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 사건
1977년 11월 12일 오후 9시에 현재의 익산시가 된 이리시의 이리역에서 발생한 사건임
현재 한화 그룹의 모회사이고 롸끈하기로 유명한 김승연 회장의 아버지인 김종회 회장이 창업한 한국화햑에서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총 40톤 가량의 고성능폭 폭발물을 기차를 통해 광주역으로 운송하고있었음
근데 폭발물들을을 보낼 때 같이 간 호송원으로 화약, 폭발물에 대한 자격증이나 교육을 받은 적 없는 무자격자를 보냄
또한 법적으로 뇌관과 폭발물, 화약을 함께 운송할 수 없지만 그냥 같은 칸에 넣어서 보내버림
게다가 철도 요원들의 부패가 심해서 뇌물을 주지 않으면 역에서 길면 하루가 넘도록 역 내에서 대기 하고
뇌물을 많이 주면 그만큼 빨리 기차를 보내주는 관행이 있었음
법적으로 폭발물, 화약등은 역 내 대기가 불가능 하며 무조건 보내야 하는데 뇌물을 받겠다고 멈춰 세움
이 때문에 열받은 호송원이 술마시고 돌아와서 폭발물이 있는 칸에 촛불을 켜놓고 침낭깔고 자버림
그러다 초가 넘어지면서 화물에 불이 붙었고 자고있던 호송원이 깨서 침낭으로 불을 끄다 침낭에 불이 붙어 오히려 불이 커짐
불이 커지자 호송원은 빤스런하고 뇌물 때문에 기차를 세웠던 철도 요원들은 폭발물에 불이 붙은 알고 그대로 빤스런함
그냥 빤스런한 것도 아니고 아무런 대피 명령이나 상황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침
철도 검수원들이 불이 난 것을 보고 모래와 물을 가져와 불을 진압하려 했으나 결국 폭발함
폭발 중심지에는 깊이 10m 지름 30m의 크레이트가 생겼고 500m 이내의 건물들은 전부 무너짐
당시 이리역 부근엔 부실 건물로 만들어진 판자촌이 있었는데 충격을 못 이기고 죄다 무너지면서 피해가 더 컸음
총 59명이 사망하고 중경상자는 모두 1158명이고 7800여명 정도의 이재민이 생김
1km가 넘는 곳 까지 파편들이 총알처럼 날아갔다고 하니 그 위력은 어마무시했음
빤스런한 호송원은 무사히 살아남아 잡혔고 피해를 받은 주민들의 선처와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징역 10년을 선고받음
같이 빤스런한 철도 요원들에 대한 뉴스는 찾을 수 없어서 모름
이때 하춘화가 근처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저 사고로 건물 무너지는거 당시 무명이던 사회자 이주일이 구해줘서 그 뒤로 하춘화가 이주일 엄청 밀어줌
하춘화는 당시에도 스타였고 무명 코미디언 겸 사회자인 이주일이 폭발당시 자기 부상과 머리에 불붙는거까지 감수하면서 자기보다 스타인 하춘화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탈출시킴 이주일도 가까스로 살아남고 하춘화는 은혜 갚는다고 자기 공연의 사회자는 무조건 이주일로하라고 공연계약때마다 압박넣었다고 함
아무리 무자격자라도 화약이 잇는데 촛불을 켠다니
27년 후 북한 룡천역에서도 비슷한 사건 터져서 자존심만 우라지게 쎈 찌질이 북괴들이 도와주셈 징징징 거렸었지 ㅋㅋㅋㅋㅋ
말이 선처지 저규모에 주민 선처를 받았을리가 있나 엄벌하면 지들한테까지 불똥튀니까 항의하는 사람들은 사람(이었던것) 만들어버리고 대충 관련자 몇명 감방보내는걸로 묻은거겠지
선처 안해주면 안기부에 끌려갔을려나?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2964 왜냐면, 당시 이리역 주변은 판자촌 난개발이 심했고, 그 사이에 홍등가까지 껴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폭발사고로 이지역이 쑥대밭이 된 대신, 판자촌과 홍등가도 같이 쓸려나가 재개발하는데 엄청나게 쉽게 됐죠. 오죽하면 그때 홍등가에서 돌던 금목걸이나 반지들을 사고 후 근처 살던 어린애들이 주워서 횡재했다고 보물찾기까지 하러 오고 그랬답니다. 이게 용산참사랑 제법 비슷한 뒷이야기.
대충 아이유를 구한 무명 코미디언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할 듯 함
저런 거를 실어나르는데 직원을 안 보내다니..
삼성건설이 벌인 일이었지. 요즘 온천장 래미안 보면 이제 다 잊었구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이 든다.
난 구포열차 사고 생각했었네
나도 78명사망ㄴ 구포열차 사고인줄
아무리 무자격자라도 화약이 잇는데 촛불을 켠다니
이때 하춘화가 근처에서 공연하고 있었는데 저 사고로 건물 무너지는거 당시 무명이던 사회자 이주일이 구해줘서 그 뒤로 하춘화가 이주일 엄청 밀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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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마망마망마망사랑
하춘화는 당시에도 스타였고 무명 코미디언 겸 사회자인 이주일이 폭발당시 자기 부상과 머리에 불붙는거까지 감수하면서 자기보다 스타인 하춘화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탈출시킴 이주일도 가까스로 살아남고 하춘화는 은혜 갚는다고 자기 공연의 사회자는 무조건 이주일로하라고 공연계약때마다 압박넣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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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마망마망마망사랑
대충 아이유를 구한 무명 코미디언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할 듯 함
이썰은 알고 있었는데 저 사고 때문인건 처음 알았다
저도... 본문이랑 댓글 보고 와.. 이게 이렇게 이어지네 함...
오우 생명의 은인 제대로 대접했네
태연을 구한거 아님 오정태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 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 뒤 1977년 이리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인근에서의 대규모 폭발사고로 인해 극장이 무너져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고[4].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순서가 반대 아님?
1974년 봄이었다. 얼굴 때문에 최봉호(崔奉鎬)씨와 김영호(金瑛鎬)씨에게 연이어 퇴짜를 맞은 나는 충무로를 다시 기웃거리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동네 약장수 쇼의 MC도 마다하지 않던 그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주일이, 너 이리로 빨리 와야겠다.” 최씨의 전갈이었다. 지방 공연을 끝낸 하춘화가 서울 국도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사회자가 펑크를 낸 것이다. 사회자는 가수 박상규(朴祥奎)씨. 그가 방송 출연 때문에 낮 공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최씨가 다급히 나를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대본을 주는데 태어나서 대본을 그렇게 열심히 외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대에 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날 쇼의 주인공은 김추자(金秋子)와 쌍벽을 이루던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하춘화가 아닌가. 무대에서 무엇을 말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넘어질 땐 확실히 넘어졌고 구를 땐 확실히 굴렀다. 귀를 파고드는 엄청난 웃음과 환호. 무릎에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른 채 넘어지고 구르면서 울고 또 울었다. 아내 생각도 났고 큰 아들 창원(昌元)이 생각도 났다. 그날 밤 여관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최씨가 나를 찾아왔다. “야, 고기 좀 먹어야지. 그래 갖고 힘 쓰겠냐.” 그리고는 여관 옆에 있던 장어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양껏 먹어. 너 하는 짓 보니까 보통 먹어선 안 되겠다.” 나는 이 몇 마디에 감동해버렸다. 그 맛있는 장어를 어떻게 먹어치웠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다. 그날 이후 나는 하춘화 쇼의 단골 사회자가 됐다. 적어도 500회 이상을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슬슬 전국무대에 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리역 폭발사고가 사회자 된 것 보다 나중에 있었던 일 맞음.
저런 거를 실어나르는데 직원을 안 보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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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새
선처 안해주면 안기부에 끌려갔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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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새
http://www.wk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2964 왜냐면, 당시 이리역 주변은 판자촌 난개발이 심했고, 그 사이에 홍등가까지 껴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폭발사고로 이지역이 쑥대밭이 된 대신, 판자촌과 홍등가도 같이 쓸려나가 재개발하는데 엄청나게 쉽게 됐죠. 오죽하면 그때 홍등가에서 돌던 금목걸이나 반지들을 사고 후 근처 살던 어린애들이 주워서 횡재했다고 보물찾기까지 하러 오고 그랬답니다. 이게 용산참사랑 제법 비슷한 뒷이야기.
씁쓸한 이야기...
27년 후 북한 룡천역에서도 비슷한 사건 터져서 자존심만 우라지게 쎈 찌질이 북괴들이 도와주셈 징징징 거렸었지 ㅋㅋㅋㅋㅋ
그거 터진 것 때문에 진짜 별에 별 카더라 많이 나왔는데 시리아 과학자 때죽음 당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 개입설도 있었고 ㅎㅎ 그 때 김정일 뒤졌으면 참 좋았을 것을
https://namu.wiki/w/%EA%B5%AC%ED%8F%AC%20%EB%AC%B4%EA%B6%81%ED%99%94%ED%98%B8%20%EC%97%B4%EC%B0%A8%20%EC%A0%84%EB%B3%B5%20%EC%82%AC%EA%B3%A0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도 만만찮지 ㄷㄷㄷ
FluffyFox
삼성건설이 벌인 일이었지. 요즘 온천장 래미안 보면 이제 다 잊었구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이 든다.
삼성건설이 아니라 삼성물산 건설부분인 이유가 이 사고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이 사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사고지점 근처에 살고있던 집 빨랫줄에 시체 파편이 날라와서 달려 있었다고함,...
ㅋㅋ화약 옆에서 촛불 켜놓고 잠을 잔다고? 진짜 뭔깡이지 제대로 돌았네
기름 훔치면서 안보인다고 라이타로 확인하다 죽는사건도 은근히 많은데 멀
현재 울나라 말고 과거랑 다른 개발도산국들보면 그런사건 많음
무자격자에 70년대였던거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함.. 60-70년대분들중에 팔다리 없으신분들이 폭탄가지고 놀다가 터져서 팔다리 없거나 실명한분들도 꽤 됨
멀리도 아니고 작년엔가 멕시코 송유관 터진데서 기름퍼간다고 몰려들었다가 폭발한 사고도 있었잖아. 밤에 안보인다고 라이터 켜서 터진거라던데....
말이 선처지 저규모에 주민 선처를 받았을리가 있나 엄벌하면 지들한테까지 불똥튀니까 항의하는 사람들은 사람(이었던것) 만들어버리고 대충 관련자 몇명 감방보내는걸로 묻은거겠지
용천역 사고인줄 알았는데
저때 사고 수습 빡씨게 해서 성공가도 달린 기업이 한화
우리아빠 말씀으론 갑자기 집에있는 창문이 열렸다고함 이리역에서 차로 십분거리에 있었는데도
저 당시는 사형 있지 않았나 저걸 안죽이네
고의성이 없으면 어지간해서는 사형 안 나오니까 뭐
뇌물로 저 지랄한 새끼 죽었으면 좋았을건데 아쉽
구포 탈선이 아니네..
김승연 은근히 좋게 보는 사람들 보면 뭔가 싶다. 한화 팬이라서 그런 건가.
아버지 김종희 회장때 일인데 당시 90억이면 현재 5척억이상인데 사비털어서 복구랑 이재민 지원했음 그래서 별말없이 넘어감
마치 지금의 젠더 이슈를 보는 느낌이 드네요..
응? 설명좀해줘
저 사건 때문에 이리가 익산으로 바뀜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면서 익산시로 바뀐거에요
90년대 초중반쯤 익산으로 통합되었을껍니다.
저 지역 원래 이름이 익산이었음 익산 -> 이리 -> 익산으로 바뀐거 저 사건이랑은 관계없음
본적이 익산인 사람입니다. 모르면 가만히좀 계세요
김종희 회장이 사비90억을 털어서 복구랑 구호에 전념했음 환산하면 5천억이상임 덕분에 지병이 악화디어서 3년후에 돌아가심
근데 그렇게 안하면 3년 채우기도 전에 뒤졌을듯
애초에 호송원을 무자격자로 보낸 한화 책임이네 외국 같았으면 소송으로 저 때 이미 회사 없어졌음
저 당시 인근 도시까지 진동이 느껴졌다지
과연 전북익산 bgm의 탄생지
미필적고의란 법이 탄생하게 된 사건
그건 아동 납치사건임. 사람들 여론이 너무 안 좋아서 범인을 어떻게든 사형시킬려고 만들어낸 논리였음
주민들의 선처???????
무통보 빤스런 후손들을 지하철에서 본거같네..
무식햇던 세대의 웃어넘길수 없는 헤프닝 ㅉㅉㅉ
그나저나 첫짤 사진어케찍었대. 헬리콥타타고 찍은건가
구포 열차전복사고가 최악의 열차사고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