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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의 모습 - 침구, 군복, 모자 등이 가지런하게 정돈된 광경.
조선군대는 일제시대인 1938년 ‘지원병 훈련소’란 이름으로 조선인 청장년들을 선발한 강제 지원병 제도로 창설됐다. 이 지원병제도는 징병제에 앞서 일제가 만들어 낸 시험적인 병역제도였고, 당시 대륙침략을 꿈꾸었던 일제는 1936년 독일과 이태리, 일본의 반(反) 코민테른 협정을 맺은 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부족한 병력을 조선청년들로부터 충당하기 이르렀다.
강압적인 통치기구인 조선연맹을 만들어 그 아래 각, 도, 군, 읍, 면 등의 행정기구와 사회단체, 학교들로부터 지원병 수를 배당해 강압적 선발 위협을 일삼았다. 일제가 의무병역제도 아닌 ‘지원병력제’를 실시한 이유는 조선인 청년들에게 총을 쥐여 주었을 때 총부리를 자신들에게 돌리는 것을 심히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사훈련은 주로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 등지에서 산악훈련으로 실시됐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의 5년제 학교(당시 중고교)에는 이 군사훈련을 위해 일본 장교들이 나와 있었다.
군사훈련은 1학년부터 졸업반 학생들 모두에게 해당됐다. 일본 장교가 배석해 중대장은 지휘를, 대대장은 전교생을 훈련시켰다. 이들 일본 장교들은 학교에서 선생들보다 우위의 위치에 있어 선생들도 꼼짝 못했다고 한다.
중좌(중령에 해당), 소좌(소령) 각1명씩을 두고 그 아래 일본 소위가 통솔했다. 조선학생들 중 일부는 기병(騎兵)으로 뽑혀 기병대는 서울 서빙고 25부대에서 약 10일간 훈련을 받았다. 각반(脚絆)을 하고 안장 없는 말을 탄 채로 혹심한 훈련을 받았다.
매년 조선 신궁대회(현재의 전국체전과 같음)에선 당시 강원도대표와 함북 웅기 대표가 기마대회 우승을 도맡아 했다고도 전해진다.
당시 태릉에 있던 구 지원병훈련소는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다. 해방이 된 다음해인 46년 1월15일 오늘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됐고, 국방경비대는 다시 조선경비대로 개칭되면서 48년 8월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다시 태어났다.
안장 없이 말타는건 무슨깡으로 시킨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