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는 시성(詩聖)이라고도 불리는 중국의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백 (이태백) 과 더불어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임
일차적으로 이 유묵은 중국, 대만, 한국,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박물관에도 없는 두보의 유묵이라는 데 의미가 있지만, 문학사에도 영향을 미치는 바가 존재함
방금 올라온 두보의 시 등루(登樓) 내용은 이러함
花近高樓傷客心(화근고루상객심),萬方多難此登臨(만방다난차등림)。
錦江春色來天地(금강춘색래천지),玉壘浮雲變古今(옥루부운변고금)。
北極朝庭終不改(북극조정종불개),西山寇盜莫相侵(서산구도막상침)。
可憐後主還祠廟(가련후주환사묘),日暮聊為梁父吟(일모료위양보음)。
<원문출처> 登樓/ 作者:杜甫 唐 / 全唐詩·卷228
本作品收錄於:《唐詩三百首》,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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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누각 가까이 꽃이 피었으나 나그네 상심하여
만방의 많은 어려움 이곳에 올라 내려보네.
금강의 춘색은 온 천지 가득한데,
옥루의 뜬 구름은 예나 지금 변함 없네.
북극성과 같은 조정은 바꾸어질리 없으니
서산 오랑캐들아 쳐들어 오지마라.
가련한 후주를 사당에 모심이(제갈공명) 덕이려니
날 저물어 양부음(용사의 노래)으로 마음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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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ko.wikisource.org/wiki/%EB%93%B1%EB%A3%A8_(%EB%91%90%EB%B3%B4)
원래 이 시는 764년 지어진 시로 알려져 있었고, 萬方多難 (만방다난, 온 세상이 어지러운 때) 은 西山寇盜(서산구도, 서산의 도적들) 과 연결되어 토번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
이 시기가 어떤 시기였나,
광덕(廣德) 원년(元年:763)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티쏭데짼((ཁྲོ་སྲོང་ལྡེ་བརྩན) 이 20만 대군을 몰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광무왕(廣武王) 이승굉(李承宏) 을 황제로 세웠다. (광덕지변)
진짜 당나라가 어지러운 시기였고, 이 때 두보의 나이가 53세로 파직을 경험하고 좌천되어 성도를 떠나 기주에 다다랐을 때였음.
그래서 후주환사묘 (후주 유선이 아직도 사당에 있으니) 와 양보음 (제갈량이 남양 융중에 은거할 때 부르던 노래 이름) 을 엮어 뜻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불우함을 나타낸 시라고도 해석했었음
하지만 띠용! 알고보니 이 시는 갑신년 춘모 (744년) 에 지어진 시였고 이 시기는 광덕지변이 일어나기 전임. 두보의 나이가 33살로, 24살에 본 시험에 떨어져 놀러 다니던 시기이고, 오히려 당나라의 장군 고선지가 달해부를 평정하고 돌궐 제2 제국이 멸망하는 시점임.
그러니까 뭐다? 대학원생들 눈에 불이 난다!
그리고 이 시기가 바로 두보와 이백이 만나서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인데, 원래 양보음(梁父吟) 에는 종류가 두가지 있었음.
"지금 제갈량과 이백이 지은 두 가지의 〈양보음〉이 전해지는데, 제갈량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공손첩(公孫捷), 진개강(陳開疆), 고야자(顧冶子) 세 명의 용사(勇士)에게 복숭아 두 개를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여 끝내 모두 자살하게 만들었던 안타까운 일을 서술하였고, 이백은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과 역생(酈生)을 거론하며 지사(志士)가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는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https://namu.wiki/w/%EC%96%91%EB%B3%B4%EC%9D%8C)
이 시는 이백(李白)이 천보(天宝) 3년(744년) 장안을 떠난 후의 작품이다. 이 시는 제갈량의 양보음을 차용하고 태공망(太公望)이나 역이기(酈食其)를 인용하여 자신을 비교하였으며, 제상(齊相) 안자(晏子)와 용사(勇士)인 극맹(劇孟)에 비길 수 있는 경륜을 지녔으면서도 간신들의 방해로 임금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한 신세를 한탄한 것이다.
(이백의 양보음 - https://blog.naver.com/swings81/220995274040)
그리고 이백이 지은 양보음 (梁甫吟) 이 천보 3년, 바로 744년에 지어진 시로 추정됨
눈썰미 좋은 사람은 봤겠지만, 이번에 발견된 유묵에서는 양보음 부분이 梁甫吟 라고 되어있음
그니까 그냥 이백이랑 만나서 놀다가 "아 나는 왜 벼슬을 못하지? ㅅㅂ 열받네! "
하고 지은 시일 수도 있다는 사실
유묵 하나로 시와 사람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게 참
대학원생들... 힘내자!
응 니네 두보 논문들 다 종이조각 된거야~
저것땜에 졸논 찢어져서 울부짖는 원생 최소 한명은 있다 지금
헉 이렇게 전문적인 설명을 방구석에서 들을 수 있다니 역시 유게는 최고야
건륭제가 이건 진품이고요 보물인증합니다 하면서 도장 떡칠해섴ㅋㅋㅋ
논문 소재 찾던 자들은 끼얏호를 외치지만 논문쓰던 자는 건륭제 ㄱㅅㄲ를 외친다.
아는만큼 보인다는게 이런거구나 같은 이미지를 보고 나는 그냥 오래된 종이에 수상한 한자구나 밖에 안보이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대학원생의 눈물을 즐기면 되는거지?
응 니네 두보 논문들 다 종이조각 된거야~
루리웹-3641492601
논문 소재 찾던 자들은 끼얏호를 외치지만 논문쓰던 자는 건륭제 ㄱㅅㄲ를 외친다.
오늘의 악마가 여깄다...ㅠ
저것땜에 졸논 찢어져서 울부짖는 원생 최소 한명은 있다 지금
아는만큼 보인다는게 이런거구나 같은 이미지를 보고 나는 그냥 오래된 종이에 수상한 한자구나 밖에 안보이는데
"그런데" 사실은 이 두보의 시는 젊은 시절 창작되었다는 것!
헉 이렇게 전문적인 설명을 방구석에서 들을 수 있다니 역시 유게는 최고야
근데 저거 위작이라는 썰이...
운드르
건륭제가 이건 진품이고요 보물인증합니다 하면서 도장 떡칠해섴ㅋㅋㅋ
그래서 이걸 가지고 논문쓰기도 애매하고 안쓰자니 또 애매하고 더 머리터질듯 아마 ㅋㅋㅋㅋ
외국과의 교차검증이 없는거같긴하네
그 건륭제가 하도 도장질을 해대서 위조하기 가장 쉽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대학원생의 눈물을 즐기면 되는거지?
일단 위작 여부 때문에 피똥 한번 싸고 시작할듯
근데 굳이 위작을 할거라면 원래 알려져있던대로 764년으로 적었을텐데 왜 굳이 744년으로 바꿔서 적었는지가 이해하기 어려움 누군가가 연대측정이든 뭐든 해서 확실하게 밝혀주지...
이거 청나라때 반출된걸 설마 이건희가 사온거야?
대학원생들이 지금 논문으로 쓸 시의 내용이 'ㅅㅂ 시험 떨어져서 존나 꼴받네' 라는건가 ㅋㅋㅋ
그러니까 결론이 지금 대학원생들 논문 새절 중이라는거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위작 같음. 저 형식의 종이는 엄청 손상이 심해서 1400년 된 유물이 저 정도로 손상 없이 보존되기 힘들고, 건륭제 인장은 워낙 그 양반이 찍어놓은 게 많아서 건륭제 당대 시절부터 저잣거리에 그 도장까지 위조한 위작들이 돌아다닐 정도였던지라 그 도장 자체가 딱히 진짜라는 근거가 되긴 어려움. 그리고 두보 유목 정도의 SSS급 유물이면 그 양 옆으로 이전 소장자들 글이며 도장이며 온갖 내력이 적힌 종이들이 같이 다발로 붙어있어야 정상인데 그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