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여진에 속하는 후르카 세력의 추장중 한 명이었던 '랑주'라는 인물은 누르하치와 살갑게 지내며 서로간에 왕래를 했던 인물이다. 그의 장남은 양구리(yangguri)라는 인물이었는데 1572년 태어나 누르하치가 거병할 때인 1583년에는 12살의 소년이었다.
1583년~85년 사이 누르하치는 랑주에게 양구리를 자신에게 보내어 본인을 시위케 하는 것을 제안했다.1 랑주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양구리를 누르하치의 거점인 허투 알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런 양구리를 자신의 시위로 삼아 자신을 호종케 하는 동시에 전쟁경험을 쌓게 하였다. 누르하치가 양구리를 자신의 시위로 삼은 것은 일종의 유년기 군사 교육을 통해 양구리를 한 명의 뛰어난 전사이자 지휘관으로 육성하고, 자신을 섬기게 하여 차후 양구리가 이어받을 랑주의 세력을 자신의 속하로 삼기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양구리가 허투 알라에서 누르하치의 시위로 일하고 있을 무렵, 양구리의 고향에서는 사단이 일어났다. 그의 부친 랑주가 휘하에 두고 있던 부하들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때 랑주의 부인이자 양구리의 모친이었던 이(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양구리의 어린 동생 남타이와 함께 있었는데, 반란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어린 자식까지 죽이려 하자 남타이를 업고서는 무장을 한 채 집을 탈출한 뒤 자신을 추격해오는 반란자들을 활로 쏴대며 본래 본인의 고향이었던 곳을 도망쳤다.
부락에서 도망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자신의 남편의 친구 누르하치와 자신의 장남 양구리가 있는 허투 알라였다.
그녀는 추격대를 뿌리치고 마침내 허투 알라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 곳에서 누르하치와 양구리에게 지난 사정의 자초지종을 모두 말했다. 양구리는 그 소식을 듣고 극히 분노하였다. 아마도 이 때에 본인의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랑주를 죽이고 랑주의 부인을 추격했던 자들이 누르하치에게 귀부를 해왔다. 랑주의 부인이 도망쳤을 곳이 뻔하였고, 그녀가 그 곳에서 자신들을 고발했을 것 역시 뻔하였기에 누르하치가 친구의 복수를 명분으로 본인들을 공격해 오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먼저 항복을 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양구리는 귀부해 온 자신의 원수들을 자신의 재량대로 손수 살해해 버린 뒤 그 귀와 코를 베어 씹어먹음으로서 자신의 분노를 그대로 표출, 복수를 완수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14세. 시기는 1585년이다.
양구리가 본인의 원수를 죽인 정확한 일시는 확실치 않다. 그의 복수에 관한 내용이 실록에는 없고 팔기통지와 팔기통지의 사료를 인용한 청사고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당 사료들에는 이 복수의 정확한 시기가 서술되어 있지 않고 단지 양구리가 14세 였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사실 누르하치 시기의 실록(태조무황제실록, 태조고황제실록, 만주실록)의 내용 자체가 다른 시기 실록들에 비하여 분량이 적기 때문에 양구리와 같은 신하들의 이야기는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서, 양구리의 복수 역시 단지 1585년에 일어난 일이라고만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이 때 누르하치는 자신에게 귀부한 자를 죽인 양구리를 크게 질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크게 우대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양구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신의 딸이었다. 누르하치는 양구리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고, 그때부터 양구리에게는 어푸(efu, 부마)라는 작호가 따라붙게 되었다.
양구리는 이후 누르하치의 제일의 충신중 한 명이자 누르하치 세력내의 최고 맹장중 한 명으로서 두각을 내기 시작했다. 그 '최고 맹장'으로서의 명성은 그가 병자호란에서 전사할 때 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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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팔기통지와 청사고 양구리 열전에는 누르하치가 양구리를 자신의 시위로 보낼 것을 '명'하였다고 하는데 이 시기 누르하치의 세력규모를 생각해 보자면 아마도 '제안'이 좀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팔기통지와 청사고에 양구리를 입시케 '명'했다는 것은 아마도 누르하치의 초기 영향력을 실제보다 과장되게 기록키 위한 윤색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