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강유의 작계 자체가 논란거리인데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고 일단 정치적인 부분만 따져보면....
1.당시 강유는 조정 문관들에게 탄핵 당하는걸 넘어 아예 군부 2,3인자격인 요화와 장익과도 좀 껄끄러운 상황을 연출할 만큼 명망을 잃은 상태였음.
2.그리고 유선이 정말 황호 말만 믿고 뺀찌를 놓은걸까? 조정 중신이자 부마 제갈첨이 마지막까지 저격했던 정적엔 황호뿐 아니라 강유도 있었음.
못믿을 만한걸 넘어 거의 공공의 적 취급이었던거 대충 감오지.
3.유선이 정말 국사를 다 좌지우지할 정도의 파워가 있었나 자체도 따져봐야할 문제임. 황제 직함은 공짜로 권력을 가져다 주는게 아니니까.
촉한에서 소위 명재상들이 부각되는 것은 다시말해 그 기간동안 황제는 재상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단 애기임
당시가 뭐 입헌군주제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재상부가 군주에게 공식적으로 권력을 위임 받은게 아니라 나라를 굴릴 수 있는 행정기구의 중심 계파를 장악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됐다는거지.
그 계파는 제갈량 이래 형주 출신 호족과 사대부들이었고. 자연스럽게 형주계파의 수장이 재상을 맡는 형태로 정권이 유지되었음.
진지 사후엔 황호를 앞세워서 권력 회복 시도를 한건 맞는데 잘쳐줘야 아직 군부 및 형주파와 동거하는 과도기인 수준일 '유선 정권'이 견제의 목소리 없이 독단으로 대권을 휘두를 수준이 될까 의문이란거지
명분이 샤머니즘이라는게 정말 어처구니 없어서 그렇지 그 저의 뒤에는 조정 중론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생각함
4.그리고 사실 차후에 성도에서 지원군을 보내긴 보냈음.
뒤늦게 보냈다....라고 욕하는 시각도 있긴한데, 이 비판은 강유의 작계가 성공했을거라는 전제를 깔고 가는거고
강유의 작계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만 따지면 성도에서 보낸 원군은 포위당한 강유를 구했고, 검각 우주방어에 큰 도움이 됐음. 이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임.
그러니까 성도 조정이 군사적으로 씹트롤링을 했다는걸 판단하려면 필연적으로 강유의 작계를 논할 수 밖에 없는데
위에서 언급했듯 그것 자체는 논하지 않고 개인의 판단에 맡기겠음.......
그럼에도 이 글이 '무당 말 믿고 군대를 안보냈다.'는 비판 자체가 타당하지 않다고 까는 애기는 아님
그러니 '지금 빼박 팩트 ㅂㅅ인 유선 쉴드치는거냐'는 반응보다는 이런 시각도 있구나-라는 느낌으로 봐주면서
반론이나 내가 잘못 아는 부분은 얼마든지 의견 내줬으면 좋겠음.
다른 건 귀찮아서 넘어가고 2. 유선이 정말 황호 말만 믿고 뺀찌를 놓은 건가? + 3. 조정 중론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생각함 에 대해서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황)호가 신뢰하는 무당을 불러 적이 종국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말하므로 후주에게 계하여 그 일을 묻었으므로 신하들은 알지 못했다(皓徵信鬼巫 謂敵終不自致 啟後主寢其事 而群臣不知) (촉서 강유전) 기록에 대놓고 황호 말만 믿고 뺀찌를 놓은 게 맞고, 조정 중론이 수렴되긴커녕 신하들은 아예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고 적혀있음. 소위 무당 사건이 유선의 독단이 아니라 공론으로 발생한 일이라면 이 기록과 배치되는 다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있나?
정치에 무당이라니 그... 안돼!
촉한이 무슨 몇백년 된 고이고 고여서 썩은 나라도 아니고 바로 유선은 겨우 2대 황제였던 데다가 제갈량은 절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지 않는 타입이었고 그 밑에 있는 제갈량 라인들과 신하들이 황제의 파워를 나눠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건 진짜 너무 과한 해석임 너무 왕조든 나라를 건설한 직후가 왕과 황제의 파워가 가장 센 시기인데 오히려 유선의 독단적인 판단을 아무도 태클 걸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게 훨씬 자연스럽고 타당함
실제로 아무 통보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정부의 상황 판단이 불가능했다는 기록이 있는 이상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큰 의미가 없음. 가능했으니까 사태가 그렇게 돌아갔고 그렇게 기록이 된 거. 유선의 결정권이 그 정도로 강할 리 없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1. 당시 강유는 조정 문관들에게 탄핵 당하는걸 넘어 아예 군부 2,3인자격인 요화와 장익과도 좀 껄끄러운 상황을 연출할 만큼 명망을 잃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강유가 대장군 지위를 지켜낸 이유가 백프로 유선의 의사였다는 사실로 반론 가능함.(속후한서 제갈첨전) 결국 본문의 전제조건 중 유선의 결정권, 독단 여부, 조정의 암묵적 합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건데, 본문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이 부분을 보충할 다른 기록이 필요함.
유선이 조정 시스템을 장악했다는 얘기를 부정하는 시각이라면 그걸 입증할 어떤 기록이나 자료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는데, 그걸 제시하면 더 논의를 이어볼 수 있음.
일단 퍼포먼스로 내부를 진정 시켜두고 뒤에선 성도 나름대로 사실 확인하고 병력 준비해서 위가 실제로 침공하는 시기쯤엔 출병 시켰다 -라는 시각이라고 보면 될까?
이것에 대한 생각인데, 여름까지 동궐, 요화, 장익이 이끄는 원군이 준비되서 한중 쪽으로 갔었잖아 정말 유선이 여러 세력한테 아무 통보도 안하고 그 과정이 가능할까 싶었음.
정치에 무당이라니 그... 안돼!
그래도 무당 사랑하시죠?
개인적으론 내부안정용 퍼포먼스라고본다
일단 퍼포먼스로 내부를 진정 시켜두고 뒤에선 성도 나름대로 사실 확인하고 병력 준비해서 위가 실제로 침공하는 시기쯤엔 출병 시켰다 -라는 시각이라고 보면 될까?
다른 건 귀찮아서 넘어가고 2. 유선이 정말 황호 말만 믿고 뺀찌를 놓은 건가? + 3. 조정 중론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생각함 에 대해서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황)호가 신뢰하는 무당을 불러 적이 종국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말하므로 후주에게 계하여 그 일을 묻었으므로 신하들은 알지 못했다(皓徵信鬼巫 謂敵終不自致 啟後主寢其事 而群臣不知) (촉서 강유전) 기록에 대놓고 황호 말만 믿고 뺀찌를 놓은 게 맞고, 조정 중론이 수렴되긴커녕 신하들은 아예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고 적혀있음. 소위 무당 사건이 유선의 독단이 아니라 공론으로 발생한 일이라면 이 기록과 배치되는 다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있나?
신하들한테 알리지 않고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지만, 왕이니까 독단으로 저지르는게 당연! 이런논리인듯
이것에 대한 생각인데, 여름까지 동궐, 요화, 장익이 이끄는 원군이 준비되서 한중 쪽으로 갔었잖아 정말 유선이 여러 세력한테 아무 통보도 안하고 그 과정이 가능할까 싶었음.
사실 강유 상소를 유선 혼자 비밀로 하고 씹을 수 있다 하면 유선이 조정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다는 애기인데 나는 그것 자체를 일단 부정하는 시각이기도 하고
게코도르신
실제로 아무 통보도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정부의 상황 판단이 불가능했다는 기록이 있는 이상 '가능할까?'라는 의문은 큰 의미가 없음. 가능했으니까 사태가 그렇게 돌아갔고 그렇게 기록이 된 거. 유선의 결정권이 그 정도로 강할 리 없다는 전제에 대해서는 "1. 당시 강유는 조정 문관들에게 탄핵 당하는걸 넘어 아예 군부 2,3인자격인 요화와 장익과도 좀 껄끄러운 상황을 연출할 만큼 명망을 잃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강유가 대장군 지위를 지켜낸 이유가 백프로 유선의 의사였다는 사실로 반론 가능함.(속후한서 제갈첨전) 결국 본문의 전제조건 중 유선의 결정권, 독단 여부, 조정의 암묵적 합의와는 전혀 반대되는 상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건데, 본문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이 부분을 보충할 다른 기록이 필요함.
게코도르신
유선이 조정 시스템을 장악했다는 얘기를 부정하는 시각이라면 그걸 입증할 어떤 기록이나 자료가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는데, 그걸 제시하면 더 논의를 이어볼 수 있음.
정말 아무도 몰랐다를 전제로하면 고대 국가가 수 만단위의 병력을 준비하고 파병할 물리적 시간이 너무 촉박해지는데 친위 쿠데타도 아니고 제 세력의 양해도 목적도 알리지 않은 파병 준비가 어떻게 가능할까가 의문임
촉의 전사를 계산해보면 9만이요 성도에 주둔하며 지키고 다른 군에 채비된 것이 4만 아래는 아닐 것이니 그러한즉 나머지 무리는 5만을 넘지 못한다.(計蜀戰士九萬 居守成都及備他郡不下四萬 然則餘衆不過五萬) (진서 문제기) 성도 및 타군에 배치된 상비군만 4만임. 장익+동궐+요화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군세를 이끌고 북상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위나라의 남북군처럼 상시 출동 가능한 병력이 하나도 없었을 리는 없지. 물리적 시간이 얼마나 촉박했다고 한들 실제로 기록된 타임라인이 강유 보고→황호 무당 사건→위군 실제 남침→장익 등 북상으로 정리돼있는 이상 그걸 뒤엎으려면 다른 기록이 필요함.
폭주하는 강유 힘빼기위해서 쌩깐건데 생각보다 도미노처럼 우르르 무너진거같음
촉한이 무슨 몇백년 된 고이고 고여서 썩은 나라도 아니고 바로 유선은 겨우 2대 황제였던 데다가 제갈량은 절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지 않는 타입이었고 그 밑에 있는 제갈량 라인들과 신하들이 황제의 파워를 나눠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건 진짜 너무 과한 해석임 너무 왕조든 나라를 건설한 직후가 왕과 황제의 파워가 가장 센 시기인데 오히려 유선의 독단적인 판단을 아무도 태클 걸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게 훨씬 자연스럽고 타당함
촉한은 그 시조인 유비부터가 유언으로 제갈량한테 후사를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길 정도였고(견제 의도라 쳐도 견제할만큼 세력이 있다는 방증이니) 출사표와 동윤의 사례에서 보듯 황제가 실지로 컨트롤 당하던 정황이 있는건 감안해야지
유선이 어리숙하고 무능력하니까 올바른 길로 이끄는 거지 그건 황제를 '컨트롤'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거임 애초에 황호가 정사가 간섭하기 시작한 것도 동윤이 죽고 나서 가능했던 건데 출사표와 동윤이 어떻게 황제를 컨트롤 했다는 사례가 될 수 있는지 이해가 안감
나라가 망할라면 사이비가 판치는건 뭐...
그리고 환관인 황호가 권세를 잡은거 자체가 유선의 권력이 신권보다 훨씬 강했다는 증거임 환관은 황제 등에 업지 않으면 정권 잡는게 불가능해 물론 당나라 후기처럼 환관의 세력이 길게 이어지면 황지를 갈아치울 정도로 힘을 가질 수도 있지만 유선은 고작 촉한의 2대 황제지 거기에 즉위 후 전반부는 제갈량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