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5785279
“좋아. 그럼 바로 오늘부터 시작할까? 에르피엔에 공문 보내둘게.”
“엥? 오늘 바로? 네르가 화낼텐데.”
“자, 여기. 자유이용권이랑 오늘치 식권 10장.”
“기념품 좀 사가면 봐주겠지! 나 나갔다올게!”
교주는 엘레나의 손에서 뇌물을 낚아채고는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레나는 그런 교주의 뒷모습을 보며 음흉하게 미소짓다가 눈길을 돌렸다.
“시장님? 아멜리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들어와.”
그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엘레나가 다리를 꼰 채 답한다.
“교섭은 잘 진행된 것 같군요. 과연 시장님이십니다.”
“당연한 거 가지고 비행기 태우지 마. 저런 바보 구워삶는거야 일도 아니지.”
엘레나는 여유롭게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래도 은은하게 미소짓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대본은 다 준비된거야?”
“네. AI들을 전기충격으로 갈궈서 작성 후 검토까지 끝마쳤습니다. 시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엘프 등장인물은 최대한 불쌍하고 가련하게, 그리고 인간은 최대한 악랄하고 표독스럽게 보이도록 썼습니다.”
“좋아. 그래야 프로파간다로서 의미가 있지. 어디 줘봐. 흐으음….”
엘레나가 아멜리아에게서 대본을 받아들고 빠르게 훑어본다.
“아니, 안 되지. 애초에 우리가 침략하러 지구에 갔다는 거랑, 가끔 특식 나왔다는 내용 삭제해. 우리는 순수한 의도로 지구에 방문했다가 간악한 인간들에게 속아 그들의 노예가 된거야. 그리고 그들의 손아귀 안에서 공기 커틀릿과 드레싱 없는 양배추 샐러드만 먹으며 휴일 없이 착취당한 거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네, 염려 마십시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그래. 우리 동족들이 모든 인간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태우고 모성 귀환을 꿈꾸도록 하란 말야. 모성에 대한 거짓 환상을 조금 심어주는 것도 좋겠네. 모성에 귀환하면 하루 세끼 돈까스랑 우주식량 셰이크 먹을 수 있다는 대사도 넣어.”
“역시 시장님! 목적을 위해 선동과 날조를 하시는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으시군요!”
“한 시간 내로 수정해서 다시 가져와. 전압 더 높여서 AI 갈구면 충분할거야.”
“네, 즉시 다녀오겠습니다.”
아멜리아가 집무실을 떠나고, 엘레나는 다시 자신의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았다.
“그래…. 어차피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이방인.”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스멀스멀 떠오르는 불필요한 상념을 씻어낸다. 동족들을 보며 평화에 찌들었다며 불평하던 그녀 역시, 이곳 엘리아스에 어느샌가 애착을 가지고 말았으니까.
“결국 언젠가는 이별하게 될거야. 과하게 정을 줘도 서로 힘들 뿐이지….”
두 번째 모금에는,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낯간지러운 감정을 잠재운다. 모든 인간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어떤 바보같은 인간에게 자신이 품은 감정을.
“나도 갈 데까지 갔구만. 이런 감성적인 생각이나 하고.”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하며, 여유로운 척하며 세 번째 모금. 혀끝에 남는 씁쓸함에 괜시리 한숨이 푹 내쉬어진다.
“일하자, 일. 오늘도 민원이 산더미야.”
머릿속을 업무와 관련된 사고로 가득 채운다. 이 이상 좋을 대로 생각했다가는 끝끝내 눈물마저 보이고 말리라.
“...그래도, 헤어질 때 선물 정도는 주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역시 마음먹은대로는 되지 않는다. 머릿속 한 구석에 남은 한 바보같은 인간의 바보같은 미소가 언제까지고 사라지질 않는다.
“여보세요, 아멜리아?”
불현듯, 엘레나가 휴대용 통신기를 꺼내들고는 아멜리아에게 전화를 건다.
“이번 공연, 내가 주인공 역 맡을게.”
그리 말하는 엘레나의 표정에 결연함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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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공연 당일.
“엘레나! 관객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나 실수하면 어떡해!”
교주는 무대막 뒤편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관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엘프 수십 명 정도나 올까 했는데 척 봐도 수백. 심지어 타 종족 관객들까지 드문드문 섞여 있다.
“연습한 대로만 해. 별거 없으니까.”
그 옆에 선 엘레나가 교주를 진정시킨다. 연습때는 잘만 하더니만 왜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것인지, 너무도 그다워서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럼 나 먼저 간다. 나오는 타이밍 잘 맞추고.”
어느덧 공연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엘레나는 교주의 등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고 막 건너편으로 향했다.
“....”
엘레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다. 칠흑같은 어둠,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도,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수많은 동족들의 존재만은 생생히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은 엘프를 위해서.
속으로 그리 되뇌이며, 엘레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이야기는, 머나먼 과거, 광활한 우주를 자유로이 항해하던 엘프들의 이야기입니다.”
평소의 비열하고 야비한 모습은 조금도 없이, 엘레나가 더없이 진지한 태도로 차분하게 대사를 읊는다. 우수에 찬 눈빛, 호소력 짙은 음색, 적절한 조명이 더해지니 관객들 전원이 일순 숨을 죽이고 빨려들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엘프들은 이 우주의 그 누구보다도 평화를 사랑하는, 그러면서도 용기와 모험심이 넘치는 고결한 자들.
언제나 그러했듯 별빛을 등대삼아 암흑물질 사이를 누비던 우리들은, 저 먼 성간우주에서 규칙적인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암호 해독 알고리즘으로 분석한 결과, 그것은 구조신호였죠. 좀더 정확히는 G2형 주계열성과 8개의 행성으로 구성된 항성계에서 온 구조신호였습니다.
우리는 즉시 위기에 빠진 지성체들을 구하기 위해 항로를 설정했지만… 그것은 더없이 비열하고 추악한 함정이었습니다. 우리 엘프들의 그런 심성을 역이용하여 붙잡기 위한 함정이었던 것입니다.”
엘레나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듯 고개를 떨군다. 이 스토리의 상당부분이 날조임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엘프들마저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인간]이라 하는 종족들이 꾸민 사악한 흉계에, 우리 엘프들은 너무도 무력하게 붙잡히고 말았죠. 구원을 위해 선의로 내민 엘프들의 손에, 인간들은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무기로 화답했습니다.”
엘레나의 몸 위로 총과 칼 형태의 실루엣이 드리워진다. 그녀의 자그맣고 가냘픈 몸은, 그 무시무시한 그림자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어서 일해라!]
[할당량 못 채운 놈은 솔의눈민초국밥을 저녁으로 먹게 될거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쇠고랑을 찬 엘프들이 퀭한 눈빛으로 납땜을 하고 있었다. 채찍질과 비명, 역겨운 비웃음과 고통어린 절규가 난무하고, 고초를 견디지 못해 쓰러진 엘프를 엘레나가 감싸안으며 위로한다. 무력함과 패배감으로 점철된 동족들을 보며, 결연히 의지를 다지는 엘레나.
“그 누구도 우리를 가둘 수 없어. 그 누구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어! 반드시, 반드시 동족들을 구원하고 고향 땅을 밟고야 말겠어!”
그리고 선언한다. 언젠가는 동족들을 이끌어 이 지옥같은 행성을 떠나 모성으로 돌아가고 말겠노라고.
조명이 한 번 암전되고 다시 무대를 비춘다. 엘레나는 수갑으로 구속된 채 인간 간수들 사이에 서 있었다. 몸 곳곳에 상처와 멍자국이 가득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의지로 격렬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네가 엘프의 수장, 엘레나인가?”
그때 교주가 나타난다. 악독한 인간들의 우두머리, 이 공연의 메인 빌런으로서.
“....”
엘레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지지 않겠다는 듯 그를 쏘아볼 뿐이다.
“간수장.”
“네, 사령관님! …크헉!”
돌연 엘레나의 왼편에 선 간수를 후려치는 교주.
“포로들의 교육은 네 책무가 아니었나? 아직도 교육이 한참 부족해 보인다만.”
“죄, 죄송합니다! 부디 자비를!”
“변명은 필요없어. 쓰레기 자식.”
교주는 망설임없이 간수장을 권총으로 쏴 사살한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엘프 관객들, 그리고 무대 위의 간수들이 공포로 얼어붙은 가운데, 교주와 엘레나만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이걸로 됐어. 이거면 된거야.’
그런 가운데, 엘레나가 마음 속으로 되뇌인다. 극중의 악랄한 인간을 교주에게 투영하니 마음이 놀라울 만큼 냉정해진다. 그녀가 격무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쁨에도 구태여 주인공 역을 맡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이상 마음을 허락하면, 나도, 교주도 힘들어질 뿐이니까.’
애당초 이어질 수 없는 상대로부터 명확히 선을 긋기 위해서, 종족의 숙원보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하지 않기 위해서, 엘레나는 무대에 선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의 의도는 잘 먹혀들었고, 애끓는 마음이 상당부분 진정되었다.
“예상했던대로 순진해 빠진 낯짝이로군. 하긴 그러니 우리가 보낸 거짓 정보에 속아 경계도 없이 쫄래쫄래 기어들어온 거겠지.”
그런 마음을 알 길 없는 교주가 연기를 이어나간다. 교주는 엘레나의 턱을 붙잡고 조금 들어올려 자신과 눈을 맞추도록 하였다.
“....”
엘레나의 눈빛이 흔들린다. 관객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격렬하게. 관객들은 엘레나의 세심한 연기력에 감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이, 이 바보가…! 사전 합의도 없이 애드리브를!’
본래 이 부분은 신체 접촉 없이 대사만으로 이어나가야 하는 장면이었다. 교주가 과도한 긴장 탓인지 지나치게 몰입해버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반항적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 조금 더 ‘교육’이 필요하려나?”
교주가 몸을 숙이는 동시에 엘레나의 턱을 조금 더 들어올린다. 둘의 키 차이 탓에 엘레나는 까치발까지 들었지만, 그럼에도 교주의 손이 가하는 압력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흥, 건방지긴.”
“커헉! 쿨럭, 쿨럭!”
교주가 돌연 손을 놓는다. 마찬가지로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애드리브였다. 엘레나는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호흡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그 얄팍한 허세도 얼마 가지 못할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거거든. 너희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니까.
네년들의 그 지식도, 몸도, 마음도, 영혼도… 모조리 우리 인류를 위해 쓰라고.”
교주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엘레나의 머리채를 붙잡아 고개를 강제로 들어올린다. 굴욕적인 자세로 협박을 당하는 상황. 분명 가슴이 불타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차올라야 할진대, 엘레나의 가슴 속에서는 매우 동떨어진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핫… 하앗….”
이 공연의 상징성과 중요성이 매우 심대하다는 사실도, 수많은 동족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실패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무렇지 않다고 느껴진다.
“네… 네헤엣…♡ 아, 알겠습니다아…♡”
다만, 눈앞의 남자의 말에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해야 한다-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다.
‘어…? 대사가 다른데. 분명 여기서는
[엘프의 긍지를 우습게 ㅂㅈ 마라, 인간! 우리의 육체와 기술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만큼은 절대 빼앗지 못할거다!]
라는 대사 아니었나?’
공교롭게도, 교주는 조금 전의 애드리브를 무의식적으로 행하였기에 엘레나가 대사 실수를 한 이유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후후… 겁먹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가. 강렬히 타오르던 눈빛마저도 흔들리고 있군.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불꽃이 숨어있어. 그 불꽃 속에 담긴 것이 너희의 긍지인가? 그 얄팍한 긍지마저도 바스라져 우리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이게 될 날이 기다려지는걸.
앞으로도 많은 협력 기대하지, 엘레나.”
교주가 흐름에 맞추어 대사를 적당히 수정한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이것이 해당 막의 마지막 대사였기에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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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장면들은 원래의 대본대로 원활히 진행되었다. 교주와 엘레나의 애드리브가 후반부의 스토리와는 상충되지 않았던 덕이었다. 되려 엘레나가 인간의 협박에 굴복하는 장면이 너무도 안쓰러워 보였던 탓에, 인간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모성 귀환 여론을 증가시킨다는 본래의 목적은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극장 관계자들마저 속이는 애드리브라니! 역시 시장님이십니다! 시장님께서는 배신의 DNA를 타고나신게 분명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세례를 받은 뒤, 엘레나는 배우 대기실에서 아멜리아의 격렬한 칭찬을 듣고 있었다.
“미안, 아멜리아. 지금은 좀 피곤해. 나중에 얘기하자.”
엘레나가 수건으로 얼굴을 덮은 채 축객령을 내린다.
“네, 시장님.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필요한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아멜리아가 떠나고, 엘레나는 눈을 힘주어 감았다.
‘역효과가 나버렸네. 하하, 나도 참 바보 같기는.
여길 떠나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렸잖아….’
암흑 속에서, 조금 전의 추태를 차분히 되새긴다. 그 바보같은 남자에게 멋대로 휘둘리고는 그저 좋다고 멍청한 짓을 해버린 자신을. 자신만만하게 일을 벌려놓고는 보란듯이 실패해 버린 자신을.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지만, 그 짧은 순간동안 떠올린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
당신은 알까. 지위도, 재산도, 권위도, 모두 내던져버리고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는 것을.
멀어지는 당신의 등을 향해 내뻗은 애처로운 내 손끝을.
그리고 지금도 당신에게 달려가 곁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을.
분명 모르겠지. 바보같을 정도로 둔감한 당신은.
비슷할 정도로 바보인 내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마 영원히 모를거야.
떠나려는 날 잡아줘.
나와 함께 떠나줘.
떠나더라도 날 기억해줘.
떠난 나를 찾아와 줘.
수많은 소망이 떠오르고 사라지며 엘레나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녀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 아니구나. 간단한 문제였어.’
하지만 명석한 그녀답게, 금세 해답을 도출해냈다.
교주가 없는 모성, 교주가 있는 엘리아스.
교주가 있는 모성, 교주가 없는 엘리아스.
각각의 선택지에서 무엇을 고를 것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교주가 있는 엘리아스, 교주가 있는 모성이다.
‘난 그저, 그 녀석과 함께 있길 바라는 것 뿐이었구나….’
늦게서야 깨달은 진실에서는 씁쓸한 맛이 느껴졌다.
‘바보같네, 바보같아…. 정말로, 바보같아….’
엘레나는 차오르는 눈물과 애달픈 연심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씹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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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교주와 엘레나는 대충 2주 정도 후에 뾰이하게 되었읍니다.
뾰이씬은 각자 상상해주세요. 누가 써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