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中, 돌격하는 조선군)
광교산 전투는 정축년 음력 1월 6일 광교산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간의 전투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지휘관인 전라병사 김준룡은 청군 지휘관이었던 호쇼이 어르커 친왕 도도와 초품 일등공 양구리를 상대로 대단한 선전을 펼쳤고, 종국적으로 청군의 지휘관중 한 명 이었던 양구리까지 사살하는 결과를 얻는다.1
그러나 그 날 벌어진 전투는 조선군에게도 몹시 힘든 전투였다. 김준룡과 조선군은 하루 종일 치루어진 격전과 그로 인한 물자 손실, 병력 피해로 인해 더 이상의 전투 진행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몰렸다.
그런데 청군의 요격군 주력과 그 최고 지휘관인 어르커 친왕 도도는 여전히 살기가 등등했다. 비록 날이 저물고 양구리와 연락이 끊김으로서2 일시적으로 후퇴하긴 했으나, 김준룡이 판단키로 그들은 필시 다음날(정축년 음력 1월 7일) 재차 공격을 해올 것이 분명했다.
이 이상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던 김준룡은 결국 주둔지에 말들을 묶어놓고는 마치 자신들이 진영을 유지하고 있는 것 처럼 꾸민 뒤 수원방면으로 퇴각한다.
도도는 김준룡이 철수한 후 병력을 재정비하여 음력 1월 7일 아침에 김준룡과 그 예하 군대가 주둔하던 진영에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미 김준룡군은 퇴각한 뒤였고, 도도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이 방기한 말들만을 대량으로 노획한다.
김준룡 예하 조선군은 비록 본래의 목적을 달성치는 못했으나 고립된 상황에서 청군의 요격 시도를 일시적으로 격퇴하고 더 나아가서 청군의 최고 지휘관중 한 명이었던 양구리까지 전사시켰다.
이는 병자호란 중에 있었던 조선군의 전투 사례중 최고 선전 사례라고 할 만 하다.3
그러나 이 전투에서의 조선군의 병력 규모가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혹자는 이 말을 듣고 의문을 가질 것이다. 세간에는 광교산 전투에서의 조선군 규모가 흔히 '2천여명'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재성의 저서『병자호란사』에서 거론됨으로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병력규모이다.
유재성은 1986년 발간된 본인의 저서에서 광교산 전투 당시의 김준룡군을 2천여명이라고 비정했으나, 해당 저서 『병자호란사』같은 경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내의 학술 연구 수준이 발달하면서 여러 검증을 통해 문제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병자호란사』는 전쟁 이전 조선의 각각의 군사집단, 기관별 병력 규모는 몰라도, 전쟁 당시의 각군의 병력의 규모 고증에 있어서 상당히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병자호란사에 거론된 청군의 병력규모는 대부분 근거 없이 과장서술된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김준룡군의 규모가 2천명보다는 훨씬 많았다는 견해를 제시코자 한다.
필자는 6천에서 1만명 가량, 혹은 그 이상의 군대가 김준룡 예하에서 광교산 전투에 참전했다고 판단하며, 아래에서 그 판단의 근거를 제시코자 한다.
첫째 근거로, 승정원일기에서 나타나는 당시 김준룡 군대에 대한 단편적 기록을 제시코자 한다.
승정원일기 정축년 음력 2월 22일 사료에는 전라도 근왕병과 함게 종군했던 체부 종사관 김광혁과 당시 조선의 임금이던 인조간의 대화 기록이 남아 있다. 비록 기록이 군데군데 누락이 되어 있어서 김준룡군의 정확한 수효는 알 수가 없으나, 이 기록을 살펴보건대 김준룡군의 규모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확실하게' 3천 2백명 이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4
당시 광교산 인근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김준룡 예하의 군대 뿐이었으므로 수습된 '상처 입은 군대'는 모두 김준룡 예하에서 종군했던 이들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부터 일단 기존의 2천명설의 의미가 무척이나 퇴색된다.
둘째로, 속잡록의 기록을 들고자 한다.
속잡록 병자년 음력 12월 26일의 기록을 보면, 이 때 김준룡이 사영의 군대를 거느리고 죽산에 당도했으며 전라감사 이시방은 우영과 친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렀다.5
즉, 이 기록에 따르면 병자년 12월 26일 당시 김준룡은 전라도 근왕군의 대부분인 4영을 이끌고 전진하고 있었으며, 이시방은 우영과 친군을 거느리고 뒤에서 김준룡을 따라서 올라가고 있었다.
정축년의 국문기록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이 국문에서 이시방은 앞서 언급한 기록과는 사건전개가 약간 다르나 대체적으로 같은 맥락의 사건증언을 한다.
국문에서의 이시방의 증언에 따르면 이시방은 청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김준룡과 함께 즉각 대응하였는데, 일단 상황이 급하여 준비가 끝난 군영대로 순차적으로 전진시켰다.
전라도에 배치된 5영의 속오군과 김준룡이 모두 출발한 뒤 이시방 본인은 직속 관병과 소수의 군관만 이끌고 천안으로 향했다.
이시방이 천안에 이르렀을 때에, 앞서 전진한 5영중 3영은 김준룡 예하로 소속되어 수원에 주둔한 상태였으나 나머지 2영(전영, 우영)은 뒤쳐졌다. 이 때 이시방은 뒤쳐진 군영들을 본인의 통솔권을 이용해 다시 재정비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29일에 안성에 이르른 뒤, 전영을 광교산의 김준룡에게로 보냈고 우영은 임시로 자신이 통솔했다.6
앞서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단 광교산 전투 직전에 김준룡이 4영을 통솔하게 된 것에는 차이가 없다.7
4영의 병력이란 것이 어느 정도 규모일까? 당시 속오군 체계상 군영 하나의 규모는 대략 2천~3천 5백여명 가량이었으며, 가장 수효가 많은 군영은 5천까지도 이르렀다.8
물론 각각의 군영의 전군이 근왕에 동원되진 않았을 것이다. 기존의 주둔지를 지킬 병사들도 약간은 필요할 테고, 빠른 전진을 위해 일부 병력을 뒤에 떨어트려 놓을 수 밖에 없기도 했을 것이다.
북상한 각각의 영의 규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후영군의 경우 2천 7백명 가량이 북상했던 것이 확인된다.9그것은 각각의 군영이 거의 최대 수준에 달할 정도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김준룡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김준룡 휘하에는 광교산 전투 직전 총 4개의 군영이 배치되어 있었다. 단, 이 중에서 후영은 김준룡에게 재합류하기 전에 궤산되어 고작 2백여명만이 김준룡에게 합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준룡에게는 3개의 멀쩡한 군영이 있었다. 그렇다면 김준룡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6천여명의 병력을 보유한 것이 된다. 병력규모를 최대로 추산할 시에는 1만도 넘을 정도였다. 그것은 필자가 제시한 김준룡 병력의 하한선에서 상한선에 해당한다.
이제 셋째 근거를 제시코자 한다. 셋째 근거는 김준룡이 발송한 장계를 가지고 남한산성에 온 군관의 보고이다.
김준룡은 병자년 음력 12월 29일에 광교산 인근에 진을 구축한 뒤 남한산성으로 전령을 보내었다.
해당 전령은 정축년 음력 1월 5일에 남한산성에 들어와 장계를 올렸는데, 장계를 올리면서 김준룡이 1만에 달하는 군대를 광교산에 주둔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10
해당 내용의 출전은 병자록이다. 병자록의 일부 내용들은 나만갑이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기입한 것인지라 실제와는 동떨어져 있으나 해당 보고 사실은 당시 남한산성에서 관량사로 근무하고 있던 나만갑 역시 직접 확인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11
광교산 전투의 조선군 최고 지휘관이었던 김준룡이 직접 파견한 전령이 김준룡의 군대를 1만이라고 칭했다면 아마도 김준룡의 군대는 정말로 1만이거나 그에 필적하는 숫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과장의 가능성도 있을 터지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 군관이 거짓을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넷째 근거는 하담파적록의 기록이다.
하담파적록은 병자호란을 직접 경험했던 문신 김시양이 지은 수필집이며, 따라서 전란의 전후에 대한 기록이 꽤나 상세하다.
비록 해당 사료가 오류가 전혀 없는 완벽한 사료는 아니고, 몇 가지 눈에 띄는 오류가 있으나, 이 사료에서도 김준룡이 통솔했던 군대는 약 1만으로 거론된다.12
다섯째 근거는 시남집 남한일기의 기록이다.
시남집은 선조시기서부터 현종시기까지 생존해 있던 문신, 문충공 유계의 문집이다. 이 한문사료의 남한일기 부분을 살펴보면, 김준룡이 8천의 군대를 이끌고 광교산에 진을 친 기록이 보인다.13이는 본인의 추정인 6천~1만 이상의 중간값과 거의 비슷하다.
시남집 역시도 완벽한 사료는 아니나, 그렇다 하더라도 전쟁을 직접 겪은 문신의 기록이니만큼 근거사료중 하나로 보기엔 충분하다.14
조선측의 기록에 비하여서는 그리 큰 근거는 아니지만 청측의 사료 역시 참고할 만 하다.
청측은 만문사료인 내국사원당과 한문사료인 청태종실록에 모두 광교산 전투 이후 어르커 친왕 도도가 1140필의 말을 노획했다고 기록했다.15
보병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던 김준룡군이 유재성의 설명대로 고작 2천명이었다면 이 정도 숫자의 말을 보유했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청측 사료의 해당 노획보고는 김준룡군이 상당한 대군이었음을 증명하는 근거이다. 동시에 김준룡군이 다수의-그러나 보병에 비해서는 비율이 밀리는-기병대를 보유했거나 아니면 규모가 큰 보급부대를 예하에 두었다는 새로운 추정을 만든다.
이상과 같은 근거들을 통해, 필자는 광교산 전투 당시의 김준룡 예하 군대가 최소 6천에서 최대 1만 이상일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았다.
이 추정은 세간의 통설과는 다르게, 김준룡군이 본인들에 대한 요격에 나선 청군보다 오히려 숫적으로 우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또 다른 추론을 내포한다.
기록을 살펴보건대, 청군은 근왕군에 대한 요격 작전이나 조선군과의 야전에 최소 수백, 최대 3~4천명 정도의 정예 요격군만을 투입했다. 그것은 적대 조선군이 5천이든 1만이든 유지되었던 기조인데, 본인들의 압도적인 집단전투력을 믿은 탓도 있지만 대군을 이용해 남한산성의 포위를 계속 유지해야 했기 때문도 있었다.16
당시 청군은 아직 '도로이 얼러훈 버일러' 두두의 후군, '호쇼이 머르건 친왕' 도르곤의 동로군이 본영에 도착치 않았기에 남한산성 포위병력에 아주 큰 여유가 없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를 단단히 유지해야 했던 홍타이지로서는, 전라도 근왕병에 대한 요격에도 기존과 마찬가지로 적은 수의 정예병력을 투입하는 것으로 전략을 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홍타이지로서는 상대(전라도 근왕군)가 험준한 지형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홍타이지는 상대의 숫적, 지형적 우위를 다소 경감시킬 수 있는 포병대를 동원하는 동시에, 본인이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청나라 최강의 용장'이자 '개국공신'인 양구리를 자신이 선정한 요격군 지휘관인 도도에게 붙여주어 확실히 근왕군을 제압코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양구리가 우연찮게 전사함으로서 그의 계획은 다소 틀어지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전라도 근왕군이 청군의 공세 지속 가능성을 감당치 못하고 결국 후퇴함으로서 청군의 전략에는 별 이상이 없었으나, 양구리의 죽음은 홍타이지와 청에게 있어 큰 손실이었다.
내국사원당에 의하면 홍타이지는 양구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이틀여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고, 그 이후에야 조금이나마 식사를 시작했다고 한다.17
김준룡의 군대가 기존 통설보다 군대의 수가 훨씬 많았다고 하여, 그리고 오히려 청군에 비해 숫적 우위를 점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광교산 전투의 선전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청군의 전투력과 당시의 전황을 생각해 볼 때에 김준룡군의 선전은 충분히 뛰어난 전과였다. 다만, 광교산 전투 이후 붕괴된 전라도 근왕군이 보인 행태는 다소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첨언하여, 유재성이 김준룡군을 2천명이라고 비정한 이유는, 아마도 병자록의 음력 1월 7일자의 기록 때문으로 보인다.
해당 날짜의 기록에는 이시방이 음력 12월 30일에 보낸 장계의 내용이 실려있는데, 중요한 부분은 '먼저 2천명의 군대를 광교산으로 보내서 병사(김준룡) 진영에 더했습니다.'는 부분이다.18
여기서 이시방이 김준룡에게 보낸 '2천 군대'는 아마도 음력 29일에 안성에서 광교산으로 보내진 전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료를 살피지 않고 해당 기록만으로 해석하면 자칫 김준룡 휘하의 군대가 해당 부대 2천명으로 끝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유재성이 해당 오류를 범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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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양구리의 죽음에 관해서는 기록에 따라 그 경위가 다르다. 조선의 기록에서는 크게 박의의 저격과 김준룡의 일제사격명령으로 설이 나뉘며, 청의 기록에서는 저격에 당했다고 나온다.
2.당시 양구리는 이미 전사했다.
3.다만 해당 전투 이후 김준룡 예하 근왕군 대부분은 철수 과정 도중 궤산되거나, 아예 대대적인 분란을 조장하여 문제를 발생시켰다. 그것은 전라도 지역의 근왕군 활동에 대한 큰 지적점이다.
4.『승정원일기』인조 15년 음력 2월 22일. 단, 청군의 사상자가 김준룡군의 사상자의 갑절 이상이었다는 김광혁의 증언은 당시 작전에 투입되었으리라 유추되는 청군의 규모와 이후의 전황을 생각해 보건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5.조경남,『속잡록』병자년 12월
6.조경남,『속잡록』정축년 음력 4월
7.이상의 국문 기록은 국문을 당하던 이시방의 자기변호주장임으로 해석에 주의를 요한다. 특히 인용문 뒤에 붙은, 광교산 전투 이후에 이시방 본인이 청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는 자기주장은 어떻게든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대폭 과장한 흔적이 보인다.
8.『승정원일기』인조 14년 음력 7월 15일
9.『승정원일기』인조 15년 11월 14일. 단, 후영군의 경우 김준룡의 지시 아래에서 죽산에서 후방 보조를 진행하다가 광교산으로 진군도중 부대가 흩어져 고작 2백여명만이 김준룡에게 합류했다.
10.나만갑, 『병자록』음력 1월 5일
11.정축년 음력 1월 5일 전령이 남한산성에 와 김준룡의 장계를 올린 것은『조선왕조실록』과『승정원일기』서도 확인된다.
12.김시양, 『하담파적록』全羅監司金俊龍領萬兵, 단 해당 기록에서는 전라병사인 김준룡이 전라감사로 오기되어 있다.
13.유계, 『시남집』,「남한일기」全南兵使金俊龍。領兵八千。進據光敎山瑞峯洞
14.2020년 11월 15일 추가 내용. 시남집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는 사실은 추가로 인용할 만한 근거사료를 찾던 도중 인터넷을 통해 발견했다. 시남집 남한일기 자체는 한국문집총간으로부터 참조했다.
15.『청태종실록』숭덕 2년 음력 1월 8일, 『내국사원당』숭덕 2년 음력 1월 7일
16.도르곤이 삼시카에게 명을 내려 도원수 김자점의 군대를 궤멸시킨 토산 전투는 '남한산성의 포위 유지를 위해 소수의 병력만 출격시킨' 경우에서 제외한다. 당시 청군의 투입병력이 최대범주 안쪽에 속하긴 했으나, 해당 전투는 도르곤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도중에 벌어진 일로서, 남한산성 포위 유지와는 상관 없었다.
17.『내국사원당』숭덕 2년 음력 1월 7일
18.장계를 보낸 날짜는 승정원일기의 정축년 음력 1월 7일 기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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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글이 완전판으로서 더 이상의 수정은 없을 것 같은데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이의를 판별하여 수용하여 수정할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