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 리네스는 색깔에 공감각을 느끼는 사람이다.
빨간 색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른다. 땀이 줄줄 흐르고 손발이 떨린다. 그럴 때면 테이는 눈을 꾹 감는다. 색깔을 안 보기 위해서.
파란 색을 보면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 된다. 몸이 붕 뜨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감각을 느낀다.
이처럼 색깔을 보면 자신의 오감이 흔들린다. 늘 그렇게 살다보니 색깔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어쩔 때는 차라리 눈을 멀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테이는 정신과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신경 안정제를 투여 받았다. 알의 색깔은 분홍색이었다. 테이는 눈을 감고 알약을 입에 털어넣어 물을 마신다. 그러면 조금은 색깔을 봤을 떄의 기분이 약해진다.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지만 테이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르바이트 비용의 대부분은 약을 사는 데 쓴다. 테이에게 일상이란 위험이 도사리는 시가전이었다.
테이가 자신의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 대문 앞에 한 여성이 서 있었다. 테이는 그녀의 블론드 색깔 머리카락을 보고 화장품 냄새를 느꼈다.
"테이 리네스. 맞지?"
"네. 맞습니다만."
"색상을 보고 공감각을 느낀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들었죠?"
"네 정신과 의사에게서."
테이는 병원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자의 개인 사정을 남에게 누설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불합격이었다.
"어떻게 들은 거죠?"
"돈을 좀 썼지. 10만 달러 정도."
테이는 그녀가 부자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사실도. 그녀의 손날에는 굳은 살이 박혀 있었다. 고운 손과 달리 유독 색깔이 다른 그 굳은살은 어딘가에 많이 스쳐서 생긴 것이라고 테이는 생각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그 전에 내 소개부터 해야겠네."
그녀는 흠흠, 소리를 낸 뒤 팔짱을 꼈다.
"나는 레이나 왓슨이라고 해. 직업은 화가야. TV에도 자주 나오는데, TV 안 봐?"
"네.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그런가. 하긴."
레이나는 테이에게 몇 발자국 다가갔다. 그녀는 대뜸 테이의 손을 잡아 들었다.
"화가로 일하지는 않나 보네."
"네."
"그럼 직업이 뭐지?"
"아르바이트 해요. 슈퍼에서."
"세상에."
레이나는 눈을 깜빡였다. 테이는 레이나의 푸른 눈동자에서 당혹감을 발견했다.
"그 재능을 갖고 아르바이트나 한단 말이야?"
"그건 재능이 아닙니다."
"그럼?"
"저주죠."
"나 참."
레이나는 쯧쯧 소리를 냈다.
"네가 화가가 된다면 아마 대성공 할 걸. 나보다도 더."
"관심 없습니다."
"어째서?"
"평범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왜?"
"부럽거든요."
"하하하!" 레이나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거야말로 재능이야. 평범한 사람들이 널 얼마나 부러워할지 알아?"
테이는 눈을 감았다. 이상한 여자였다. 마치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겪는 사람 같았다.
"난 15년이 넘게 그림만 그리며 살아왔어. 그리고 성공했지. 내 그림은 한 점에 200만 달러 씩 팔려. 그런데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그림의 색상을 고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내 마음을 그림에 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내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느낄 때 얼마나 힘든지. 그런데 정작 그림에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자기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니. 완전히 재능 낭비지."
"재능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상이 고통의 연속이에요. 선글라스 없이는 눈도 제대로 못 떠요. 신경안정제가 없으면 발작을 하죠."
"그거 참 힘들겠네. 나 같으면 좋다고 그림을 그릴텐데." 그녀는 조롱 조로 대답했다.
"어쨌든 본론을 이야기해야겠네. 내 어시스턴트가 되어 줘."
"싫어요."
"봉급은 한 달에 10만 달러. 보험까지 다 들어줄게."
"싫어요."
"색깔을 보고 느낌만 말해줘도 돼."
"싫어요."
"지금의 삶보다 훨씬 나을텐데? 집을 보니까 많이 낡았던데."
"싫어요."
"고집불통이구나."
레이나는 다시 테이의 손을 잡았다.
"원한다면 ㅅㅅ 정도는 허락해줄게."
"싫어요."
"그렇다면 저 낡은 집이 좋다는 거야? 슈퍼에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인생이?"
"맞아요."
"왜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거든요."
레이나는 발을 동동 굴렸다.
"아휴! 답답해! 하지만 나도 너처럼 고집 있는 사람이거든? 네가 좋다고 할 때까지 계속 찾아올 거니까 말이야!"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집에 들이지 않을 거니까요."
테이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풍경은 남들이 보기에 살풍경이었다. 흰색 벽지와 흰색 바닥, 흰색 조명, 흰색의 탁자, 흰색의 잡동사니들.
테이는 유독 흰색과 검은색을 보고 안정감을 느끼곤 했다. 무채색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흰색 의자에 앉아 팔을 괴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당하지만 이상한 면도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부자 같았다. 그림 한 점에 200만 달러니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안정된 삶만이 그의 꿈이었다. 더 이상 이상한 사람에게 휘둘려 색깔의 세계에 진입하기는 싫었다.
그는 일어나 집 창문 밖을 훔쳐보았다. 레이나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도 팔을 괴고 있었다.
"잠이나 잘까."
그는 하얀 침대에 누워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레이나가 테이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입을 벌릴 정도로 놀랐다. 그녀의 모습이 머리부터 발까지 흰색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단발 머리는 흰색으로 투명하게 빛나고, 흰색 원피스는 하얗게 하늘거렸다. 하얀 단화는 바닥의 흙을 밟으면 안 될 정도로 깨끗했다. 오른손에 든 가방조차 흰색이었다.
"네 집을 몰래 훔쳐봤지."
"그래서 흰색으로 물들이고 오신 건가요?"
"그래. 흰색을 보면 좀 안정이 돼?"
"네. 어쩌면요."
"집에 들여보내줄래?"
"싫어요."
레이나는 테이의 양손을 기도하듯 꾹 잡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부탁이야. 내 정성을 봐서라도 들여보내 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모습이었다. 테이는 조금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다. 돈이 많다고 해도, 그렇게 온몸을 흰색으로 물들이고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들어오세요."
테이는 문을 열고 레이나에게 손짓했다. 레이나는 뛰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헤헤. 들어왔다."
"어시스턴트 같은 건 안 해요."
"아니야. 그런 용건이 아니야. 네가 싫다는 건 잘 알겠어. 하지만 이 부탁만은 들어줬으면 해."
레이나는 가방에서 그림을 꺼냈다.
"그만 두세요!" 테이는 눈을 꽉 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연필로 그린 그림이니까." 레이나는 일어나서 테이의 눈 앞에 그림을 들이밀었다. 그는 실눈을 떴다.
"이건..."
발작은 없었다. 공감각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도 없었다. 그림의 정체는 연필로 그린 자신의 초상화였다.
"못 그렸지?" 그녀가 질문했다.
"네."
"대답이 너무 빠른 걸."
레이나는 그림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이게 재능 없는 사람의 그림이야. 시작은 뭘 그리든 망가져버려. 그걸 지우고, 다시 그리고, 또 지우고, 또 다시 그려. 난 그렇게 살아왔어. 그리고 색깔을 입히는 건 더 고된 일이야. 색깔이 곧 그림을 결정하니까. 그래서 겨우 겨우 그림이 완성돼."
"네... 그래서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게 열정이 부족하다는 거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같아."
"맞는 말이네요."
"그러니까 부탁이야. 화가의 길에 들어가 줘. 네 재능을 발휘해 줘."
"그러다간 미쳐버릴 거예요."
"그걸 우린 원하는 거라고!" 레이나가 소리쳤다. 테이는 깜짝 놀랐다.
"미치고 싶어! 정신이 나가고 싶다고! 그림을 그리면서 말야! 넌 엄청난 재능을 가졌어. 그런데 '고작' 미칠 것 같다는 기분 때문에 그림 그리기를 안 한다는 거야!? 우리가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만 가지고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는데도! 넌 약올리듯이 집 안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고 말야! 알아들어!?"
"진정하세요."
"난 멀쩡해! 너랑 달리! 평범하다고!"
그녀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였다. 테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나는 다시 가방에서 그림을 꺼냈다. 이번 그림은 다양한 색깔이 난잡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테이는 눈을 꾹 감았다.
"이 그림을 똑바로 봐! 이게 재능 없는 사람의 그림이야! 이 그림을 보고 뭐가 느껴져!?"
테이는 조심 조심 눈을 떴다.
신기하게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멀쩡해요."
"이건 내가 한 달동안 그린 그림이야! 내 열정과 예술혼을 쏟아서! 그런데 이런 그림 따위... 아무 것도 아니야..."
레이나는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림을 집어 던졌다.
"너, 그림 그린 적 없지?" 레이나가 대뜸 물었다.
"네. 없네요."
"너, 외롭지?"
"아니요."
"거짓말 하지 마. 외롭잖아. 색깔이 무서워서 사람도 못 사귀었을 거고. 집도 이런 살풍경으로 만들고. 맨날 선글라스나 끼고 다니고. 외롭지 않은 사람이 그럴 거라고 생각해?"
"괜찮아요."
"안 괜찮아. 내가 보기엔 너 얼마 안 남았어. 죽을 날이 말야. 넌 고통 받고 있어. 세상에 대해서. 네가 타고난 감각 때문에. 왜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거야? 미칠 것 같으면 뭐 어때?"
레이나는 가방에서 흰 캔버스와 물감을 꺼냈다. 테이는 눈을 감았다.
"그려. 네 모습. 색상을 써서. 외로운 너를 그리는 거야."
"안 돼요."
"제발. 한 번만이라도 그림을 그려 줘. 너의 재능을 보고 있으면 질투가 나. 있지, 나, 네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레이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로, 테이는 평생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분이 격정적이 된 레이나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테이는 조심조심 선글라스를 벗었다.
"알았어요. 딱 한 번만, 해볼게요."
"정말이야?"
"정말이에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그림을 다 그리면, 이 집에서 나가주세요. 그리고 다신 오지 말아주세요."
"알았어."
그는 붉은색 물감을 집어들었다. 그 색깔을 보는 순간, 온 몸이 타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윽..." 그는 이를 악물었다.
물감에 붓을 찍어, 그대로 자신의 머리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에 노란색 물감으로 덧칠을 했다.
그런데, 그 색깔을 보는 순간, 온 몸에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왜 그래?"
"아니에요. 계속 할게요."
그는 연이어 갖은 색의 물감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려나갔다. 그러자 색깔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서 와.
외로웠지.
미안해.
아름답게 칠해 줘.
"아..."
고통은 없었다. 색깔들의 속삭임, 가슴에서 쏘아져 퍼져나가는 유성우들, 두근거림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확신을 느꼈다. 색깔들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색깔을 칠한다. 어떨 때는 과감하게, 어떨 떄는 세심하게.
그리고 그림이 완성되었다.
"하하... 하하..." 테이가 완전히 몰입해 그리는 모습을 본 레이나가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부족한 재능에 대한 눈물, 천재를 눈 앞에서 목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복잡한 감정. 그리고 그 천재를 자신이 각성시켰다는 뿌듯함.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레이나는 테이를 뒤로하고 집을 나갔다. 테이는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그저 몰입해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테이는 소파에 앉아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허무해서가 아니었다. 새롭게 맞이한 행복, 살아간다는 느낌이 주는 쾌감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레이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이는 뛰어서 집 밖으로 나갔다.
나뭇잎의 색깔과 나무의 색깔, 바닥 도보의 색깔,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의 색깔마저도 그에겐 이제 두렵지 않았다.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색깔들이 자신의 인생을 위한 팔레트임을, 테이는 겨우 꺠달았다.
그는 전속으로 내달려 레이나를 찾아다녔지만, 레이나는 보이지 않았다.
테이는 스마트폰으로 레이나를 검색했다.
레이나 왓슨. 화가. 사우스 스트리트 12번가 거주.
테이는 바로 일어나 집을 나갔다. 그리고 사우스 스트리트 12번가로 향했다.
"아..."
레이나가 있었다. 그녀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레이나 씨!"
"앗... 테이...?"
그는 레이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꾹 잡았다.
"저를 어시스턴트로 삼아주세요!"
"이제, 괜찮은 거야?"
"최고의 상태예요! 색깔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아요! 오히려, 좋아요!"
레이나는 눈을 껌뻑이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래. 계약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