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서호
-----------------------------------------------------------------------------------
여우는 얇은 비만 부슬부슬 뿌리는 옅은 먹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못해도 내일이면 비가 그치고 늦어도 글피면 질은 땅이 굳어 산 오르내리기 알맞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노리개의 술을 만지작거리는 두 손에 괜히 땀이 오른다.
문득 냄새를 맡아본다. 그 사람의 냄새가 난다. 직접 만든 것은 아니라지마는 이렇게 냄새가 베일 정도면 시장에서 사오고도 얼마나 애틋한 마음으로 곁에 두었을까 생각하니 다섯 꼬리가 절로 들썩, 살랑거린다. 하지만 거기에서 정말로 그의 향취가 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러기를 바라서 그렇게 맡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서로 엎치었다가 뒤치었다가 이리저리 구르며 노는 막내들에게 그 노리개에서 자신이 맡는 것이 정말 노리개에 배여서 나는 것인지 물을 용기는 없었다.
그의 한쪽 귀가 울 너머에서 나는 기척에 쫑긋했다. 열리는 대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그보다 꼬리가 하나, 둘 많은 여우 둘이었다. 귀에서 힘이 빠져 살짝 쳐진다. 젖어서 살갗에 달라붙은 옷이 불편한지 넷째가 옷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살짝살짝 떼어내고 있었고 셋째는 대문을 지나며 젖은 머리칼을 쥐어 물을 짜내고 있었다. 셋째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다녀왔다, 다섯째야. 별일은 없었느냐?”
“어제처럼 비가 새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습니다. 언니들께는 별고 없으셨는지요?”
“올해는 아무 일 없이 넘어갈 듯싶구나. 계곡이 조금 불어난 것 외에는 다른 게 없다.”
“그래도 아직 산 위아래로 통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너무 기대하진 말거라, 흘흘.”
셋째가 머리를 탈탈 털며 답했고 넷째가 치마를 걷어 물을 짜며 덧붙였다. 다섯째는 얼굴과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포갠 두 손 안의 노리개만 눈에 들어올 따름이다.
늙은 여인은 이제 마루까지 나올 정도가 되었다. 사내는 노모 옆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노모는 자신의 장성한 아들을 보다가 문득 싱싱하게 익은 아들이 그만 자신 때문에 때를 놓치고 상하기나 하지는 않을까 근심이 들었다. 오래 살아봐야 나는 그저 잘 익은 사과 옆에 놓인 썩은 사과일 뿐 아닌가. 가슴이 저릿저릿하여 지릿지릿 비 내리는 하늘로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명치가 캥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구풍이 오는 때면 좀 안에서 쉬어도 될 텐데 도리를 다한다고 집일을 그칠 수 없는 자식이 안타깝고 죽지 못해 살아있는 자신이 서글펐다. 흉하게 가면 또 슬퍼할라, 곱게 가야 할 텐데 그러려면 그저 앉아서, 누워서 사자 오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수가 없다.
“얘야.”
노모가 나지막이 사내를 불렀다.
“예, 어머니.”
“벌써 이렇게 혼기가 찼으니 어서 색시를 얻어야 할 텐데 이 못난 어미가 네 혼사를 막고 있구나.”
사내는 노모가 자신에게 그러한 죄스러움을 느끼는 것을 먼저 덜어드리지 못했다는 것에 새끼 비비던 손이 오그라들고 어깨가 쳐졌다. 사내는 애써 웃으며 노모를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도 곧 갈 수 있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모가 그런 말을 한 것도, 사내가 그런 답을 한 것도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모는 이번에 사내가 지은 미소가 꼭 자신만을 생각해서 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종일 바깥 출입을 못하여 예전처럼 시장통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잘은 알 수 없었지만 요즈음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은, 최소한 자신의 아들과 집안 형편에 누군가 조력해주는 이가 생겼다는 것은 사내의 평소 안색이나 그가 차려주는 밥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도 자신의 아들에게 간만에 활짝 핀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래, 어서 참한 며느라기를 봤으면 좋겠구나.”
때는 이미 해가 산마루 너머로 가라앉았다. 여름이라도 돌개바람 지나간 후라 공기가 찼기에 사내는 그만 노모를 침소로 모시어 갔다. 사내는 단 하나 있는 호롱을 끄고 이제는 어둠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산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비 그치고 무당개구리 우는 무렵이 되어서야 천천히 침석에 몸을 뉘였다.
구풍 지나고서는 그간 쏟아지던 억수처럼 이번엔 해가 살갗을 태울 듯이 쏘았다. 살 같은 햇볕은 고인물도 진창도 모조리 말려버렸다. 사내는 다시 나무 캐러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사내가 나무하러 간 곳에는 여느 때처럼 작은 여우 둘이 놀고 있었다. 청년은 그간 구풍이 거셌으니 별고 없는가 물으며 그러한 핑계로 작은 여우 둘과 함께 그들의 초가로 향했다.
사내가 대문에 드니 보이는 것은 마당에 늘어놓은 짚대와 여기저기 분주한 여우들의 모습이었다.
“다섯째야, 네 낭군님 오셨구나. 어서 맞이해 드리거라!”
지붕에서 짚을 걷던 넷째가 누가 대문을 들어서는지 보고는 아래로 소리쳤다. 다섯째가 봉숭화 물들인 듯 얼굴에 짙은 홍조를 띠며 미소하고, 고개를 수굿하며 잰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덕분에 큰 탈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헌데, 이건 이건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돌개바람에 흉한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당신은 상한 곳 없습니까?”
사내는 뜻밖에 여우의 집이 그런 꼴인 것에 가슴이 조여서 다가오는 그를 얼른 눈으로 훑었다. 겉보기에 상한 곳은 없어 보였으나 사내가 보기에 눈이 다소 퀭한 것이 피로해 보였다. 다섯째는 잠시 우물쭈물 하더니
“사실 지난 바람에 천장이 한번 들썩여 비가 새기 시작한 바람에 하늘이 개자마자 이렇게 수선하던 참입니다. 이 탓에 날이 개고도 찾아 뵙지 못하였습니다.”
“저 사는 곳은 이 정도로 바람이 세진 않았는데 이곳이 산중이라 더 그랬나 봅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예에……. 방 안이 온통 물바다가 돼버려 옷과 이불이 젖은 탓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만 제하면…….”
그의 말을 들으니 눈 밑이 더욱 피로해 보이고 옷도 궁상스럽게 된 것이 참으로 고생하였음이 더욱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그를 좀 더 살피다가 저고리 아래로 살짝 늘어진 노리개의 술을 보았다. 노리개는 때가 타거나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무언가 도울 일은 없소?”
하고 사내가 물었다. 다섯째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얼굴에 곤란한 빛을 띠었다. 한창 작업 중인 여우들의 솜씨는 누가 보기에도 사내가 함부로 끼었다간 도리어 훼방 놓는 것 밖에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능숙하고 날랜 까닭이었다. 사내도 보는 눈이 없지 않은지라 머쓱하여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래도 모두 힘을 쓰는데 혼자 가만히 있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그 말에 다섯째가 다시 머뭇거리다
“사실,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하고 조심스러이 말했다.
“그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그는 말을 줄이다가 “우리 막내들 목욕을 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방금 무어라 하였습니까?”
“그게…. 일가 모두 오래 궂은 곳에 있었던 터라 몸을 재계해야 할 것 같은데 하필 그 두 녀석이 목욕하는 것을 그리도 싫어합니다. 두 녀석만으로는 절대 제대로 씻지 않을 텐데 빨래, 청소 등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탓에 누구 보아줄 이가 따로 없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래도 잘 따르기에 금방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혹, 언짢으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다섯째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사내는 물론 그것으로 언짢아지진 아니하였으나 남녀가 유별해야 하는데 자신이 그래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겉보기에는 계례도 하지 아니한 작은 아이들이었지만 실은 노모보다 오래 산 아낙네였다. 그러나 상대는 사람답다고 해도 요물이요,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되려 사람다운 행동 같았고 당사자도 꺼리지 않고 오히려 부탁하는 것이니 받는 것이 옳아 보였다.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닙니다. 그대가 청한다면야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럼 아이들에게 목욕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다섯째는 사내가 그리 응답하자 옆에서 그 담화를 들으며 굳은 표정으로 서로 손 잡고 있던 두 작은 여우를 가자, 하고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사내는 목욕 준비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멱 감을 때에는 그저 평소 차림 그대로 개울에 가 훌훌 벗고 물에 들어갔던 것을 생각하면 굳이 준비가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더욱 알 수 없었다.
얼마 안 있어 다른 여우 하나가 다섯째와 막내 둘이 들어간 방의 장지 틈으로 옷을 건네 받았다. 사내는 어안이 벙벙했다. 개울까지 그런 모습으로, 그것도 장정과 나란히 가는 건 아무리 그래도 낯 뜨거운 일 아닌가?
얼마 안 있어 다섯째가 장지를 밀고 나왔다. 사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막내들이 내는 캥캥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 거리가 바로 코 앞이 되었을 때 사내는 무릎 아래로 보드라운 감촉을 느꼈다. 시선을 떨구어보니 거기엔 네 발로 걷는 모습의 검고 흰 작은 여우 둘이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것이라면 조금은 참아줄 수 있다고 하였고 이편이 당신에게 좀 더 부담이 적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사내는 안도하는 한숨을 쉬었다. 다섯째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설령 사람의 모습이라 하여도 다른 이가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희 집에서 개울까지는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발을 들여놓으면 길을 헤매게 되어 팔면으로 다녀도 돌아갈 수 없으니 이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 신경 쓰지 않고 편히 있으셔도 좋습니다. 같이 가드리고 싶지만…….”
그리하여 사내는 막내 여우들의 안내를 받아 개울에 다녀왔다.
막내 여우들 목욕시키느라 개울에 다녀온 이후로는 아무리 사내보다 여우들 솜씨가 낫다고는 하여도 사내도 일손은 일손일 따름이라 여우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잡일을 도와주게 되었다. 나무를 해가야 했지만 사내는 쉽게 발을 돌릴 수 없었다.
집 수선과 청소 등이 끝나갈 즈음에는 해가 차츰 너웃너웃 넘어가는 꼴이라 사내는 그만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나 막내들은 일찍이 곤히 잠들었고 다른 여우들은 자기 일이 끝나는 대로 하나, 둘씩 잠자리에 들어 깨어 있는 이는 셋째와 넷째뿐이었다. 셋째와 넷째는 어디선가 술 한 병을 꺼내와 소반에 잔을 두고 조촐한 상을 차리고 있었다. 잔의 개수를 보니 자기 것도 차리는 것 같아 사내가 앞서서 사양하고 그들에게 이만 산을 내려가겠노라며 청하였더니 셋째가
“이거 참 미안하게 되었소만, 우리는 함부로 마을 쪽으로 갈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말이오.”
하였고 넷째가
“냇가에 다섯째가 있을 터요. 그 아이라면 흔쾌히 데려다 드릴 것이니 찾아가 보는 거이 어떻소?”
하는 뿐이라 사내는 막내 여우들을 목욕시켜주었던 그 개울로 다시 향하는데, 슬슬 햇살이 쇠하고 주변이 어슴푸레해지더니 그곳에 도달 하였을 땐 이미 옅은 구름 탓에 전모(氈帽)로 가린 듯 흐리흐리한 초승달 빛만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만 여우의 허락을 받고 가는 길이라 길을 헤매지는 아니한 것인지 개울에서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 계시오?”
사내가 수풀을 헤치고 개울로 나서며 묻자
“핫!”
하며 여인이 놀라는 소리와 화들짝 몸을 움직인 탓에 물이 튀는 소리가 났다. 순간 구름이 흘러가며 그간 가리워졌던 달빛이 개천으로 뚝, 떨어졌다.
그곳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허벅다리 중간께만 오는 물 안에서 몸을 씻고 있는 다섯째가 사내가 소리 낸 쪽을 망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청아한 살갗과 그 위에서 달가루처럼 반짝이는 물방울을 본 후에야 사내는 넷째가 그가 개천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달았고 개울에서 몸을 씻던 그와 마찬가지로 창황하여 뒤로 물러났다.
“미안, 미안합니다! 당신을 엿보려고는, 아, 당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내가 물러서 등을 돌린 것과 동시에 물이 한번 크게 풍덩 하는 것이 들렸다. 사내는 무얼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더는 아무 말 하지 못하였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차츰 정신이 들고, 그가 아무 말 않는 것이 혹여 방금 풍덩한 것이 그가 물 속으로 몸을 숨긴 게 아니라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이었다. 돌아볼까 말까 망설이며 어정뜨게 있는 동안 등 뒤에서 다시 물소리가 들렸다. 몸을 격하게 움직이느라 찰방거리는 것은 아니요, 마치 천렵하느라 그물로 고기를 모는 것처럼 차분하고 조용히 물을 가르며 걷는 소리였다. 사내는 그 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것을 알았다. 청력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가 개울에서 나와 뭍으로 나옴인지 물을 헤치는 소리가 그쳤는데 사내는 그의 젖은 발이 자갈 위에서 촉촉하게 잘브닥거리는 것과 그의 머리칼, 꼬리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발소리가 사내의 등 뒤에서 그쳤다. 여전히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그가 숨을 고르는 듯 깊이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눈을 뜨셔도 괜찮습니다. 부디 돌아봐 주십시오.”
사내는 그가 청하는 대로 했다. 천천히 고개를, 몸을 돌리고 돌리며 눈을 뜬다. 젖은 꼬리 두 개로 각각 가슴과 두덩을 가렸으되 옷을 입지 않은 것은 그대로였다.
“옷은…….”
“저는 당신 앞에 섰습니다.” 그가 고요하게 말했다. “당신 앞에 서겠습니다. 저를 보아주세요.”
사내는 가슴이 거듭 뛰었다. 이전과 같이 놀람에서 뛰는 것은 아니었다. 당황도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사내는 그와 마찬가지로 깊게 숨을 쉬고 그를 마주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무엇, 무엇입니까?”
“소녀를, 어떻게 여기십니까?”
즉시 사내는 그가 자신 앞에 선 것처럼 자신 역시 그 앞에 서야 함을 깨달았다. 그가 자신 앞에 오롯이 선 것처럼 이제는 자신도 그 앞에 오롯이 서야지, 비딱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벗어야 했다.
사내는 자신이 그를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그 위에 덮인 껍질을 벗겨야 했다.
사내는 자세를 바로 하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는 줄곧 사내를 지긋이 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이 꼬리 밑에서 천천히 그리고 깊숙히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그에게 쉽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고 있었다.
사내도 선언했다.
“저 역시 섰습니다. 당신 앞에.” 사내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참하고 곱습니다. 제 눈과 마음이 그런 그대를 봅니다. 저는 당신이 아리땁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낭자가 저를 미혹한 것이 아니란 것을, 제가 보아온 모든 것이 참이라 압니다. 당신은 그런…. 여우니까.”
다섯째의 얼굴이 피었다.
“허나 당신은 여우고 나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의 눈을 신경 쓰는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단지 수명의 길고 짧음 너무나도 큽니다. 나의 평생은 여우들에겐 시위를 떠난 살처럼 지나가고 찰나와 같지 않습니까? 같은 명을 누리는 사람들끼리도 그런데 하물며 여우와 사람 사이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때가 지나 내가 먼저 눈을 감게 되면 낭자는 슬퍼할 뿐인 긴 시간을 보낼 게 분명하오. 그 긴 시간을 줄이고 싶을 정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받았다. “소녀의 언니들 모두 먼 옛적에 혼인하고 먼 옛적에 그 짝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때의 기억과 추억만으로 남은 긴 세월을 더욱 살아가고 있습니다. 잊지 않습니다.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으로 말미암아 소녀는, 쭉, 행복할 겁니다.”
사내는 물러날 까닭이 없었다.
“연모합니다.”
그는 양 손을 가슴 앞에 고르게 모으고 미소를 지었다.
사내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고
초승달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환상속의 여우 그만좀 빨아라 달아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