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화백자
원래 조선도 백자에 회회청으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를 좋아하고 많이 만듬.
그러나 중국이 명청 교체기로 요지경이 나버리면서 회회청의 수급이 끊겨버림.
조선은 자체적으로 토청이라고 부르는 청색 안료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대신 기존에 흑자, 검은 도자기를 만들던 기술을 바탕으로.
철분이 많이 함유된 안료를 써서 백자에 먹으로 그린듯한 검은 무늬를 넣는 철화백자를 자체 제작하게 됨.
이후 중국은 토청을 개발해서 자체적인 청색 안료를 확보했고, 조선도 이를 바탕으로 다시 청화백자를 제작하거나 철화와 청화를 합친 고유한 스타일을 개발함.
다만 검은색을 기피하던 조선 특성상 흑자 기술은 숨만 꼴딱거리는 상황이었고, 철화 또한 검은빛이 돌아 값이 쌌기에 서민층이 애용했다고 전해짐.
여담으로 흑자 기술이 가장 발달한건 일본이었는데 거긴 검은 도자기를 사랑해서 그렇다고.
우리나라도 고대에는 까마귀가 길조였던 것을 보면 확실히 한반도 고대 문화가 일본 열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맞는 듯
일본은 길조도 까마귀였지
까마귀를 길조 흉조로 동시에 보던건 동아시아 전부 그럼
쪼꼬렛 맛
우리나라 고구려도 삼족오(세발 까마귀)가 길조였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94840 김시영 도예가라는 사람이 흑자 기술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긴 했지만 백자에 밀리면서 명맥이 끊겼다고 하더라.
감상용 사치품으로서는 생산하지 않았지만, 강원도와 전라남도 지역에선 일용품 즉, 요즘으로치면 락엔락 느낌으로 생산했지. 그래서 흑유편병같은 일용품들이 남아있고.. 도예가분이 말씀하신것도 어느정도는 맞네...
일본은 길조도 까마귀였지
멸치칼국수
우리나라도 고대에는 까마귀가 길조였던 것을 보면 확실히 한반도 고대 문화가 일본 열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맞는 듯
멸치칼국수
까마귀를 길조 흉조로 동시에 보던건 동아시아 전부 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 옛날 기녀 화장할 때 치아를 까맣게 했고
근데 이외로 충치방지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멸치칼국수
우리나라 고구려도 삼족오(세발 까마귀)가 길조였어.
쪼꼬렛 맛
검은색 기피에 흑유자 만들 기술력이 꼴딱였다는거 참고문헌은 어디야 조선은 이미 15세기에 흑유자 생산했는데
우리 도자기 역사 논하면서 기술이 쇠퇴되었다~라는게 있는데 이건 기술이 쇠퇴된게 아니라 도자기를 구워낼만한 경제력이 갖춰지질 않아서 그럼. 태토를 캐고 회회청을 수입하고 가마를 만들고 열을 올릴 재료를 구하는데 이게 다 인력인데 이걸 감당하기가 힘들었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94840 김시영 도예가라는 사람이 흑자 기술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긴 했지만 백자에 밀리면서 명맥이 끊겼다고 하더라.
루리웹-1930263903
감상용 사치품으로서는 생산하지 않았지만, 강원도와 전라남도 지역에선 일용품 즉, 요즘으로치면 락엔락 느낌으로 생산했지. 그래서 흑유편병같은 일용품들이 남아있고.. 도예가분이 말씀하신것도 어느정도는 맞네...
회회청은 코발트임 그래서 조선 스스로 회회청을 찾으려 노력했고 덕분에 개발된게 경산 코발트 광산임
경산 광산은 1937년에 개발된거 아님?
토청 개발은 성공했고, 성종 때까지 썼음. 다만 토청의 색이 기존의 회회청과 같지 않았고, 이후 성종 때 명을 통해서 회회청 수입이 됐었기에 쓰지않게 된 거.
뭔가 묘하게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