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문서
통일신라 시기 쓰여진 공문서로
한반도에 있던 문서들은 전쟁과 풍화를 거치면서 다 사라졌고
현대 일본에만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왜 이게 일본에 가 있냐면
이 문서들은 통일신라가 일본에 수출한 물건들의 포장지로 재활용 된 물건이기 때문이다
대충 택배 보낼 때 충격 완화용으로 신문지 사용한 거라 보면 됨
그리고 수입한 물건들이 미상의 이유로 창고에 처박히게 됐고
이게 1933년도에 창고 뒤지다가 빛을 보게 됐던 것이다
유게이 쓰레기도 어쩌면 천년 후에는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음
아 이면지도 수천년뒤면 유물이라고
원나라가 쿠빌라이 사후에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선전하고자 위조품으로 만든 가짜 전국 옥새지만 700년 이상 묵어서 문화재로 취급 ㅋㅋㅋ
왜 저게 남아있냐면 수입은 했는데 포장지를 까서 쓴적이 없이 보관되어 있어서임
생각보다 ㅈㄴ 중요한 문서라 저걸로 통일신라를 고대로 봐야하냐 중세로 봐야하냐 문제까지 논의중
그나마 그릇 포장지는 읽을 수 있었나보네 ㅋㅋ 찾아보니 신라가 일본에 수출한 숟가락 포장지로도 쓰였다던데 ㅋㅋㅋㅋ
저때도 충동구매는 있었나보네 ㅋㅋㅋ
촌락에 몇명이 살고 재산이 뭐 있고 조사한거라서 시간이 지나면 용도를 상실해서 이면지로 쓴거지
아 이면지도 수천년뒤면 유물이라고
원나라가 쿠빌라이 사후에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선전하고자 위조품으로 만든 가짜 전국 옥새지만 700년 이상 묵어서 문화재로 취급 ㅋㅋㅋ
사실 전국옥새 자체가 구라라는 설이 있음. 정확히는 진나라 진시황이 만든 전국옥새
듀랭달도 대충 그런거지.
노트르담 대성당의 가시관도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5세기부터 있던거라 하니 유물 대접인거랑 똑같지ㅋㅋ
왜 저게 남아있냐면 수입은 했는데 포장지를 까서 쓴적이 없이 보관되어 있어서임
루리웹-8690066269
저때도 충동구매는 있었나보네 ㅋㅋㅋ
감상용, 포교용, 보관용 중에 보관용이였나보네 ㅋㅋ
원래 사온 유기자체가 조선시대에까지 넘어와서도 중국,일본에 팔리는 명품이었음
포장지에 원산지 표기가 있어서 안버리고 가지고 있었다고함
생각보다 ㅈㄴ 중요한 문서라 저걸로 통일신라를 고대로 봐야하냐 중세로 봐야하냐 문제까지 논의중
통일신라는 중세지. 보통 500-1000년대는 연대구분으로 분류하면 중세초기에 해당되는게 맞음
포장지로 썻다는건 그시기에 ㅈㄴ안중요하다는 문서 아님?!
재활용하려고 저걸 쓴거니까 팔 당시에 당장 쓰려고 한 문서자체는 당시에는 그 신라 지역에는 있었겟지 우리한테 중요한건 저게 저 시대상을 알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임
촌락에 몇명이 살고 재산이 뭐 있고 조사한거라서 시간이 지나면 용도를 상실해서 이면지로 쓴거지
"아 유붕씨 3년전 문서 다 버려주세요"
당시엔 흔했는데 다 사라지고 남은게 저거뿐이라 중요해짐 ㅋㅋㅋ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라 저걸 통해 신라 시대를 중세 봉건 사회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였던걸로 기억함 러시아가 몽골 침공 이전을 고대로 치고 아메리카도 식민지 개척 이전까지는 고대로 보는 것 처럼 단순히 서유럽에서 476년부터 중세이니 그걸 일괄 적용하자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에는 고려부터 중세로 보기 시작한걸로 기억함
누가 연대로 고대-중세 구분함. 그런 식이면 저 때 청동기 쓰던 남미도 중세임.
왜냐하면 왕조기준으로 대충 나눈거니까 보통 최근에 고대 중세 기준 나누는건 사회기반의 경제가 노예의 생산으로 이루어 지느냐 마느냐인데 저 신라 민정문서는 촌락내 노예가 4%밖에 안된다는점을 들어 통일신라도 중세로 구분하는 근거가 됨
바로 그거야!
그나마 그릇 포장지는 읽을 수 있었나보네 ㅋㅋ 찾아보니 신라가 일본에 수출한 숟가락 포장지로도 쓰였다던데 ㅋㅋㅋㅋ
저런거 접혀서 굳어있는것도 지금은 CT로 찍어서 안에 글씨 다읽을 수 있던데 ㄷㄷ..
폼페이 화산에 터지고 타다 남은 두루마리도 읽음
민정문서가 왜 일본에있나했더니 이런사연이 ㅋㅋ
이면지 ㄷㄷ
대충 라면박스에 버려질 뻔한 원나라 법전
쓰여진 X 쓰인 O
러시아 유물 1호가 저런거잖아 ㅋㅋㅋ
폐 공문서 이연지라지만 완충제로 쓸 정도면 종이 생산량이 제법 되었다는건가? 하는 생각도 흐치네 종이라는게 나름 귀한 물자였을것 같은데
생각보다 신라,고려는 절이라는 공간을 활용 잘했고 옜날부터 절은 불경을 만들기위해 먹을 만들고 종이생산을 하던 공간이었음 그래서 국가적으로 활용을 해 왔던거 그리고 한반도는 산이 7할이라 노동력만 활용하면 차고 넘치게 만들 나무는 있었어 심지어 조선때도 후기로 넘어가기전까지는 나라에서 나무소비를 제어했음
귀하니까 이면지를 완충제로썼지. 흔했으면 새종이를 완충제로 썼을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