5개 군에 총감소(總監所),
군 단위에 사감소(司監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신민회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평안남·북도 지방이었다.
105인사건의 평양지역 기소자 27명 중 상공업계통에 종사한 이는 15명이었다.
84명의 불기소자 중에는 학생이 다수였고, 직업이 잘 파악되진 않으나 그 중 8명은 상공업종사자로 확인된다.
8명의 상공업자 중 최창환·이영하·이재순은 이 사건 이후인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에 상공업계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
신민회는 서울에 본부를 둔 <청년학우회>와 지역별로 <소년동지회>, <소년면학회>, <식산회>,
<권장회>, <상무동사>, <협성동사> 등 합법적 외곽단체를 결성했는데,
평양의 신민회 외곽조직으로는 대성학교의 <청년학우회>, 숭실학교의 <동제회>,
일신학교의 <면학회> 등 학교조직과 민간유지로 구성된 <권장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교 단체는 강연과 토론회, 친목 등 일반적 교육활동을 했고,
김동원, 안태국, 이덕환 등 평양지역의 자산가들은 교육기관 설립, 운동회, 장학사업 등 주로 자금관련 후원 역할을 맡았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권장회> 소속 회원들이었다.
이들의 직업은 모두 무역상·객주·잡화상·약종상 등 상인이었다는 점이 주목할만한데, 제조업 종사자로는 제과업 한 명이 유일했다.
이덕환의 경우, 대표적인 평양의 무역상으로서 105인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형을 치른 뒤 출소한 뒤에는
장영한과 함께 평양염직소 염직소를 경영했다. 윤성운은 포목상·잡화상 및 금전대부업 을 하는 안주 출시 상인이었고,
윤원삼은 견면포를 운영하던 포목상이었다. 그리고 약종상 약재 등을 취급하는 상인이 다수였는데,
일본 상인들이 평양의 상권을 침탈하면서 약종, 도기, 잡화 등을 점유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이 업종의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여겨진다.
비단 신민회뿐만 아니라, 1910년대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무역상, 잡화상 등 상업 종사자가 많았다.
각 비밀결사조직은 상회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대한광복회>
그러나 모든 상인계층이 이러한 독립운동에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105인사건에 연루된 상인 중에는 이춘섭, 정인숙처럼 오히려 일제에 타협적인 인물도 있었다.
이춘섭은 평양의 지역 유지이자 신민회 평남도지부의 평의원이고 권장회 소속이었으나,
그는 일본과의 포목 무역(쌀->면포 교환체제)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1907년 <평양소방조> 창립 당시 재원을 기부하여 부통감에게 상을 받기도 하고,
1913년 도로용 토지를 기부하고, 이듬해 지방비로 상당한 금액을 기부하여 데라우치 총독에게 표창받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일본어에 능통하고 일본 사정에도 해박하며
일본인과의 교제 및 상업적 관계가 평양상인 중 으뜸’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무역상이었던 정인숙도 1906년 결성된 조선상업중의소 부회장을 지내고,
이후 이를 개칭한 조선인상업회의소의 회장을 지냈는데, 1914년 평양부협의회의 관선의원에 임명될 만큼 일제와 우호적이었다.
일제가 이러한 타협적 인물들까지 105인사건으로 검거한 것은, 평양의 저항적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제국주의유통체제 형성과정에서 자신의 기득권에 타격을 받은 직·간접적 대상자들을 무단통치에 순응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평양 자본가층의 정치적 입장이 아직 크게 분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시기에 대지주 및 지주적 기반을 공유하는 일부 대상인은 정치적으로 일제와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상인층은 국권회복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거나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평양지역의 신민회는 산하의 합법적 외곽단체가 자강운동의 범주에서 활동한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정치적 운동을 하지 못하고 와해되고 말았다.
그래서 신민회 붕괴 이후 한동안신민회의 붕괴 후 무단통치하에서
평양 자산가층이 민족운동조직을 회복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3·1운동 전까지의 평양 비밀결사운동은 대부분 기독교계열 학교를 근거지로 한
재학생, 졸업생, 교사 등의 학생·청년·지식인층이 주도했다.
이들이 구성원으로 활약한 대표적인 비밀결사는 <기성볼단>과 <조선국민회>가 있다.
이들의 활동성향은 이전과는 달리, 독립전쟁노선을 지향했는데, 그들은 군자금 모집을 위해서
변호사나 의사 등 부유한 지역 유지 및 무역상·목재상·정미공장 등의 상공업자, 그리고 대지주들을 주 타겟으로
약탈이나 위협등을 통해 군자금을 모았는데, 그들 중에는 일제에 타협적인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한편, 3.1운동 이후 평양에서는 조선인 공업이 점차 발전하면서 자본가층의 내부구성도 변화했는데,
이러한 경제적 변화가 운동노선의 전환으로 반영되었다.
평양지역 자본가층은 운동 방법 면에서 의견이 달랐으나
대부분절대독립을 위한 독립전쟁노선을 지지하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일부 부르주아 계층이 3·1운동을 기점으로 이러한 정치운동 형태의 비밀결사운동에 대한 회의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회유와 강압으로 조선 자본가를 제어하려 했던 조선총독부 제 2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
또한 일제가 1919년~1920년 비밀결사운동의 지원세력으로 자본가층에 주목하고
이들의 활동을 분쇄하거나 회유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일제를 끝까지 반대하던 이덕환 같은 자본가들은 결국 경제적으로 위축되었고,
일제에 포섭되어 내선융화(내선일체)를 부르짖는 타락한 자본가층이 평양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타락한 자본가층의 대표적인 인물인 심천풍 외 5명은
1919년 5월경에 조선의회를 개설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와 생존에 필요한 교육을 할 것을
주장하는 청원서를 일본 국무대신 및 조야에 제출했는데, 이는 당시 3·1운동 이후 부상하고 있던
고의준, 정응설, 홍병선, 심우섭, 고원훈 등 자치파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선우순, 나일봉, 김흥건 등은 내선융화(내선일체), 공존공영 공존공영(共存共榮)을 목적으로 한 <대동동지회> 본부를
1920년 10월 평양에 두고, 평남 일대를 대상으로 활동했는데 창설 6개월 만에 회원수가 2,500~2,600여 명에 달했다.
나일봉과 김흥건은 비밀결사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인물로, 이들의 친일로의 변절은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친일단체 <국민협회>를 결성했던 민원식. 그는 조선에도 일본과 같은 참정권을 도입하자는 이른바 자치론자였다.
당시 사회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는데, 1921년 후반 평양일대의 반일 분위기는 침체된 경향을 보였고,
이 기회를 틈타 일선융화(내선일체)사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친일 여론과 총독부의 선전을 유포했다.
친일단체였던 <국민협회>의 평양지부는 회원 수가 수백이 넘고, 명함에도
당당히 국민협회 회원임을 분명히 기입하여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 생겼다.
1921년 4월에는 평안남도 지사가 조선인 목사와 전도사를 불러 다화회(茶話會)를 열었는데,
출석한 100여명 중에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자(이후 무죄석방 됨)도 참여했고,
일제조차 나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참여하여 속마음을 드러내자 일제의 호감을 받았으며,
일제 관헌(관리)와 친근히 상의하고 그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조선인 목사가 증가했다는 일제측 기록을 볼 때,
민족주의 인사들의 개량화·친일화 경향이 분명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말 이후 국권회복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평양지역의 비밀결사운동이 크게 쇠퇴하는 한편,
비밀결사를 뿌리 뽑고 민족분열을 도모한 일제의 정책이 유효하게 작용하여 민족주의계열을 분열시켰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조선인 자본가층을 탄압 혹은 회유하는 것은 일제의 일관적인 방침으로서, 이를 실현한 대표적 사례가 <기성다화회>였다.
(기성(箕城)은 평양의 옛 이름이며, 다회회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모임을 뜻한다)
1917년 1월 결성된 이 단체는 평양부 내의 자본가· 학교평의회 의원·부협의원·목사·변호사·의사 등 지역 유지를 회원으로 두었으며,
부윤과 경찰서장 등 일제 당국자가 각종 정책에 대해 재정적 협조를 구하는 모임이었다.
가령 제3보통학교 증설과 비행대회의 원조, 금융조합 설립 등에 대해 재정적 협조를 요청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는 말이 자문이지, 사실상 강요로서, 이 모임의 참여율은 갈수록 떨어졌다.
다른 지역도 이러한 월례모임의 <관민다화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기성다화회>는 1919년에 <평양유린회>로 개칭되었는데, 회장은 일본인이었으나 부회장·고문·평의원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평양유린회>는 지역 유지를 동원해 일제정책을 선전하고 조선의 절대독립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 비밀결사란 정치운동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독립을 지향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조직체를 말한다.
** 비밀결사의 결성목적은 궁극적인 조선의 독립이며, 단순한 무장투쟁노선과 실력양성을 통한 무장투쟁노선이 있다.
** 신민회는 그러한 비밀결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으나, 강제병합 이전에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는 못하고 교육과
식산흥업에 주력하다가, 강제병합 후, 일제가 데라우치 암살미수 사건인 '105인 사건'을 빌미로 강제해산 시켜버렸다.
- 요약 -
1.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에서 자본가계층, 특히 상인계층이 중심이 되어 신민회 등의 단체를 설립하여
자강운동중심의 국권회복운동을 펼쳤으나, 일제는 105인사건을 일으켜 신민회를 와해시켰다.
다만 모든 상인계층이 독립운동에 협조적인건 아니었고 오히려 일제와 타협하는 이들도 있었다.
2. 신민회 와해 후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는 학생 등 지식인 층이 중심이 되었고,
이 때 결성된 비밀결사 단체들은 독립전쟁노선을 지지하는 식으로 운동노선의 변화가 있었다.
3. 그러나 3.1운동 이후, 평양지역에는 공업의 발달로 자본가 계층의 구조가 변화하였고,
그 과정에 주목한 일제의 회유와 협박이 먹혀들면서 점차 친일 자본가가 늘어나면서 운동세가 침체된 면이 있다.
요약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