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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민희진 기자회견 놀라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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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동강 열매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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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주문취소 누르게 만드는 요청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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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거면 지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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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한 영국 여왕 근황.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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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기센 사람 vs 진짜 기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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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살 넘었는데 운전면허가 없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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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Q BHC 물럿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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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들을 위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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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이나 세종이 작정하고 양녕을 죽이거나 추방했어야 했어
어렸을때 본 세종대왕 위인전 태반이 양녕대군이 마치 이도에게 세자자리 줄려고 일부러 방탕하게 생활하면서 둘째까지 중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미화하던데 나중에 알고보니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음. 그냥 생 양아치였음.
명나라 황제 납치... 저게 명나라 정부에서 재빠르게 새 황제 세우고 베이징 수비 들어가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원나라 부활 각이어서 굉장히 신경 곤두세울수밖에 없는 대사건이었음
한명의 인간으로서 못해낼 일들을 해낸 위인도 너무나 힘든 일이 연달아 있어서 종교에 의지한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더욱 인간적이라서 대단하면서도 슬프네
태종 이방원이 양녕 안죽인거때매 하늘에서 땅을 치고 통곡했을듯...
조선은 임금 개인에게 너무 가혹한 시스템이고 거기에 더해서 고기덕후+운동부족까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인 상황에서 저런 사건까지 터지니까 멘탈이 나갈만하지
진짜 다른 건 견뎌도 자기 몸이 시름시름 아프면 종교든 뭐든 믿게 되는 것 같더라
태종이나 세종이 작정하고 양녕을 죽이거나 추방했어야 했어
세종대왕께서는 유교의 나라를 원하는 입장에서 가족 그것도 직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건 패륜이니까 전례를 만들기 싫었나봄 근데 태종은 왜....
태종은 아들을 너무 사랑했음…
아무리 권력을 위해서라지만 차마 어떻게 친형을 죽임.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님.
왕은 사람이 아니라고 봐야지. 일반인하고 왕을 같은 잣대로 보면 안된다고 본다.
한명의 인간으로서 못해낼 일들을 해낸 위인도 너무나 힘든 일이 연달아 있어서 종교에 의지한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더욱 인간적이라서 대단하면서도 슬프네
나쁜일이 겹쳐서 일어나면, 진짜 이런게 운명인가 싶어지는게, 신을 이래서 찾나 싶어지더라 진짜로..
태종 이방원이 양녕 안죽인거때매 하늘에서 땅을 치고 통곡했을듯...
명나라 황제 납치... 저게 명나라 정부에서 재빠르게 새 황제 세우고 베이징 수비 들어가서 망정이지 자칫하면 원나라 부활 각이어서 굉장히 신경 곤두세울수밖에 없는 대사건이었음
그리고 전 황제가 복귀하면서 새 황제 옹립한 신하는 컷...ㅋㅋㅋ
-핫하 명나라놈들아! 겁도 없이 우리한테 쳐들어온 너네 황제를 잡았다! 몸값을 내놔! -오늘부터 태자전하가 새 황제이시다! 선황폐하는 느그들이 알아서 해라! 황제폐하 만세!
그 이후에도 다얀 칸과 알탄 칸 같은 칸들이 베이징 포위하고 원나라 부활 각은 계속 노렸는데... 베이징이 안뚫려서 원나라 부활은 끝내 못하고 결국 만주의 여진족이...
북원이 아니라 다시 리턴투 원나라각
이쪽이 산시 성 다퉁 시와 허베이성 장자커우 시인데... 다얀 칸이 이쪽에 알박기 하고 알탄 칸이 아예 베이징 포위함... 다얀 칸이 베이징 코앞에 알박기 한 시절엔 정덕제 치세였고 알탄 칸이 베이징 포위한 시절은 가정제 시절... 둘 다 명 4대 암군으로 악명높은 황제들임
어렸을때 본 세종대왕 위인전 태반이 양녕대군이 마치 이도에게 세자자리 줄려고 일부러 방탕하게 생활하면서 둘째까지 중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미화하던데 나중에 알고보니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음. 그냥 생 양아치였음.
효령도 수양 지지해서...그부분은 까이는 점 있더라고
12살 왕과 사실상 패왕 수양 자 당신의 선택은
겨우 건달 몇명 가지고 반란 일으킨 수양과 정통성 있는 12살 조카 중 떡고물 생각에 건달 쪽에 붙은 왕실 어르신(웃음)
근데 성공한거 보고 어? 어! 이게 이코인이?
조선은 임금 개인에게 너무 가혹한 시스템이고 거기에 더해서 고기덕후+운동부족까지.. 걸어다니는 종합병동인 상황에서 저런 사건까지 터지니까 멘탈이 나갈만하지
진짜 다른 건 견뎌도 자기 몸이 시름시름 아프면 종교든 뭐든 믿게 되는 것 같더라
황제납치가 정통제였나
맞음 토목보의 변
시기 보니 그때 맞구나..
갠적으론 다얀 칸, 알탄 칸 시절을 더 위기로 보긴 하는데... 황제 생포당했다는게 워낙 임팩트가 크긴 함
황제가 생포당한다는건 제후국 입장에서도 발칵 뒤집힐 사건이니까..
ㅇㅇ 그때 명 조정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했음 바로 베이징 따이고 원나라 부활 각이었으니까 명나라 내부에서도 베이징 포기하고 난징으로 천도하려 했었으니 ㅅㅂ 이거 누구에게 줄을 서야하나로 골 빠개질만도 함
ㄹㅇ 세종 정도 되는 왕이라도 머리 깨지지..
저시절 종교는 그냥 왕권강화용 아님?
불교를 왕권강화로 쓰던건 고백신시절임
삼국시대 중반만 가도 문화전반이 종교와 융화되어 일종의 삶의 방식이나 다름 없음. 특히 불교는 사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믿은 사람이 많겠지.
양녕대군땜에 돌가셨다에 한표 이정도급이면 진짜 부처아니면 답이 없다
의사중에는 단순히 당뇨합병증만 아니라 강직성척수염 증세로 볼만한 기록들도 있다는거 보면 참...
전제정치를 위해서 귀족들의 숙원사업 노비종모법에 인장을 친 업보임 그렇게 귀족들의 환심을 사서 얻은 전제정권이 잘 굴러갔냐하면 막대한 행정비용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인해서 착취가 만연해지고 관개사업을 일으킬 재정이 부족해 농민들은 하늘만 쳐다보다가 무너졌음 유교의 교조적인 내용을 실천하는 순간마다 망하기 일쑤이니 유교를 버리고 불교를 가까이하게된것이라봄
노비종모법이 노비를 증가시켰다 라는 식의 말씀을 하시는데 틀린 이야기입니다. 노비 관련 법은 종모법이니 종부법이니 엎치락 뒷치락 하다가 영조 때에 종모법으로 못박히는데 오히려 이 시기에 노비는 줄어들었습니다. 종모법이 노비를 늘렸다고 한다면 영조 때에 노비 숫자가 늘었어야죠. 또한 세종 이후 노비가 늘어난 건 성종 때에 경국대전에 일천즉천이 못박히면서부터 입니다. 고려 시대에 한쪽만 천민이어도 자식 모두 천민 이라는 법인 일천즉천이 있었고, 이를 완화시키고 노비를 줄이기 위해서 종모법을 들고와서 한쪽이라도 양인으로 만들려고 한 거지 종모법이 노비를 늘렸다 라고 한 건 잘못된 의견입니다.
양인을 늘리려했다면 종모법을 왜 만듦? 귀족이 여종을 ㅁㅁ해서 낳은 자식은 어미인 여종의 신분을 물려받으므로 성종대에 이르면 한양도성의 인구 7할이 노예였는데 왜 자꾸 종모법이 노비를 줄이려는 법이였다는 궤변을 멈추지않는것임?? 노예가 줄어든건 17세기에 이르서야 겨우 화폐경제가 통용되고 그동안의 장원경제가 무너짐에 따라 인민이 땅에 귀속되지않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돈을 벌수있게되므로 비효율적인 노예시장과 노예제도가 자연스레 도태된것뿐이다 첨언하자면 화폐경제가 발달한 나라순으로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나고 공화제로 나아갔는데 조선은 화폐경제를 탄압하였기로 기술개발에 투자할 상인계급의 부재, 장원봉건식 착취, 노예제도가 존속하였던것임
한양도성의 인구 7할이 노비라는 건 대체 무슨 레퍼런스로 주장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애초에 그게 칼같이 명부가 있던 것도 아니고 40%니 20% 하는 것도 추정치인데다 조선 500년 내내 변동이 있었는데 뭘 근거로 그렇게 고정적으로 단언 하시는지요?? 그리고 노비와 관련된 법에서 왕실 입장은 노비를 줄이는 쪽에 가까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어떤 왕이 세금 안내는 인간 늘어나는 걸 좋아합니까? 세금은 곧 자기 이득인데?? 그리고 조선엔 애초에 노예 시장 자체가 없었는데 무슨 노예시장 운운입니까? 옆동네 일본에서 선교사 통해 해외에 영주민 팔아먹는 걸 노예시장이라고 하겠죠? 화폐경제 탄압요? 세종이 도입하려다 실패한 건 무슨 어느 조선에서의 탄압일까요??
그리고 종모법이 노비를 늘리는 법이었으면 외부 요인과 상관없이 영조 때에도 늘어났어야죠. 그쪽이 말하는 장원경제 붕괴에 의해서 노비가 줄어들 거였으면 종모법이니 종부법이니 다 의미없는 법 아닙니까??
이 사람 웃긴 인간이네ㅋㅋㅋㅋㅋㅋㅋ 세종이 노비를 줄이려면 아에 종부법을 없애던가 종모법이 노비를 줄일수있는 근거가 뭐임?? 오히려 귀족들이 여종 겁간해서 노비 공장차린것도 모르냐??
조선왕들중 과대평가된 왕 두명이 세종과 정조임 세종은 도강언을 건설하여 치수한 제갈량보다 현실정치감각은 떨어졌다봐야함 15세기면 대부분의 문명국가들이 관개사업을 상식으로 생각할때 아닌가? 천수답에 써먹을 측우기 설치한거부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함 정조는 그야말로 유교탈레반임 문체교조주의 부르짖으며 삼국지까지 금지한 ㅁㅊㄴ임 정조가 유교탈레반짓할때 미국에서 워싱턴이 대통령이 되었다는점에서 더더욱 평가가 절하됨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 세종실록에 세종이 고부군 눌제를 건설했었고, 길이는 3400척에 동원 인력만 1만 1천명 규모였습니다... 애초에 한반도에서 제대로 된 관개사업이 실행되기 시작했던 게 조선 때부터고 국가적인 움직임으로 보를 건설하기 시작한 건 세종 때 입니다. http://www.koreanhistory.org/1809
조선시대때 일산 고양은 한강의 범람때문에 늪지대였고 잠실은 퇴사물때문에 모래밭이였다고하지 이러한 풍경은 군사정권이 예비군의 신속한 징집을 위하여 일산신도시 잠실개발 하기 전까지도 볼수있는 풍경이였음 고대 큰강에서 건설된 문명은 큰 강을 치수하기위해 신왕(God king)이 되어 대규모 사역을 일으켰다만 조선은 중국의 고전을 들여와 그것을 교조삼았기로 한강을 치수해야할 왕의 권한이 약했고 치수사업을 하였어도 막대한 인력으로 관리해야하는 그 시설들이 관리되지못하여 20세기까지 일산은 늪지대였던게 아님?? 여기서 더 나아가 네덜란드처럼 풍차를 도입해 일산 늪지대의 물을 빼내었더라면 너무한 생각인가?? 아님 일본이 네덜란드와 교류할때쯤 조선은 중국교조를 받들어 뫼시며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기고 그나마 교류하던 중국과의 교류마져 끊은채 고립국가가 되었던것임 이러한 반동 봉건제 국가를 21세기에 심판하지않는다면 이러한 반동 봉건국가를 심판하는걸 무슨 국까라며 반대한다면
그거야말로 바보같은짓 아니겠음?? 이 영광스러운 민주공화국에서 조선같은 반동봉건제는 심판받고 다시는 그 역사가 반복되지않게끔 연구되어야한다
그리고 한강 길이랑 넓이를 좀 보시고 치수 운운하세요. 서울 통과하는 한강 폭이 평균 1km 가 넘는데 오늘날에서야 겨우 관리되는 걸 뭔 수로 조선 시대에 합니까? 강 폭이 2km 넘는 장강이 뚫고가는 우한시는 오늘날에도 홍수 터져서 넘치는 게 현실인데 그리고 일산이랑 네덜란드요?? 네덜란드 이름 자체가 낮은 땅이라는 의미를 알고 지금 일산과 네덜란드를 비교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뭔 중국과의 교류마저 끊어요. 여전히 청나라랑 교류는 꾸준히 이어졌는데. 누가보면 북한 이야기 하시는줄 알겠네요.
수십개의 지류를 파내서 강 수위를 낮추고 수량을 통제하여 만들어진 수로을 통해 얼마든지 치수가 가능하고 동시에 물류를 운동시키는 운하마냥 쓸수도 있었는데 인구 천만의 조선은 그것을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다 이것이 불가능하냐 가능하냐 따지는건 어차피 당신이 악다구니쓰면 납득시킬수있는것이 아니니 둘째치고 나는 프랑스가 좋음 왜냐? 반동 봉건제에 찬동하는 반동들은 이미 우물에 빠뜨려서 다 죽였거든 방데전쟁때 혁명정권에 반대하던 반동들이 그때 다 죽었기로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앙시앙레짐의 착취를 미화시키는 인간들이 없는데 지주 향리 서원의 3중고에 시달리던 조선인민들은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깃속 아기장수 우투리를 통해서라도 조선정권을 멸망시키고싶어했지만 오늘날 분에넘치게도 민주혜택을 누리는 당신은 종모법이 종부법보다 좋다고, 소현세자가 벼루맞아 죽었음에도 청나라와 교류했다고, 풍차엔진등 각종 서구문명을 전수받은 일본과 대비시켜보았을때 중국고전을 교조삼아서 모질이 짓거리한 반동조선을 궤변으로써 두둔할 이유가 대체 있기는 한거냐는거임 당신은 방데전쟁에대해서 어떻게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