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 시리즈 스포 주의
그래도 해리 포터 정도는 좀 시간 내서 봐도 좋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호그와트 초대장을 기다리게만든 원흉이자
동심으로 가득찬 마법세계를 꿈꾸게 만든 아름다운 판타지 소설.
그리고 현실은 우리같은 한국인 마법사들이 마법을 배우려면 집에서 독학하거나
동아시아 유일한 마법학교가 있는 일본으로 유학가야 한다는
덤블도어도 기가 막혀서 치매가 나을 참신한 설정을 가르쳐준 놀라운 오리엔탈리즘 마법 세계.
그 것이 전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해리 포터 시리즈일 것이다.
하지만 조앤 롤링의 여러 트위터 발언으로 인해 그 매력과 환상이 많이 부숴지는 경향도 있는 것이 사실.
심하면 해리 포터 시리즈가 순전히 운이 좋아서 뜬 소설 정도로 치부하는 과격한 의견도 보인다.
사실 나도 조금만 수능 운 좋았으면 막 옥스포드 가고 그러는데 막.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참고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는 자신의 주장 가지고 욕먹긴 싫으니까 붙히는 접두어같은 것이다. 참고하라.)
해리포터는 아주 재밌고 흥미롭게 남녀LGBT노소종족 다 즐길 수 있는 잘 만든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아주 잘 쓴 미스터리 소설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덤블도어가 게이인 것을 잘 숨겼기에 잘 쓴 미스터리라고 하는게 아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은 자신의 세계와 이야기 안에서
미스터리를 아주 훌륭하게 풀어냈다.
왜냐하면 판타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의 원인이 마법이라는 편리한 도구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 없이
하나 하나 세심한 복선과 흥미로운 단서를 제시하고 독자들이 따라오도록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일단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좀 더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하려고 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TV 시리즈 <셜록>을 예로 들어보겠다.
셜록은 아주 재밌고 흥미로운 추리물이긴 해도 주인공의 추리를 독자들이 따라갈 여지는 아주 적다.
대개 엄청 정신없는 줌인과 줌아웃이 반복된 후에 닥터 스트레인지가 자신의 엄청난 추리력으로 밝혀낸 사실을 열거할 뿐.
즉 우리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단순히 화면을 보며 말하는 오이의 놀라운 능력에 경탄하고 넘어갈 뿐.
"우와
오이가 말도 하다니."
물론 이것은 영상물의 이야기이며 소설 해리포터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단순히 쉬운 예를 들기 위해서 셜록을 꺼낸 것이고 셜록을 까내리는 것은 아니다.
영상물은 소설보다 단서를 제공하기가 까다롭기도 하고.
산만해진 주의력 다시 복구시키는 짤
우리는 이런 추리물의 예시를 자주 본다.
그냥 주인공이 원맨쇼로 다 해결해버리고 독자들이 추리할 만한 기회도 주지 않는 그런 많은 추리 소설을.
주인공은 이런 단서를 봤는데, 우리에겐 그 단서를 보여주지 않고.
발빠른 유게이들은 베스트에서 도리를 찾았는데 뒤늦게 찾아간 나에겐 그새 삭제된 게시물이고.
해리 포터에서는 책을 읽는 독자들도 공평하게 주인공들이 얻는 정보를 제공받는다.
떄로는 주인공들보다 더 빨리 알아차리기도 하고,
때로는 주인공들과 함께 밝혀진 진실에 놀라기도 한다.
3편의 보가트 수업을 기억하는가?
상대방이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괴생물 보가트와 맞서 싸우는 연습을 하는 장면 말이다.
나는 아마 5년전에 유게에서 본 조토피아 글로 나타날 것 같다 아직도 프사 기억한다 시발련아
중간에 루핀 교수에게 보가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소설의 묘사를 보자.
"학생들은 루핀 앞에서 허공에 매달린 은빛 구체를 목격했다."
은빛 구체란 무엇일까?
우리는 나중에 가서야 루핀이 늑대인간이고 자신을 늑대괴물로 변신시키는 보름달을 가장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판은 아예 좀 더 직설적으로 보름달을 보여줬지만.
그 뿐인가? 루핀은 한달에 한번씩 수업에 나가지 못하고
스네이프는 루핀 대신 수업을 가르칠 때 늑대인간에 대해 가르쳤다.
우리 독자들은 주인공 삼인방과 같은 정보를 제공받았고, 일부 독자는 헤르미온느처럼 진작에 눈치챘을수도,
해리와 론처럼 별 생각 없이 넘어갔을 수도 있다.
아니면 네빌의 두꺼비 트레버처럼 생겼을 수도 있고.
조앤 롤링은 거기다가 인물들의 묘사까지 아주 맛깔나게 보여줌으로써
추리물로서 매력을 발하고 있다.
기름 떡진 검은 머리
딱정벌래같은 검은 눈동자
창백하고 뾰족한 얼굴
안경 뒤로 큼지막한 그녀의 눈
이 묘사만으로 작중 인물중 누구인줄 알아맞출 수 있겠는가?
당근 빴따죠 쉬바
순서대로 스네이프, 해그리드, 말포이, 트릴로니라는 것을 맞췄다면 당신은 참 훌륭한 해리 포터 팬이자 독자일 것이다.
참 잘했어요. 맞추신 분들은 쪽지로 이름 보내주시면
저스틴 비버 영상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롤링은 절대로 캐릭터 묘사에서 이런 생기 넘치는 외형 묘사를 놓치지 않는다.
산발한 갈색머리라는 설명은 분명 헤르미온느
반달모양 안경에 구부러진 코라는 묘사가 나오면 덤블도어
두꺼비같은 면상이라는 묘사가 나오면 무조건 엄브릿지
이런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작가는 인물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그 인물의 암시나 모습, 혹은 확실하지 않은 등장까지도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예를 들어보자.
소설에서 해리는 예언의 구를 놓치며 부숴버리고 마는데
거기서 이상한 형상을 목격한다.
안경 너머로 눈이 확대된 듯한 여인의 형상을 목격했다고 책에서는 묘사하는데
분명 사이비 예언자 트릴로니를 보여주는 장치다.
해리는 그걸 나중에 덤블도어가 설명해주고서야 눈치챈다.
하지만 예리한 독자들은 그 단서를 놓치지 않고, 주인공 해리보다도 먼저 그 (작고 사소해보이지만) 흥미로운 진실을 발견해낸다!
그 순간 만큼은 롤에서 티모 모가지 땄을 때의 쾌감에 거의 가깝다.
물론 해리나 우리나 거기서 시리우스가 뒤질줄은 몰랐지.
영화에선 비교적 이런 추리물로서의 치밀함이 약한 편이지만 말이다.
하기야 7편에 가서야 5편에 나올 떡밥이 중요해질 줄은 몰랐겠지.
그래도 먼던구스 7편 출현은 좀 아니었어요.
증거만 잘 설치해놓는다고 좋은 추리물이냐? 그것도 아니지.
잘 숨기기도 해야 좋은 추리물이지.
우리는 2편에서 지니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는데,
그 것은 작가가 지니의 존재를 희미하게 설정해놓아 우리의 관심과 의심 밖에 두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사도 얼마 안되니
그녀는 소심하고, 말도 안하고, 심지어 주인공들과 어울리지 않는 1학년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결정적인 순간들에서는 아주 세심하게 그녀의 감정 변화를 캐치해서 보여준다.
5권에서는 브로더릭 보드라는 마법부 직원이 성 뭉고 병원에서
사람 목 조르는 식물에게 교살당하고 마는데,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그 사건 전에 주인공들 앞으로 그 식물이 보드에게 배달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 사실을 무시하고 넘어갔느냐.
바로 그 다음 장면에 오랫동안 숨겨져왔던 네빌 부모님의 비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해리는 이미 알고 있고 우리도 이미 4권에서 알았지만
실제로 미쳐버린 네빌 부모님의 모습은 '괴상한 식물'의 존재를 넘어가게 할 만큼 강력하다.
작가는 이렇게 시선 돌리기에도 능하다.
덕분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으면서 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메인 플롯부터 수많은 흥미로운 서브플롯까지의 단서를 발견해나가며
만족스럽게 책을 완독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해리포터는 영국의 마법 사회와 달리 우리에게도 공평하게 마법세계의 미스터리를 탐험하게 허락해주며
그 단서를 비겁하게 숨기지 않고 다채로운 묘사를 통해 제공한다.
그 와중에도 그 단서가 너무 뻔하지도 않으니 추리물로서는 꽤나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때로는 우리는 주인공을 앞서갔다는 쾌감을 느끼기도 하며,
주인공들과 함께 찾아내고 놀라며 몰입하기도 한다.
안경 쓴 번개 흉터의 꼬마가 마주하는 마법세계는 놀라우며, 훌륭한 미스터리도 그 놀라움과 환상을 더해준다.
그래서 우리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사랑해왔던 걸지도.
참 역설적이게도 미스테리 소설에 비현실적인 요소가 나오는 걸 싫어하던 반단인이 주장한 추리소설의 법칙을 비현실적인 요소가 도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지킨 판타지 소설이죠 애초에 반다인의 법칙이 추리소설을 작가가 문제를 내고 독자가 푸는 두뇌 게임으로 보고 만들어진 일종의 페어플레이를 위한 룰의 성격이 강하다는 걸 생각하면 세계관을 제공하고 그 세계관의 법칙에 맞게 추리를 하기위한 단서들을 충분히 던져줬으니 이상할 것도 없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