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네 이방인이여! 그대는 공산당의 선택을 받았다네!]
때는 바야흐로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1940년대 말, 소련.
현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고려인 집단농장. 북극성 콜호즈.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척박하기 짝이 없는 중앙아시아로 원치 않는 이주를 한 지 10년이 흘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의 소련 랜드리스가 끊겼고
소련은 전쟁의 상흔을 미처 복구하기도 전에 식량난에 처하게 된다.
때문에 소련 곳곳에 있는 집단농장을 쥐어짜서라도 인민을 먹여 살려야만 했고
고려인들의 집단농장인 북극성 콜호즈도 이를 비켜나가지 못했다.
이 때의 북극성 콜호즈 지도자는 김병화라는 사람이었는데
1905년 연해주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생계를 잇기위해 여름마다 밭의 잡초를 뽑고 품삯을 받았고 겨울에는 새끼줄 꼬아 파는것으로 생계를 연명했다.
물론 식량 사면 남는 돈은 전혀 없었고 그마저도 굶기 일쑤였으니 김병화는 이대로는 나아질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지역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 당시의 어려운 사정 속에서 대학까지 진학하는데 성공한다.
이 때 적백내전이 발발하였는데, 김병화는 레닌의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장교가 되었다.
이는 소련의 소수민족인 조선인으로써 매우 큰 성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숙청을 좋아하시는 그분의 그윽한 눈빛.jpg]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고려인들은 강제이주와 탄압을 받았고
그 유명한 대숙청의 바람이 불면서 장교란 장교는 죄다 숙청 크리를 맞게 되는데
김병화 또한 대숙청 속에서 조선인 민족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1939년, 다행히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고
그 사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가족들이 정착한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한다.
[소련이라는 이름의 이세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여기서부터 이세계(소련)에 떨어진 소작농의 비범한 스토리가 시작 되는데..
[북극성 콜호즈의 농장대표들 단체 사진.]
위에서 말했듯 때는 2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난 1940년대 말의 북극성 콜호즈.
현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북극성 콜호즈에 새 지도자가 된 김병화는
소련 정부가 정한 할당량이 코앞에 떨어지자 두 팔 걷고 쌀 농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땅은 드럽게 척박한 곳이었고
현지인들도 농사 짓기엔 너무 힘든 땅이라 유목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판이었다.
그리고 소련 정부가 지시한 할당량은 1헥타르당 3톤의 식량.
그리고 김병화의 북극성 콜호즈는
1헥타르당 8톤을 생산했다.
[아무튼 놀란(?) 스탈린.jpg]
당연히 소련 당국은 놀라 자빠졌고
어떻게 된 일인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당의 서기들과 위원들을 달달 볶기 시작한다.
"야, 서기야. 고려인 집단농장에 트랙터 몇대나 보냈니?"
"안보냈는데요?"
???
"그러면 비료는?"
"안보냈는데요?"
???
김병화의 북극성 콜호즈는
트랙터와 비료도 없이 헥타르당 8톤을 찍어낸 것이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
이 공로로 김병화는 소련으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게 된다.
[어케했노 조선인들아..]
물론 조선인들이라고 마이다스의 손 마냥 흙에 손만 댄다고 쌀이 나오는건 아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조선인들도 그저 맨땅에 헤딩한것만은 아니었다.
처음 강제이주를 당했을 때, 조선인들은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좁아터진 한반도에서 논을 일궈봐야 좁아터진 한반도 짝인데
중앙아시아에 도착하니 조선의 논을 대륙의 스케일으로 지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신나서 볼가강에서부터 수로를 파기 시작했고...
논을 크게, 매우 크게 넓히기 시작했고...
조선에서 가져온 볍씨를 뿌렸고...
마지막으로 조선인 특유의 농사에 대한 근성을 첨가하였으니...
이러니 8톤이 나올 수 밖에..
아직 안끝났고.
1950년대가 되자 소련은 북극성 콜호즈의 주요작물을 쌀에서 목화로 바꿀것을 명령하는데
이번엔 헥타르당 2톤을 제시한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북극성 콜호즈는 헥타르당 5.3톤을 생산해버림으로써
[선명하게 보이는 두개의 왕별 훈장.]
김병화는 이 공로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번 받게 된다.
참고로 소련 전역에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번이나 받은 사람은
고작 20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몸담았던 북극성 콜호즈는
1974년 김병화가 사망한 이후
김병화 콜호즈로 개명하여 운영되다가 1991년 소련의 해체를 맞으며 거의 사라졌지만
현지의 고려인들은 아직도 김병화와 북극성 콜호즈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고 한다.
어떻케 한겨 ㄷㄷㄷ
뭐지 대체 뭘한거지 ㄷㄷ
그래서 어떻게 한건데 알려줘야자!!
아니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