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영화는 그야말로 황금의 해. 별별 신기하고도 재밌는 영화가 온곳에서 튀어나왔다
그중ㅇㅔ서도 단연 돋보이는 영화는 한국의 기생충과, 히어로 영화인 조커.
이 둘 영화를 본 몇몇 사람들은 왠지 이 둘이 비슷한 이야기라고 느꼈고 나 또한 그러하였음.
그렇다면 기생충과 조커는 어떤 면에서 동질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를까? 이에 대해 대충 분석해보고자 함.
우선 두 영화의 공통점은 바로 심한 빈부격차가 이야기의 배경이란 것, 또 주인공 기택 가족과 아서는 그곳에서 돈도 많이 못버는 사회적 약자로 나타나지.
영화 내내 다루는 빈곤 가정들의 극심한 고통은 영화를 보고있는 관객들이 등장인물의 처지를 공감시키게 해줘.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행동도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가는 장면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기택이들은 퀴퀴하고 벌레 꼬이는 지하칸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서 애꿎은 기사 잘리게 만들고, 가정부도 잘리게 만들지. 조커에서는 아서가 지하철에서 은행 양아치놈들에게 쳐맞다가 우발적인 총기 사건을 내고, 자기 짤리게 만든 뚱뚱이도 죽이게 되.
이런 주인공의 행동이 옳냐? 하면 선뜻 대답할 수 없어. 그들의 감정과 처지가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나 또한 저 상황에서 똑같이 대응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잘못한 일도 아니야. 조커에선 그런 묘사가 덜하긴 하지만 기생충에서는 상류층인 부자 가족의 악행이 전혀 없음. 오히려 현실과 비교하자면 천사라 해도 좋을 지경이야. 돈도 많이 주고, 딱 선을 지키면서 서로의 생활을 지켜주는 사람인데 여기서 어떤 악함을 찾을 수 있겠어. 빈정상한 말투? 그정돈 인간관계에서 살짝 나타날 수도 있지. 냄새난다는 말도 사실은 혼잣말인데 하필이면 그걸 소파 밑에서 들어버렸지.
조커에서 머레이도 딱히 틀린 말을 한게 아니었지. 객관적으로 그런 깍아내리는 개그가 문제가 될 수 있어도 그것 자체가 아서의 행동에 불을 붙인 게 아님. 아서의 여러 주변 상황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고, 마지막 총을 든 상태에서 눈 앞에 보인 머레이는 그저 적당한 화풀이 대상이었을 뿐이야.
이런 현대사회의 모순을 담은 장면 때문에 이 영화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고발을 주제로 삼았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잘못된 결론 같아.
두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확연하게 달라.
이거는 이야기 갈등의 해소가 어느 부분에 있고 마지막에 전달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면 느낄수 있는데
기생충에서는 기택의 아들이 돌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때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 제일로 불타오르는 타임이야. 이미 막장을 넘어서 수습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느냐는 관객들에게 극도의 몰입감을 선사하지. 그리고 기택 아들이 지하남자에게 돌로 당했을 때, 그때 관객들이 이 불편한 상황에서 나가고 싶어서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던 대부분의 긴장이 해소되면서 결말을 예측하게 되지. 결국 비극으로 끝나겠구나. 그 후의 몇분동안 여러 아이러니한 일이 나타나고 끝으로 다시 지하방에서 편지를 쓰는 결말은 찝찝한 기분을 선사하지
그래서 기생충의 전달코자 하는 주제는 이런 찝찝함. 그 자체라 난 생각해.(나는.)
그런데 조커는 말이지, 중간까지는 비슷한 구조로 흘러가. 아니 더 비참하고 우울하지. 자신을 위로해줄 가족도 한 명 뿐이고, 그 가족도 결국엔 아서를 배신하게 되지. (이건 중간 후의 이야기지만) 그런 아서의 비참한 모습이 관객들을 더욱이 그를 불행히 동정하고 분노해주게 되. 그러다가 한 사건 이후로 이야기가 확 바뀌게 됨.
지하철에서의 총기사건. 이것 자체는 이야기가 많을 꺼야, 정당방위다, 아니다 과한 폭력이다. 솔직히 이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야. 중요한것은 화장실에서의 아서의 행동이지.
살인을 하고 헐레벌떡 화장실로 도망친 아서는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춤을 추지. 상식적으로, 누가 사람을 죽이고 춤을 추겠어?
그런데도 아서는 춤을 춰. 마치 자신이 한 행동이 숭고한 행동인듯이. 아름답고 예술적인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듯이.
이것이 영화의 이야기를 뒤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야.
여기 이후로부터 관객과 아서의 이해는 동떨어지게 되. 더이상 관객은 조커로써의 면을 보이는 아서를 이해할 수 없게 되. 그러면서 그를 둘러싼 빈부격차와 같은 문제는 더이상 아서에게든 관객에게든 중요한 요소가 아니야.
환각은 여기에 말뚝을 박는 확정타야.
이제 남보고 살지 않겠다 결심한 아서의 마음가짐은 엄마의 사진 뒤에 적힌 T.w의 약자를 봐도 별 감흥이 없어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이제 현실의 사실판단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아. 단순히 자신 눈 앞에 보이는 것뿐만이, 조커의 무대로 여길 뿐이지.
그래서 마지막 경찰서 위에서 벌이는 춤사위는 주변 광대마스크들의 환호와 함께 관객들을 군중심리로 몰아. 거기서 느끼는 감정은, '광기'지
영화 조커에서 나타내고자 한 주제는, 조커란 캐릭의 광기 그 자체야. 이렇게 상업적 표를 내면서도 직설적으로 광적 분위기를 만든 작품은 드물었으니, 관객들은 이에 열광하며 칭찬일색이게 되었지.
결국 이 둘의 차이는, 기생충은 빈부격차의 현실과 허무함이 주제로 나타났다면, 조커는 그것들은 광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도구에 불과하지. 이래서 조커 영화가 상류 하류간 불신을 만든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해.
솔직히 조커가 조커라는 캐릭터 빼고 영화를 만든다면 훨씬 논란이 됬겠지. 왜냐면 조커는 이미 뿅뿅이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납득이 가는 캐릭터니까. 그러니까 조커 덕분에 이런 좋은 영화가 나와서 참 좋음.
님들은 어떻게 생각함? 댓글 로 알려주면 좋겠음.
긴 글 읽어서 감ㅅㄱㆍ
조커보고 사람들이 걱정했던건, 하류층 문제가 아니라 진짜 '찐따' 들이 조커처럼 행동할까봐 그랬다는거 아님?
겨울반딧불이
이런
조커보고 사람들이 걱정했던건, 하류층 문제가 아니라 진짜 '찐따' 들이 조커처럼 행동할까봐 그랬다는거 아님?
조커가 확실히 해방의 쾌감을 압도적으로 연출해서 그런 걱정이 나올 수 있음. 그런 비판점들을 봉쇄하고 차단하는게 바로 '조커'란 캐릭터성임. 조커란 놈은 원래 저런 놈이다. 하고 현실과 미디어를 구별시키는 역할을 가지지.
난 조커보고 공감했는데. 나는 개그를 치는데 주변 사람들은 안웃더라. 내 유머 취향이랑 다른 사람이랑 근본부터 다른거 같음. 난 그걸 그냥 받아들이지만, 누군가는 그걸 못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겟지. 만약 내가 정신병도 있고, 불우한 가정환경도 있고, 사람들에게 멸시받는것도 있으면 조커 보고 마음 많이 흔들렸을거 같어 ㅋㅋㅋ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