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이수현입니다
1974년 7월 13일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는.
1987년 2월 부산 낙민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90년 부산 동래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저는
1993년 고려대학교 무역학과에입학하여 내공을 쌓고 있었습니다.
털이 많다고 날 털프가이라 부르는 친구들...
영감이라 부르는 친구들...
나는 친구들이 좋습니다.
그들은 나의 가족과 함께 나의 최고 보물입니다
난 땀이 많이 나는 운동이 좋습니다.
MTB, 수영, 테니스, 농구 등 ....
열심히 달리거나, 수영하거나, 땀을 흘리고 나면
나의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며,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난 어쨋든 상당히 활동적입니다.(이수현씨 추모사이트 中)
저는
2000년 1월 일본 도쿄 아까몽까이 일본어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일본에 대하여 알고 싶었습니다.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인 일본.
어쩔수없이 약간의 선입견을 갖은 채 바라봐야 했던,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저는 일본으로 떠나왔습니다.
일본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이해하여
한/일 교역에 이바지 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했던 것처럼 일본의 후지산을 정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겨울...
2001년 1월 26일...
생에 있어 영원한 쉼표를 찍는 날이 되었습니다.
2001년 1월 26일 겨울 술에 취한 한 일본인 행인이 선로로 추락하였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이수현씨가
선로로 뛰어들어서 끝내 빠져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7초...
7초면 선로에서 빠져나올수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달려오는 열차를 손으로 제지시키려했다....
의인 이수현씨의 일은 1억1000만여명의 일본인들은 감동 시켰고
일본의 개인주의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의인 이수현"씨의 일이 있고 난후..
故 이수현씨가 졸업한 부산낙민 초등학교의흉상비
故 이수현씨가 졸업한 내성고등학교의 추모비
故이수현씨가 다녔던 고려대 서창캠퍼스의 추모비 (고려대는 사상최초로 故 이수현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일본 미야기현 한.일 우호기념비
일본 동경 신오쿠보역 내 故이수현 현창비
일본 동경 아까몽까이 어학교 내 故이수현 현창비
부산 어린이 대공원 내 故이수현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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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후..
하나도 준지 감독의 영화 "너를 잊지 않을거야(한.일 합작영화)"가 2006년 개봉했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영화 시사회에 아키히토 일왕부부와 각계각층의 고위인사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는것이다.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관객들 전원은 30초간 기립박수를 쳤다고 한다..
-故이수현씨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이수현 아시아 장학기금"이 설립되었고
단체에 가입한 시민, 학생, 기업인 등등 1만여명이 넘어섰다.
그로인해 485명의 유학생들이 "이수현 장학금"을 통해 공부할수있었다.
2001.1 의사자 증서 받음 (보건복지부 장관)
2001.1 일본 정부 훈장 「목배」 받음
2001.1 일본 「경찰협력장」 받음 (일본 경찰청 장관)
2001.1 일본 「감사장」 (일본 국토교통 대신)
2001.1 용기 있는 행위 칭송사 (일본 내각총리 대신)
2001.1 감사패 (일본 동경 경시총감)
2001.2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받음
2001.3 제 1회 「온겨레 화해와 평화상」 받음
(화해와 평화를향한온겨레 운동본부)
2001.10 부산광역시 제 17회 「자랑스런 시민상」 대상 받음 (부산광역시장)
2001.11 감사패 (재단법인 경찰협회)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불길속에 뛰어들어서 사람 구조하고 국적 취득했지 희생이라는게 말처럼 쉬운게 아님
지금도 신오쿠보역에서 매년 추도문 올리고 함. 작년은 코로나로 취소, 올해도 아마 못하긴 할듯...
의인이지
진짜 영웅이다...
일본도 가끔 저렇게 잊혀질 것 같은 의인들 빼먹지않고 꾸준히 추모하는게 많던데 그런점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외국인이라 생각하니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드네
도쿄나 근처 사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도 함
이수현씨와 그의 옆에서 끝까지 도와준 일본인 사진사 세키네 시로
이 한분 여파로 신오쿠보에 코리안 타운이 형성이 됨
의인이지
진짜 영웅이다...
지금도 신오쿠보역에서 매년 추도문 올리고 함. 작년은 코로나로 취소, 올해도 아마 못하긴 할듯...
진짜 영웅이고 대단한 사람인데 그전에는 이런 비슷한 경우가 없었나? 이렇게까지 추모하는건 잘 이해가 안됨
[삭제된 댓글의 댓글입니다.]
중성마녀
외국인이라 생각하니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드네
유겡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불길속에 뛰어들어서 사람 구조하고 국적 취득했지 희생이라는게 말처럼 쉬운게 아님
영주권일껀데
도쿄나 근처 사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정신적 지주 같은 역할도 함
이수현씨와 그의 옆에서 끝까지 도와준 일본인 사진사 세키네 시로
이 한분 여파로 신오쿠보에 코리안 타운이 형성이 됨
이건 아니지. 원래 오쿠보 신오쿠보는 재일한인이 많았어. 이 사건 이후로 확 플린 케이스라 보는게 타당하지.
일본도 가끔 저렇게 잊혀질 것 같은 의인들 빼먹지않고 꾸준히 추모하는게 많던데 그런점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본 내에서도 반향이 컸고, 한류열풍이 불던 시기라서 한국인에 대한 인식도 나쁘지 않았죠. 그리고 반대로 지금은 혐한기류로 인해 오히려 그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근처의 일본인들이 더욱 더 고인을 기리고 있는 추세입니다. 고 이수현씨는 단순한 '의인의 인류애 발현'을 넘어 한일 사이에 중요한 메시지를 주는 영웅 중 한 사람이죠.
한류열풍 불기 전임. 애초에 한류란 말 만들어진 계기가된 겨울연가가 한국에서 방영된게 1년 후인 2002년이고 저 때는 한국인 인식 졸라 안좋았음. 그래서 저 사고가 더 주목 받은거임
일본 내의 한류는 말씀하신 욘사마 열풍이 영향이 컸지만, 이미 그 전에 중국을 비롯해서 중화권에 한국문화는 이미 들어가 있었고, 거기서 '추운기류'라는 한자어 '한류'를 변용하여 '한류'라는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영상매체(영화 위주)는 새로운 트렌드를 고파했던 일본에 암암리에 반입되고 있는 실정이었죠. 같은 해 에이벡스가 보아와 계약을 맺은 것도 SM(이수만)과 에이벡스가 그 시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 하에 진작에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저희가 뜻을 같이 하는 것처럼 고 '이수현'씨의 의로운 죽음은 양국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는 것이었죠. 얼마 전 일본 내 혐한문화 및 차별문화에 들고 일어나 승소했던 청소년의 뉴스처럼 아직도 보이지는 않지만, 무수한 이수현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들이 꿈꾸었던 살기 좋은 세상이 꼭 도래하기를 저도 희망해봅니다.^^
고대 서창캠 경영학과였나... 매년 저 풀붙서 제사도 올렸음
실제로 지금도 신오쿠보역 승강장 올라가는 계단에는 JR동일본이 이수현씨를 기려서 써놓은 현판이 있음.
그 많은 현지인 젊은 놈들은 뭐 하고 외국인이 뛰어들 때까지;;; ㅅㅂ 우리나라에서 선로 추락 가끔 보면 일단 근처에 건장한 사람 하나 바로 뛰어 내려가드만 저건 사람이 없던 것도 아니고 쥰내 위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네
하다못해 열차 들어오는 입구에서 손으로 신호하는 인간도 없었네 참
좋은 말씀이신데 왜 비추가...
일본인 한명 도와주러 내려 갔다가 같이 사망했음. 알고나 말하길.
저분에 비할건 아니지만 타지생활 3년째 년3번까지 9번 헌혈 다함
같은 학교에 다닌분 이였군요
사람 구하다 사망한건 알았는데.. 손으로 기차를 막으려 했다니... 안타깝네요. 순간 패닉이 와서 그랬을까요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다닌 어릴적 친구인데 수현아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길 바래
훌륭함 빠져나왔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