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 누르하치의 건주와 나림불루와 부자이의 여허, 그리고 그들 산하의 연합세력간 최초의 충돌이 있었다.(둥 전투) 그러나 그 이후 약 1년 6개월여간 두 세력 사이에는 이렇다 할 충돌이 없었다. 그러한 충돌부재상황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으리라 보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명나라의 관심이 동방에 집중되면서 여진 세력의 군주들 역시도 최대한 군사적 움직임을 자제한 탓으로 보인다.
누르하치로서는 현재 형국서 명나라의 지원이 필요하긴 했으나 그들의 적극적 개입을 필요로 하진 않았고, 해서 여진 -특히 여허의 경우에는 애초에 명나라가 여진의 현재 형국에 물리적으로 개입치 않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명의 움직임이 가장 적극적이었던 1592년 무렵에는 행동을 자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1592년에 무슨 연유로 무력충돌을 잠시 중지했건간에, 1592년은 당시의 여진에게 있어서는 유례없을 정도로 평온한 한 해였다. 그러나 그 평온한 한 해란 거대한 전쟁의 전야에 불과했다.
한편 그 해에는 건주가 외교적으로 최초로 조선과 접촉했으며, 나아가 '황조에 공을 바치겠다'는 미사여구까지 덧붙이며 명나라의 허가가 있으면 조선과 명나라를 도와 임진왜란에 참전할 수도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 때 누르하치에게 실제적인 파병의 의지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파병 제안'을 누르하치가 실제적으로 행한 이유는 다가올 여허 연합과의 전쟁에 대비해 명나라와의 외교적 연대를 강화, 외교적 고립을 피하고 유사시 전쟁에 대한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실제로 파병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아무런 대가 없이 파병치는 않고 오히려 병력지원을 대가로 향후 여전세력간 전쟁에 가용할 물자, 요컨대 총과 포, 화약을 지원받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듬해인 1593년에는 해서 여진 국가인 여허와 하다 역시 이 '참전논의'에 끼어들었다. 1593년 음력 3월 명측의 조선에 대한 자문에 이러한 바가 서술되어 있는데 여허와 하다측이 명나라에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참전의사를 밝혔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두 세력의 왜란에 대한 참전논의가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 역시도 명나라에 본인들의 참전에 관한 의사를 능동적으로 타진했을 가능성이 크다.1
누르하치의 건주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허와 하다가 참전논의에 끼어든 이유는 건주가 명나라에 파병제안을 한 이유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슨 명나라와의 우호관계 강화를 위해 참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다만 건주가 여허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명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해 외교적 관계를 강화코자 했다면 여허는 건주를 무너뜨리거나 복속시킨 뒤 그 행동을 명으로부터 사후인준받기 위해서 외교적 관계를 강화코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1592년에 건주가 명나라에 왜란 참전에 관한 의견을 타진했다는 점이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건주가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파병'까지 거론하며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강화코자 하니 그들 역시도 경쟁적으로 파병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이 되었건간에, 당시 여허 역시 명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개선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이런 행동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외교적 행보였다.
1593년 음력 6월까지 이렇게 서로간에 외교적 활동만 했던, 특히 명나라를 향한 외교적 활동에 절치부심했던 여진 세력들은 이 무렵에 다시금 눈에 띄는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수세에 몰린 상황이던 건주가 먼저 움직인 것은 아니었으며 여허를 위시로 한 공세측 연합군이 먼저 움직인 것이었다.
여허가 그 시기쯤에 먼저 활동을 개시한 이유는, 지난 1년 반 동안 요동서의 명나라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명나라가 자신들간의 싸움에 개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본 탓으로 보인다. 명나라의 개입 가능성이 적다면 건주에 비해 월등한 전력으로 승리를 밀어붙일 수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뭣보다도 누르하치가 1년 반 동안 자신들에게 굴복치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 해서 여진의 맹주가 된 나림불루와 부자이로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었다. 건주를 묵과한다면, 곧 본인들의 통제력 역시 산하 혹은 동맹 세력들에게 의심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로서 거진 1년 6개월만의 군사행동이 결정되었다. 나림불루와 부자이는 하다의 멍거불루, 호이파의 바인다리는 물론이고 거진 수평적 관계에 가까웠던 울라의 만타이에게도 소집을 요구했고 그로서 네 세력의 군대가 집결했다. 그러나 이는 누르하치의 건주 세력을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위한 집결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들의 의도는 대공격을 개시하기 전의 탐색 시도에 가까웠다.
탐색전 성격의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나림불루와 부자이가 본인들만의 군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세 세력의 군대까지 소집한 까닭은 본인들의 맹주로서의 입지를 확인하고 나아가 향후의 연합작전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연합 세력에 의한 대규모 작전을 진행하기 전에 소규모 작전으로서 연합군이 제대로 손발이 맞게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거나 시험해보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부수적인 이유로 다른 세 세력의 군대까지 종군시키면 자신들의 전력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지간에, 여허는 그렇게 1593년 음력 6월 세 개의 해서 여진 세력 군대와 함께 건주로 출병했다. 그 군대의 숫자는 확인되지 않지만 탐색전이었기 때문에 아주 많지는 않았을 것이며 동시에 여러 버일러들이 직접 선도했으니만큼 아주 적지도 않았을 것이다.
---
아래는 각주
1.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음력 3월 20일, 사대문궤 선조 26년 동월 동일