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 출처: https://www.pixiv.net/artworks/120668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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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빛나는 별의 시대는 끝났지만, 새겨진 궤적은 사라질 일이 없게 되었단다.”
“와!”
“재밌었어요!”
매주 금요일, 주말을 앞두게 된 저녁이 되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쌍둥이에게 해주던 이야기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물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진 않았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기다란 귀의 쌍둥이들에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둠에 얽매여 있던 시절을 풀어서 이야기 해주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으니까. 그렇기에 수준에 최대한 맞춰 굴곡도 순화하여 풀어낸 걸 벌써 2달 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차근차근해 줬는데,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너무 좋았다.
아직 본격적으로 우마무스메로서의 본능이 자극받을 시기도 아님에도 이렇게 좋아해 줄 줄이야.
“끝났어? 그러면 이제 다들 손 깨끗하게 씻고 저녁 먹으러 오렴.”
““네에에에.””
그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앞치마를 두른 ‘빛나는 별’로 은유 되었던 우마무스메가 아이들을 식탁으로 불러들였다. 그 와중에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그냥, 애들한테 이야기 해주고 보니 세월 참 빨리 지나갔다 싶어서.”
“뭐야 그게.”
살짝 쿡, 하고 웃은 그녀는 몸을 돌렸다.
“애들 데리고 와, 당신이 좋아하는 것도 준비했으니까.”
“어이쿠, 우리 공주들이 아직도 안 나왔나?”
손 씻으라고 보냈더니 자매가 서로 장난치면서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한때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였던 남성은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로 향하는 짧은 길의 옆에 서있는 유리 장식장에는 새것처럼 관리되어 있는 4개의 트로피와 하나의 붉은 블랭킷이 있었다. 그리고 경주명과 함께 새겨진 이름은 전부 같았다.
어드마이어 베가.
그랬다.
은퇴를 장식한 겨울의 교토로부터 벌써 몇 년.
그녀는 이제 한때 트레이너로서 믿고 의지했던 이와 함께하고 있었다.
-⏲-
“애들 체력은 진짜 엄청나….”
“가끔 느끼는 건데, 어릴 때 나 때문에 부모님이 참 힘드셨겠다 싶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2시간을 더 뛰어다니며 충전된 에너지를 불태운 쌍둥이는 9시가 가까워지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점점 움직임이 느릿해지다가 눈을 뜨기 힘들어하면서 선 채로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 각자 한 명씩 안고 침대로 가서 완전히 꿈나라로 갈 수 있도록 토닥거리는 생활은 이제 익숙한 일과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당신이 세월 빨리 간다고 한 거, 우리가 겪은 일들 생각하면 오히려 느리게 간 편 아닐까.”
“생각해 보니 그러네.”
아야베가 옆에 앉으며 들고 온 맥주 한 캔을 건네주자 참 여러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나름 장담했던 것과 달리 결국 주량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회식에서 술잔을 정중히 거절했고, 그나마 입에 대는 때도 일주일에 단 한 번이었으니.
왜 주 1회 1캔으로 고정되었느냐, 하면 또 작은 일이 있었기 때문인데.
‘생각보다 맛있네? 달콤하고, 레몬 향도 나고…. 어….’
‘…아야베?’
‘…별이.’
‘별?’
‘…커다란 별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하고 있어, 트레이너.’
‘설마 취했어?! 한 모금 마신 것뿐인데?!’
‘커다랗네. 혜성인가? 아니, 아니야, 달라. 혜성은 좀 더 파앗 하고….’
ㅡ쿵.
여름의 어느 날 처음 음주에 관한 관심을 보였던 아야베도 졸업식 후, 이제는 같이 마실 수 있게 되었다고 당당히 편의점에서 하이볼을 한 캔 사서 땄다가 3분의 1도 못 마시고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오르더니 멍하게 횡설수설하다 그대로 엎어졌었다. 그 엄청나게 취약한 주량에 트레이너가 들쳐업은 후 즉시 숙소로 대도주를 했기에 망정이지 진짜 큰일날 뻔했다. 비슷한 유형끼리 만난다고 하는 말이 있긴 했지만, 설마 주량까지 비슷할 줄이야.
이쯤에서 알겠지만, 일주일 맥주 한 캔이라는 주량도 조금씩 꾸준한 늘린 결과다.
물론 저기서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다시 작게 딸꾹질하며 옆으로 넘어가 버리지만.
이야기가 조금 샜다.
“드림 트로피가 끝난 날, 아그네스 디지털이 저지른 일이 좀 골치 아팠지.”
두 사람은 캔을 따며 이내 그날의 일을 머릿속에서 회상하기 시작했다.
-⏲-
왜 아그네스 디지털이 언급되는가, 하면 이유가 있었다.
‘패왕 세대’가 마지막에서 경기장에 한데 모이는 광경을 찍으려고 이 녀석이 오페라 오가 빠져나가는 걸 포착하자 몰래 뒤따라왔었다. 근데 그렇게 잠입 액션을 하며 따라갔더니 그와 아야베가 선을 막 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들어왔고.
-으헤헤, 이런 광경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오타쿠 실격 인간 합격이다!
이런 괴상하게 돌아가는 판단력으로 냅다 사진을 왕창 찍어버렸다.
안 들킨 이유? 촬영할 때 소리 안 나도록 휴대폰 설정을 자기가 직접 만져서 그렇다고 후일 실토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드림 트로피 장거리 부문 우승자의 풍문을 눈으로 확인하라!’라는 제목으로 처음 교내 커뮤니티에 업로드되었다.
여기서부터 이미 선을 위태롭게 널뛰기 하는 행위였는데, 문제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저게 알고리즘에 걸려서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는 거다.
“그래서 할 말은?”
“죄송합니다! 제발 컴퓨터와 폰만큼은!”
그 결과는 이것.
갑자기 쭉 퍼진 졸업 전의 우마무스메, 그것도 막 드림 트로피라는 연말 대전에서 승리를 취한 우마무스메에 대한 사생활 침해에 대한 신고가 들어오자 인해 막 출범 반년 차를 앞둔 테이오 휘하 학생회는 마음놓고 송년회를 준비하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이거 그냥 놔두면 진짜로 경찰은 물론 법원이 법봉 들고 와서 머리통을 깨버릴 수도 있다는 직감이 테이오, 맥퀸, 네이처 3인방의 머릿속에 울린 것이었다. 결국 학생회에 새로이 소속된 우마무스메들을 보내서 아그네스 디지털을 이불로 묶은 후 잡아 와 버렸다.
“정신 못 차리네, 폐기해.”
“디끼야아아아악!”
그리고 그대로 묶어서 매단 후 그녀의 휴대폰과 컴퓨터를 그냥 보는 앞에서 크기에 맞춰 통째로 전자레인지에 넣은 후 돌려버리거나 입이 비뚤어 져버릴 수준의 농도를 자랑하는 소금물에 퐁당퐁당 던져버렸다.
“도촬만으로도 문제인데 그걸 유포까지? 이거 이렇게 해도 뒤처리 힘든 대형 사고인 건 알죠?”
“흑흑,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자기 손으로 찍은 시점에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 터보도 안 믿을 소리인데.”
“끄흑, 끅….”
백업도 존재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저장매체들을 튀기고 담가버려진 탓에 통곡하고 있는 디지털의 귀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부회장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는 맥퀸과 네이처의 갈굼이 꽂혔다.
“흑흑, 알고리즘 탈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그걸 누가 예상해요….”
“그러니까 찍은 거 자체가 문제라니까? 남은 저장장치도 다 확보할 거야, 더 악화하지 않게.”
“앗, 아아….”
나름대로 디지털이 진심을 담아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돌아온 건 ‘제왕’의 엄청난 무게감을 담은 말이었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편하게 덕질하던 인생이여 안녕. 이제 처음부터 다시 쌓아나가야 한다.
“테이오, 이거 우리 선에서 솔직히 해결이 안 될 거 같은데요?”
“나도 동의. 이거 이사회에 연락하고 대상이 된 두 사람과 합의 못 하면 큰일날 거 같아.”
그렇게 컬렉션이 한순간에 광역 삭제된 것에 대해 통곡하는 아그네스 디지털을 뒤로하고 맥퀸과 네이처가 차례대로 같은 의견을 비추자 테이오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장님 만나고 올게, 장담은 못 하겠지만.”
새삼 드림 트로피에도 발을 들이지 않고 은퇴를 선언한 루돌프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가운데 제왕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한편 저 사건의 피해자들이 어떠했냐, 하면.
“아야베 씨의 우승을 축하하며!”
““““건배!””””
본디 송년회이자, 졸업 전 마지막 모임이라는 명분을 달고 모이게 될 계획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우승 축하까지 곁들여진 나름 조촐한 모임이 기숙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마무스메는 우마무스메들끼리, 트레이너는 트레이너들끼리 모이는 장소를 달리했음에도 가끔 일행이 모인 방에 그리 안면이 없는 이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오늘 경주는 실로 놀라웠다네! 우마무스메가 가능성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획기적인 예시가 될 것이야!’
‘어…. 고마워?’
일단 아그네스 타키온.
가상의 입자를 이름으로 쓰며, 그것에 걸맞게 엄청난 충격을 올해 시리즈에 선사해 준 당사자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경력이 존재함에도 아무래도 오늘 경주가 꽤 강렬한 충격으로 다가오긴 한 모양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찬사를 보낼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졸업 전까지 실험에 참여해 줄 의향이 혹시 있는가, 어드… 으으읍!’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워낙 사회성이 바닥이라.’
…뒤에 실험이니 뭐니 했다가 맨하탄 카페가 바로 입을 막고 같이 억지로 고개 숙여 사과하긴 했지만.
‘당신은 ‘친구’와 무슨 관계인 걸까요…. 어째서 당신의 길잡이가 되어준 건지….’
물론 그녀도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긴 했다.
그렇게 묘하게 상반되던 두 사람이 퇴장하자마자 곧바로 쳐들어온 이도 있었으니.
‘오늘 보여주신 주법, 알려주실 수 있슴까! 꼭! 배워보고! 싶습니다!’
‘….’
건물을 진동시키는 쩌렁쩌렁한 목청으로 가르침을 요청하는,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한번 만나봤던 정글 포켓이 그 주인공이었다.
‘목소리 진짜 크구나.’
‘헤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귀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의 엄청난 성량에 혀를 내두르자 그걸 칭찬으로 듣는 것을 보고 잠깐 어이가 없어진 찰나, 알아서 물러나게 하는 붉은 진실을 꺼냈다.
‘근데 나, 원래 오늘처럼 안 뛰는데?’
‘에?’
‘장거리에선 원래 항상 패배했어.’
‘에, 어? 그런데 오늘 완전 스테이어 같아 보이셨는데?!’
‘미안, 내 특화 거리는 중거리야.’
모처럼 약점을 보완할 좋은 기회라 여겼다가 빨간약을 먹어버리고 넋이 나가버린 정글 포켓은 그 포효와도 같은 외침을 듣고 쫓아온 후지 키세키에 의해 목덜미를 잡혔다.
‘미안, 폿케도 너처럼 약점이 좀 있는 편이다 보니.’
‘그럴 수 있죠, 고생하시네요.’
‘고마워, 마지막 송년회 잘 지내렴.’
혼이 빠져나가고 있는 정글 포켓을 짐짝처럼 짊어지고 유유히 사라진 후지 키세키 이후에는 딱히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 찾아오진 않았다.
“역시 오늘 경주가 웹에 오르내리네요, 많은 장면이 올라오고 있어요.”
“교내 커뮤니티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외부 커뮤니티를 말하는 건가?”
“둘 다요. 꽤 충격적이긴 한가 봐요.”
건배를 외쳤지만 결국 전부 미성년자에 학생들. 그렇기에 술 대신 탄산음료나 주스를 잔에 담아 홀짝거리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SNS를 비롯하여 여러 커뮤니티를 왔다 갔다 하며 동향을 보던 카렌짱은 수상한 글을 포착하고 들어갔다가 손가락이 멈춰버렸다.
“어, 저기. 아야베 씨?”
그리고 약간 사색이 된 표정으로 삐걱거리며 마시멜로를 우물거리고 있는 기다란 귀의 룸메이트를 바라봤다.
“응?”
“혹시 그, 교토 경기장 뒤에서 무슨 일 저지르셨어요?”
그 말에 순간, 동기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일제히 눈을 돌리며 헛소리를 내뱉었다.
“크흠.”
“저는 아무것도 못 봤어요오….”
“이거 보세요, 가라아게와 고로케가 굉장히 굉장해요!”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반응이었지만, 그 이질감을 느끼는 것보다 카렌이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빨랐다.
“이 사진 대체 뭐에요?! 트레센 커뮤니티에 쫙 퍼지고 있는데?!”
“아.”
그리고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아야베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터졌네.
반박, 분노, 회피 이런 거 하나 없이 그녀는 그저 조용히 입안에 남은 마시멜로를 씻어내기 위해 탄산수를 머금었다.
이미 달관해 버리고만 일등성에게 당황한 카렌이 뭐라 하는 가운데, 그녀의 동기들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침묵을 택하고 그저 열심히 입을 오물거렸다.
-그는 괜찮으려나.
다만, 이 사실을 파악한 선배나 후배들에게 질타받을 ‘반려’를 걱정할 뿐이었다.
-⏲-
“할말 없냐.”
“…그.”
“목소리가 작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야베의 우려대로, 트레이너들의 모임 분위기는 아주 콩가루가 되고 말았다.
뭐, 정확히는 조만간 졸업할 아야베를 지도 중인 트레이너보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깜깜함으로 그렇게 된 거지만.
자정이 넘어가 신년이 하루 앞까지 다가온 겨울밤.
트레센의 트레이너들에게 비상이 걸리고 말았다.
-⏲-
“죄송합니다, A씨. 이건 규정을 미리 만들지 못한 저희의 불찰입니다.”
아니 타즈나 씨는 또 왜 그러세요.
“아그네스 디지털 양이 도촬한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하는 바람에 그만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아.”
그 순간 실마리가 풀리며, 대충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림이 그려졌다. 그 덕에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안 되긴 했지만-.
“퍼져도 딱히 상관없는데.”
“응?”
“예?”
“어차피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고, 거기에 쐐기 박힌다고 뭐 달라질 건 없지 않나요?”
조곤조곤한 아야베의 말에 타즈나와 트레이너, 두 사람의 뇌가 동시에 작동을 정지했다.
“아,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생활 침해가….”
“어차피 저 3월에 졸업하는데.”
“그러니까-.”
“그 후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보장만 있다면 그냥 무시할게요.”
“….”
타즈나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리는 가운데, 트레이너도 한숨을 내쉬었다. 아야베의 말대로 하는 거 외에는 솔직히 답이 안 보이기도 했으니까. 결국 그는 일등성의 손을 들어줬다.
“저도 동의합니다. 아야베가 졸업한 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뭐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다못해 초록색 모자가 수상하게 들썩거리게 하는 두 사람의 말에 결국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졸업 후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무언가 이상하게 나사가 빠진 듯한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면서 걸음걸이가 묘하게 비틀거리는 거 같았지만, 뭐 잘 처리되겠지.
“음, 그래도 확실히 생각보다 빨리 퍼지긴 했는데.”
그 와중에 아야베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가, 이내 귀를 쫑긋 세웠다.
“이참에 졸업할 때까지 그냥 당신 사무실에서 숙식해도 될까?”
“아.”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던가.
마지막 명예를 쥐며 지키고 있던 선을 부숴버린 아야베의 논리는 이상한 곳으로 튀어 나갔다.
자수정 색 눈을 반짝거리는 걸 보니 결국 그 고집을 들어줘야 할 미래도 훤히 보였다.
…괜찮겠지.
뭐 별일 있겠어?
-⏲-
“다행히 별일 없긴 했지.”
“그래, 우리 둘에게만 해당하긴 했지만.”
옛 기억을 돌이키며 이야기를 나눈 탓에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캔에는 아직 맥주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그냥 무시한다는 선택을 하니 사방에서 연애가 발각되기도 했고, 덕분에 트레이너와 담당 간의 교제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상세하게 마련되었지.”
“응, 기억나. 생각 이상으로 시끄러웠지.”
의외의 조합들이 발각되기도 했고, ‘쟤들이 연애 안 할 리가 없지’라고 시선을 받던 이들이 오히려 철저히 선을 지켜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유지 중인 사례도 나왔다. 그러한 혼돈은 아야베가 졸업하기 전까지 계속 지속되었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넣기 위해 온 힘을 갈아 넣던 이에게 비극이 닥쳤다.
“일이 산처럼 몰려온 탓에 결국 본인 연애가 깨져버린 카시모토 대리님만 불쌍하지.”
“그렇게 흘러갈 줄은 삼여신님도 예상 못 했을 거야.”
한창 연애의 물이 오르며 나날이 행복지수가 오르던 게 눈에 보이던 카시모토 리코의 얼굴에 어둠이 깔린 게 딱 그 시점부터였다. 졸지에 눈덩이에 맞은 셈이었으나, 그래도 책임감이 워낙 강한 사람이라 계속해서 일을 했지만 글쎄.
“그렇지 아무도 예상 못 하지, 지금까지 솔로로 있다는 것도.”
“…지금까지?”
순간 아야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응.”
“내가 졸업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연애를 못 하고 있다는 소리?”
“맞아.”
“세상에.”
덤덤하게 트레이너가 말하자 결국 그녀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맥주 캔을 입에 가져갔다. 마치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만약, 만약 그날 내가 당신을 거부했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까.”
무거운 질문이었다.
딱히 시기를 특정하지 않았음에도, ‘그날’이 의미하는 것이 그가 그녀의 트레이너가 되던 날임을 쉽게 알 수 있었으니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결말에 참혹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더 입에 담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트레이너는 쉬이 답하지 못하고 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날 거절당했더라도, 난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말한 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마음을 입에 담았다.
“그저 멋대로 옆에 있어 주겠다. 그 말은 항상 진심이었어, 난 끝까지 널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
그의 말을 조용히 들은 후, 아야베는 물끄러미 먼 산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에 쥔 캔에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목으로 털어 넣었다.
“어, 잠깐? 그러면 갑자기 훅 올라올 건데?”
예전에도 한 번에 반 캔 이상을 들이키고 그대로 픽 쓰러졌던 경험이 있던 탓에 트레이너가 당황해하는 사이, 순식간에 올라오는 취기에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아야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 나한테 있어서 최고의 행운은 당신을 트레이너로 선택하게 된 걸 거야.”
그리고 그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듯, 과거에는 차가움과 어둠이 짙게 깔려 있던 얼굴에 한없이 깊은 애정이 담긴 눈동자가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취기가 올라와 살짝 휘청거리는 아야베는 그 말에 캔을 쥔 손을 뻗었다. 그것에 화답하듯, 역시나 거의 비어버린 캔을 들어 건배하듯 마주친 두 사람은 그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공유하며 밤을 보냈다.
얽혀 들어가는 아야베의 왼손 약지에는 백색의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
“….”
조용히 다가온 졸업식 날.
어드마이어 베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봄의 태양을 향해 왼손을 뻗으며 바라봤다.
“꿈이, 아니구나.”
그녀를 상징하는 푸른 보석이 세공되어 자리하고 있는 반지.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케이스에서 꺼내어, 건네준 증표.
졸업의 순간이 왔기에, 이제 그 누구의 시선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끼워준 상징.
이전의 ‘저 둘 또 시작이야’하는 시선과 다른, 명명백백한 놀라움의 시선이 느껴지는 가운데 그의 입이 열렸다.
“말한 적 있지, 네가 가는 길에 언제나 함께 할 거라고.”
그녀의 눈동자가 굴러 그를 향하자, 언제나 봐서 익숙하다고 생각한 얼굴이 왜인지 모르게 바라보기 힘들었다.
이 알 수 없는 느낌은 마치-.
“나와 함께 걷겠다고 했으니, 나도 항상 너와 함께할 거야.”
손을 내미는 그녀의 ‘전’ 트레이너를 보자,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태양처럼 뜨겁지 않다.
하지만 신월처럼 어둡지도 않다.
그래, 이건 밤하늘을 은은히 밝히는 달이다.
-그랬구나.
어째서 그가 있음으로써 그녀가 무너지지 않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알타이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있어 그보다 더 거대한 존재였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같이 걸어 나가자. 나의 일등성.”
그녀가 천천히 뻗은 손을 잡으며 한 말 때문일까. 어째서인지 말랐다고 생각한 눈물이 맺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날이 오게 된다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절대로, 하는 걸 잊어선 안 되는 말.
“응,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트레이너… 아니, A씨.”
한때 사제였던 두 사람의 운명이 마침내 완전히 하나의 길로 합쳐진 날.
3월의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것을 에필로그로 일등성 시리즈, 끝
다음 소재는 누구로 하지.....
사소한 정보로 카훼의 '친구'는 선데이 사일런스,
그리고 그 산구 중 하나가 어드마이어 베가
고생했다
아야베상...
고생많으셨습니다. 너무너무 즐겁게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