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이 정도의 학살은 유례가 없었고, 우두머리였던 조조의 용인이나 주도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청주병은 모병제에 가까운 군대였으며 자질이 부족하거나 하기 싫다는 이는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청주병이 조조의 통제를 벗어나서 멋대로 행동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럴 놈들은 진작 추방했으니까. 추가로 황건적은 일반 백성들이 봉기하여 일어난 거대한 반란 세력이었다.
《정사 삼국지》에서 조조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 진수마저 서주대학살은 살육이란 단어로 묘사한다.[1] 193년 이때가 1차 학살이다.
이후 194년에도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을 세워 다시 서주에 쳐들어가는데, 이때 또 다시 2차로 백성들을 대규모 학살했다. 백성의 시체로 강이 메워졌다고 기록되었고 진수 역시 백성을 잔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도륙된 사람들은 서주 토박이 외에 전란을 피하여 관중에서 이주해 온 피난민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빠 마저도 이건 인간짓 아님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